(추풍령에서 속리산까지)
백두대간의 연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어느덧 추풍령을 지나 속리산을 향하고 있다.
이 곳 추풍령에서 속리산이 시작되는 상주의 화서면의 화령까지 대략 50km정도는 백두대간이 쉬어 가는 구간으로 백두대간이 끊긴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의구심이 드는 구간이고 백두대간을 걷는 기분이 아니라 그 명맥을 이어가기 바쁘고 산도 아니고 그렇다고 들판도 아닌 그런 구간의 연속이다
논두렁과 밭두렁을 따라가며 마을을 지나고 사과과수원의 한가운데 지나며 600-700m의 높이의 낮은 봉우리 몇 곳을 지나가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아주 재미없는 구간이고 도 경계선을 따라가는 구간도 아니라 지도를 펴놓고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긋기가 가장 어려운 구간이다.
이 길을 걸으면서도 사실 이 곳이 백두대간의 마루금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백두대간이 쉬어 가는 그런 구간이고 지관이 묘자리를 잡기 위해 품을 파는 그런 야산이다. 역시 산은 정상을 밟기 위해 많은 땀을 흘려가며 성취의 기쁨을 누려야 제 맛이다.
오름 짓을 할 때는 시원하게 한판 붙어보며 의지도 시험하고 가쁜 숨소리 내뿜으며 심장의 힘찬 박동을 느껴야 하는데 호랑이 없는 곳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고 다른 구간들 같으면 족보에도 못 오를 봉우리가 떳떳한 이름들을 갖고 있으며 거미줄과 모기들은 극성을 부리고 하루살이들은 가미가제특공대로 착각들 했나 왜 그리 눈 속으로 파고드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재미없는 구간이라 글을 타이핑하면서도 재미가 없어 잠시 옆길로 빠져 쉬어가려고 합니다. 넷상에 백두대간의 답사기록을 쓰고자 했던 직접적인 동기는 2005년 9월1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각계인사들의 시국에 관한 글들이었다
그 들의 면면을 보면 박형규 목사, 조비오 신부, 도법스님, 안병욱 교수, 박원순 변호사,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정영태 교수, 손호철 교수, 정현백 교수이고 모두들 하나같이 선거제도의 개편을 전제로 연정을 제안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하여 정치공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분들 중에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이끌고 계시고 국토를 탁발 순례 중인 지리산자락의 실상사 주님스님인 도법스님만이 대통령의 뜻을 이해하고 찬성의 의견을 피력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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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쉬고 어제부터 다시 경북 고령에서 탁발 순례를 시작해 걷느라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했다는 뉴스도 듣지 못했다.
대통령이 권력을 내놓고라도 지역 통합을 해보겠다고 한 것 아닌가. 그런 충정은 충정대로 받아들여 존중했으면 한다. 그런 제안을 우리 사회의 희망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왜 한국 사회가 끌어안지 못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 사회가 이미 형성된 틀과 선입견에 의한 상호 불신 때문에 그런 충정을 끌어안지 못하고 함부로 취급하는 것 같다.
좌우나 기존의 틀이 너무 완고하고, 사회가 움직이지 않으니 대통령이라도 이쪽 저쪽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충정을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발언을 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답답하기보다는, 이런 기회를 희망으로 끌어안지 못하고 편가르기만 하는 한국 사회가 답답하다. 머리로 이해타산만 하기보다는 이렇게 걸으면서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
...................
이러한 도법스님의 말씀은 그 분의 견해이므로 동의여부는 각자의 몫이지만 "머리로 이해타산만 하기보다는 이렇게 걸으면서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지막 한마디는 힘들게 백두대간을 걸었던 나에게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이렇게 걸으면서 좀더 본질적인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그 분의 답답함이 나의 답답함이라 산길을 걸었던 하찮은 경험을 이 곳에 글을 올려 답답함을 풀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그 다음날부터 백두대간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백두대간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국경이라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격전장이었다. 대륙을 향해 웅비하는 고구려로부터 신라를 보호해준 것 역시 백두대간이었고, 백제와 신라의 충돌을 지리적으로 중재하던 것 또한 백두대간이었다. 결코 쉽게 넘을 수 없는 천연의 성을 어쩌다가 애써 넘어가 보아도 후방의 지원이 쉽지 않은 탓에 이내 다시 쫓겨 넘어와야만 했던 것이 바로 그 옛날의 백두대간이다.
임진왜란의 그 격랑 속에서도 이 땅을 지켜준 것 역시 백두대간이란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군이 남해바다의 제해권을 확보하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이유도 동해바다를 통해 10만대군의 보급을 내륙으로 운반하려면 천연의 성곽인 백두대간을 넘어야 했으나 당시 도로망과 교통수단으로는 백두대간을 넘을 수 없어 남해바다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서해바다를 이용하는 보급로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를 미리 간파하여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백두대간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산천은 유구하여 대대로 강원과 경상이 그로부터 갈리고, 충청과 경상, 전라와 경상이 그로부터 나뉘었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오늘날의 도 경계가 되고 있음은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경계가 아닌 탓이다.
이런 천혜의 성곽에도 지대가 낮아 통하는 문이 있었으며 그 문은 바로 추풍령에서 속리산을 연결하는 상주지역이고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상주지역은 옛날부터 전략요충지였고 문물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경상도를 대표하는 고을이었다.
경주와 상주에서 한 글자씩 뽑아서 경상도라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 옛날 상주가 어떤 곳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은 상주지방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고 이 지방을 선점하려고 무던히도 공을 들였던 지역이다. 상주 땅에서 태어난 견훤은 아버지인 아자개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아자개가 지배했던 상주지역을 무력으로 빼앗을 수도 없어 무던히 고민하였고 그런 사이에 아자개가 왕건에게 상주지역을 헌납하여 후삼국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던 그런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런 구릉지대인 이 곳도 어김없이 물길을 양 지역으로 갈라놓은 분수령이 되어 이 곳을 지나는 도로변에는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임을 알리는 표지가 길을 찾는 길손에게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임을 알려주고 있다
백두대간을 훼손한 대표적인 사례 중에서 그 중 한 곳은 추풍령 채석광산이다. 대간의 능선 길까지 파 먹어와 한쪽은 이미 천길 낭떠러지를 만들어 욕부터 퍼부으며 위험스럽게 걸었던 그 길을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이틀을 이어오면 상주시 화서면 화령에 이르게되고 이 곳에서 백두대간의 힘찬 용트림은 다시 시작되어 속리산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이곳 화령의 도로변에는 6.25동난 때 국군 1개 연대가 북한군 1개 사단을 괴멸시킨 전과를 기념하는 화령장전투의 승전기념탑이 있다.
북한군은 이 곳을 통해 상주로 진격하여 문경으로 후퇴한 국군의 배후를 차단하려고 하였으나 이 곳에서 기습공격을 받아 대패하여 국군이 낙동강전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전투였고 이 전투에 참여했던 연대의 전 병력은 모두 1개급 특진을 하였다 하니 대단한 전과였음을 알 수 있다
화령에서 봉황산을 오르며 백두대간은 다시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하고 갈령을 지나 형제봉을 거쳐 속리산의 천황봉에 이르게 된다.
속리산은 충북 보은군에 위치한 산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경상북도 상주시와 도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충북 괴산군과 상주를 연결하는 도로가 개설되고 난 이후에는 법주사를 찾는 불자가 아니면 상주시 화북면에서 속리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요즘은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속리산은 등산객이 많이 찾는 국립공원이라 위험구간은 안전설비가 잘 되어있고 주능선의 신선대에는 막걸리를 파는 주막이 있어 지친 산꾼은 쉬어가기 그만이고 문장대의 매점에서도 필요한 간식을 준비할 수 있다.
여타 다른 국립공원은 이름난 산을 중심으로 국립공원을 지정하고 있으나 속리산 국립공원은 속리산의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부근의 각기 독립된 별개의 산 군락과 계곡을 묶어 하나의 권역으로 지정한 점이 특이하며 그 분포도 충북 보은군과 괴산군 그리고 경북 상주시 관내에 산재되어 있고 선유동계곡, 화양동계곡, 쌍곡구곡등의 절경은 모두 괴산군에 자리잡고 있다
속리산은 그 이름이 가진 뜻과 같이 속세를 떠난 불교를 먼저 연상케 하는 산이고 부처님의 말씀이 머무는 법주사가 자리잡고 있어 불교와 인연이 많은 산이다.
우리나라 산봉우리의 이름은 불교와 관련이 많으며 이 곳 속리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곳의 비로봉은 부처님의 별호인 비로자나불에서 유래되고 있고 비로봉의 이름을 가진 산을 예부터 신산이라 부르고 있어 속리산도 우리나라 9신산 중의 하나다
속리산에 관하여는 많은 선인들이 글을 남겼으나 그 중에서도 신라의 고운 최치원 선생님의 글귀가 속리산을 생각하면 늘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바른 길은 사람과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바른 길을 멀리하려 하고, 산은 속세를 멀리하지 않는데 속세는 산을 멀리하려 한다”. 여기서 마지막 글귀인 “속세는 산을 멀리 한다”를 원문으로 옮기면 바로 俗離山이다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황봉에 떨어진 빗물은 남한강과 낙동강 그리고 금강으로 각기 흘러가고 3곳으로 물줄기를 가르는 이 같은 삼수파 지역은 예부터 복지로 알려져 있어 속리산에 터를 잡고 많은 무속인들이 은둔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걸어온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떨어진 빗물은 금강과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곳 천황봉부터는 충청도에 떨어진 빗물은 금강과 남한강으로 나뉘어 흘러가고 있다.
이렇게 빗물이 이 곳에서 3줄기로 나눠 흘러가는 이유는 천황봉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분기되어 동쪽인 경상도쪽은 여전히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서쪽에 떨어진 빗물은 한남금북정맥이 분수령이 되어 북쪽은 남한강으로 남쪽은 금강으로 물줄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조상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인 산경표가 이렇듯 얼마나 치밀하고 정확하게 이 땅을 기록하고 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5천년의 역사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이런 역사가 밑거름이 되어 언젠가는 우리 손으로 세계사는 다시 쓰여질 것이란 것을 확신해본다
속리산의 8개 봉우리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비로봉이 아니고 천황봉이어서 이 곳 속리산에 오르면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어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비로봉의 이름이 있는 산의 최고봉은 모두 한결같이 비로봉이지만 속리산은 천황봉이 비로봉보다 더 높아 예외인 곳이다
이는 부처님보다 더 높은 지존은 있을 수 없다는 그런 뜻이었으나 감히 일제는 천황이 부처님보다 더 지존임을 이 곳 속리산에서 이 땅의 만백성에게 호도를 하였던 것이며 이런 잔재가 다른 곳도 아닌 국립공원에 버젓이 그대로 남아있음은 통탄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아직까지 시정하지 않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작태에 분노마저 느끼고 있다.
일제의 이런 잘못된 잔재는 우리사회의 각 분야에 무수히 널려있고 그 잔재를 모두 청산하기 전까지는 이 강토를 일제로부터 되찾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라 친일의 인적청산 못지 않게 이런 잘못된 것부터 발굴하여 하루빨리 개선해야 할 것이다.
천황봉은 속리산의 주봉답게 동서남북의 사방이 시원하게 열려있어 가슴을 확 뜨이게 하고 이 곳에서 발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속세의 아귀다툼이 얼마나 무상한지 돌이켜 생각나게 하여 속세를 멀리한 그 이름 속리산, 왜 속리산이라 이름 지워졌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아이들에게 산에 가자고 한 번도 권유한 적이 없다. 그 들이 살아가며 산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산에 갈 것이고 또 산을 싫어하면 그만이다. 혈기가 넘치는 젊은애들이니 건강 때문에 산에 갈 필요도 없을 것이며 벌써부터 이런 무상함을 알게되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언제나 경쟁에서 한 발짝 물러선 지 애비 짝 날 것이다
속리산에는 비로봉, 천황봉등 8개의 봉우리와 문장대, 경업대등 8곳의 대가 있다. 우연하게 8이란 숫자가 중복되어 예사롭지 않고, 불교에서 수행의 가르침으로 삼고 있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인 8정도가 떠올라 이런 법이 머무는 이 곳에 법주사의 그 이름이 그냥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잠시 가져봤다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걸음을 원망하며 천황봉을 떠나 신선대에 도착하여 산중의 주막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문장대의 높은 바위에 올라서서 밤티재로 이어진 대간 능선을 다시금 확인한 후에 출입을 금지한 울타리를 몰래 넘어 밤티재로 걸음 옮기며 바라본 수석전시장의 만물상은 몇 일간의 긴 여정을 유감 없이 보상해 주고있어 발걸음을 자꾸만 멈추게 한다.
문장대에서 밤티재구간은 속리산의 일반등산로가 아닌 탓에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으나 속리산에서 가장 멋진 구간이고 바위틈새의 개구멍 4-5곳을 낮은 포복으로 통과해야만 했다
형제봉에서 천황봉, 비로봉, 신선대. 문장대, 관음봉, 묘봉에 이르기까지 활모양의 형태로 이어진 속리산의 주능선은 경북 상주시와 충북 보은군의 경계를 이루며 백두대간은 문장대에서 도 경계선과 잠시 이별하고 청화산에서 다시 조우하게 된다
청화산으로 이어지는 늘티재에서 몇 일간의 산행을 모두 마치고 지나가는 차량의 도움의 받아 괴산에서 동서울행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 앞으로 이어갈 대간 길을 상상해본다.
문경새재를 지나 월악산권역으로 진입하여 소백산을 찾아가는 큰 그림은 그려지고 있으나 소백산까지 남은 거리는 얼마나 되고 몇 일이 소요될 것인지 아직은 가름하기가 쉽지 않다
왜, 백두대간을 완주한다고 고집을 부려 이 고생을 하는지 한편으로는 후회도 되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포기하자니 그동안 고생한 것이 아깝고 특히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할 가장으로서 포기한다는 것은 체면이 말이 아니다.
하여튼 고생은 사서하고 있으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이 땅에 백두대간이 있는 것을 원망해야지
백두대간의 연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어느덧 추풍령을 지나 속리산을 향하고 있다.
이 곳 추풍령에서 속리산이 시작되는 상주의 화서면의 화령까지 대략 50km정도는 백두대간이 쉬어 가는 구간으로 백두대간이 끊긴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의구심이 드는 구간이고 백두대간을 걷는 기분이 아니라 그 명맥을 이어가기 바쁘고 산도 아니고 그렇다고 들판도 아닌 그런 구간의 연속이다
논두렁과 밭두렁을 따라가며 마을을 지나고 사과과수원의 한가운데 지나며 600-700m의 높이의 낮은 봉우리 몇 곳을 지나가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아주 재미없는 구간이고 도 경계선을 따라가는 구간도 아니라 지도를 펴놓고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긋기가 가장 어려운 구간이다.
이 길을 걸으면서도 사실 이 곳이 백두대간의 마루금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백두대간이 쉬어 가는 그런 구간이고 지관이 묘자리를 잡기 위해 품을 파는 그런 야산이다. 역시 산은 정상을 밟기 위해 많은 땀을 흘려가며 성취의 기쁨을 누려야 제 맛이다.
오름 짓을 할 때는 시원하게 한판 붙어보며 의지도 시험하고 가쁜 숨소리 내뿜으며 심장의 힘찬 박동을 느껴야 하는데 호랑이 없는 곳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고 다른 구간들 같으면 족보에도 못 오를 봉우리가 떳떳한 이름들을 갖고 있으며 거미줄과 모기들은 극성을 부리고 하루살이들은 가미가제특공대로 착각들 했나 왜 그리 눈 속으로 파고드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재미없는 구간이라 글을 타이핑하면서도 재미가 없어 잠시 옆길로 빠져 쉬어가려고 합니다. 넷상에 백두대간의 답사기록을 쓰고자 했던 직접적인 동기는 2005년 9월1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각계인사들의 시국에 관한 글들이었다
그 들의 면면을 보면 박형규 목사, 조비오 신부, 도법스님, 안병욱 교수, 박원순 변호사,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정영태 교수, 손호철 교수, 정현백 교수이고 모두들 하나같이 선거제도의 개편을 전제로 연정을 제안한 대통령의 발언에 대하여 정치공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분들 중에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이끌고 계시고 국토를 탁발 순례 중인 지리산자락의 실상사 주님스님인 도법스님만이 대통령의 뜻을 이해하고 찬성의 의견을 피력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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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쉬고 어제부터 다시 경북 고령에서 탁발 순례를 시작해 걷느라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했다는 뉴스도 듣지 못했다.
대통령이 권력을 내놓고라도 지역 통합을 해보겠다고 한 것 아닌가. 그런 충정은 충정대로 받아들여 존중했으면 한다. 그런 제안을 우리 사회의 희망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왜 한국 사회가 끌어안지 못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 사회가 이미 형성된 틀과 선입견에 의한 상호 불신 때문에 그런 충정을 끌어안지 못하고 함부로 취급하는 것 같다.
좌우나 기존의 틀이 너무 완고하고, 사회가 움직이지 않으니 대통령이라도 이쪽 저쪽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충정을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발언을 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답답하기보다는, 이런 기회를 희망으로 끌어안지 못하고 편가르기만 하는 한국 사회가 답답하다. 머리로 이해타산만 하기보다는 이렇게 걸으면서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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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도법스님의 말씀은 그 분의 견해이므로 동의여부는 각자의 몫이지만 "머리로 이해타산만 하기보다는 이렇게 걸으면서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지막 한마디는 힘들게 백두대간을 걸었던 나에게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이렇게 걸으면서 좀더 본질적인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그 분의 답답함이 나의 답답함이라 산길을 걸었던 하찮은 경험을 이 곳에 글을 올려 답답함을 풀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그 다음날부터 백두대간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백두대간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국경이라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격전장이었다. 대륙을 향해 웅비하는 고구려로부터 신라를 보호해준 것 역시 백두대간이었고, 백제와 신라의 충돌을 지리적으로 중재하던 것 또한 백두대간이었다. 결코 쉽게 넘을 수 없는 천연의 성을 어쩌다가 애써 넘어가 보아도 후방의 지원이 쉽지 않은 탓에 이내 다시 쫓겨 넘어와야만 했던 것이 바로 그 옛날의 백두대간이다.
임진왜란의 그 격랑 속에서도 이 땅을 지켜준 것 역시 백두대간이란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군이 남해바다의 제해권을 확보하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이유도 동해바다를 통해 10만대군의 보급을 내륙으로 운반하려면 천연의 성곽인 백두대간을 넘어야 했으나 당시 도로망과 교통수단으로는 백두대간을 넘을 수 없어 남해바다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서해바다를 이용하는 보급로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를 미리 간파하여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백두대간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산천은 유구하여 대대로 강원과 경상이 그로부터 갈리고, 충청과 경상, 전라와 경상이 그로부터 나뉘었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오늘날의 도 경계가 되고 있음은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경계가 아닌 탓이다.
이런 천혜의 성곽에도 지대가 낮아 통하는 문이 있었으며 그 문은 바로 추풍령에서 속리산을 연결하는 상주지역이고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상주지역은 옛날부터 전략요충지였고 문물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경상도를 대표하는 고을이었다.
경주와 상주에서 한 글자씩 뽑아서 경상도라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 옛날 상주가 어떤 곳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은 상주지방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고 이 지방을 선점하려고 무던히도 공을 들였던 지역이다. 상주 땅에서 태어난 견훤은 아버지인 아자개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아자개가 지배했던 상주지역을 무력으로 빼앗을 수도 없어 무던히 고민하였고 그런 사이에 아자개가 왕건에게 상주지역을 헌납하여 후삼국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던 그런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런 구릉지대인 이 곳도 어김없이 물길을 양 지역으로 갈라놓은 분수령이 되어 이 곳을 지나는 도로변에는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임을 알리는 표지가 길을 찾는 길손에게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임을 알려주고 있다
백두대간을 훼손한 대표적인 사례 중에서 그 중 한 곳은 추풍령 채석광산이다. 대간의 능선 길까지 파 먹어와 한쪽은 이미 천길 낭떠러지를 만들어 욕부터 퍼부으며 위험스럽게 걸었던 그 길을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이틀을 이어오면 상주시 화서면 화령에 이르게되고 이 곳에서 백두대간의 힘찬 용트림은 다시 시작되어 속리산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
이곳 화령의 도로변에는 6.25동난 때 국군 1개 연대가 북한군 1개 사단을 괴멸시킨 전과를 기념하는 화령장전투의 승전기념탑이 있다.
북한군은 이 곳을 통해 상주로 진격하여 문경으로 후퇴한 국군의 배후를 차단하려고 하였으나 이 곳에서 기습공격을 받아 대패하여 국군이 낙동강전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전투였고 이 전투에 참여했던 연대의 전 병력은 모두 1개급 특진을 하였다 하니 대단한 전과였음을 알 수 있다
화령에서 봉황산을 오르며 백두대간은 다시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하고 갈령을 지나 형제봉을 거쳐 속리산의 천황봉에 이르게 된다.
속리산은 충북 보은군에 위치한 산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경상북도 상주시와 도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충북 괴산군과 상주를 연결하는 도로가 개설되고 난 이후에는 법주사를 찾는 불자가 아니면 상주시 화북면에서 속리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요즘은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속리산은 등산객이 많이 찾는 국립공원이라 위험구간은 안전설비가 잘 되어있고 주능선의 신선대에는 막걸리를 파는 주막이 있어 지친 산꾼은 쉬어가기 그만이고 문장대의 매점에서도 필요한 간식을 준비할 수 있다.
여타 다른 국립공원은 이름난 산을 중심으로 국립공원을 지정하고 있으나 속리산 국립공원은 속리산의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부근의 각기 독립된 별개의 산 군락과 계곡을 묶어 하나의 권역으로 지정한 점이 특이하며 그 분포도 충북 보은군과 괴산군 그리고 경북 상주시 관내에 산재되어 있고 선유동계곡, 화양동계곡, 쌍곡구곡등의 절경은 모두 괴산군에 자리잡고 있다
속리산은 그 이름이 가진 뜻과 같이 속세를 떠난 불교를 먼저 연상케 하는 산이고 부처님의 말씀이 머무는 법주사가 자리잡고 있어 불교와 인연이 많은 산이다.
우리나라 산봉우리의 이름은 불교와 관련이 많으며 이 곳 속리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곳의 비로봉은 부처님의 별호인 비로자나불에서 유래되고 있고 비로봉의 이름을 가진 산을 예부터 신산이라 부르고 있어 속리산도 우리나라 9신산 중의 하나다
속리산에 관하여는 많은 선인들이 글을 남겼으나 그 중에서도 신라의 고운 최치원 선생님의 글귀가 속리산을 생각하면 늘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바른 길은 사람과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바른 길을 멀리하려 하고, 산은 속세를 멀리하지 않는데 속세는 산을 멀리하려 한다”. 여기서 마지막 글귀인 “속세는 산을 멀리 한다”를 원문으로 옮기면 바로 俗離山이다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황봉에 떨어진 빗물은 남한강과 낙동강 그리고 금강으로 각기 흘러가고 3곳으로 물줄기를 가르는 이 같은 삼수파 지역은 예부터 복지로 알려져 있어 속리산에 터를 잡고 많은 무속인들이 은둔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걸어온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떨어진 빗물은 금강과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곳 천황봉부터는 충청도에 떨어진 빗물은 금강과 남한강으로 나뉘어 흘러가고 있다.
이렇게 빗물이 이 곳에서 3줄기로 나눠 흘러가는 이유는 천황봉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분기되어 동쪽인 경상도쪽은 여전히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서쪽에 떨어진 빗물은 한남금북정맥이 분수령이 되어 북쪽은 남한강으로 남쪽은 금강으로 물줄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조상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인 산경표가 이렇듯 얼마나 치밀하고 정확하게 이 땅을 기록하고 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5천년의 역사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이런 역사가 밑거름이 되어 언젠가는 우리 손으로 세계사는 다시 쓰여질 것이란 것을 확신해본다
속리산의 8개 봉우리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비로봉이 아니고 천황봉이어서 이 곳 속리산에 오르면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어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비로봉의 이름이 있는 산의 최고봉은 모두 한결같이 비로봉이지만 속리산은 천황봉이 비로봉보다 더 높아 예외인 곳이다
이는 부처님보다 더 높은 지존은 있을 수 없다는 그런 뜻이었으나 감히 일제는 천황이 부처님보다 더 지존임을 이 곳 속리산에서 이 땅의 만백성에게 호도를 하였던 것이며 이런 잔재가 다른 곳도 아닌 국립공원에 버젓이 그대로 남아있음은 통탄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아직까지 시정하지 않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작태에 분노마저 느끼고 있다.
일제의 이런 잘못된 잔재는 우리사회의 각 분야에 무수히 널려있고 그 잔재를 모두 청산하기 전까지는 이 강토를 일제로부터 되찾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라 친일의 인적청산 못지 않게 이런 잘못된 것부터 발굴하여 하루빨리 개선해야 할 것이다.
천황봉은 속리산의 주봉답게 동서남북의 사방이 시원하게 열려있어 가슴을 확 뜨이게 하고 이 곳에서 발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속세의 아귀다툼이 얼마나 무상한지 돌이켜 생각나게 하여 속세를 멀리한 그 이름 속리산, 왜 속리산이라 이름 지워졌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아이들에게 산에 가자고 한 번도 권유한 적이 없다. 그 들이 살아가며 산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산에 갈 것이고 또 산을 싫어하면 그만이다. 혈기가 넘치는 젊은애들이니 건강 때문에 산에 갈 필요도 없을 것이며 벌써부터 이런 무상함을 알게되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언제나 경쟁에서 한 발짝 물러선 지 애비 짝 날 것이다
속리산에는 비로봉, 천황봉등 8개의 봉우리와 문장대, 경업대등 8곳의 대가 있다. 우연하게 8이란 숫자가 중복되어 예사롭지 않고, 불교에서 수행의 가르침으로 삼고 있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인 8정도가 떠올라 이런 법이 머무는 이 곳에 법주사의 그 이름이 그냥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잠시 가져봤다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걸음을 원망하며 천황봉을 떠나 신선대에 도착하여 산중의 주막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문장대의 높은 바위에 올라서서 밤티재로 이어진 대간 능선을 다시금 확인한 후에 출입을 금지한 울타리를 몰래 넘어 밤티재로 걸음 옮기며 바라본 수석전시장의 만물상은 몇 일간의 긴 여정을 유감 없이 보상해 주고있어 발걸음을 자꾸만 멈추게 한다.
문장대에서 밤티재구간은 속리산의 일반등산로가 아닌 탓에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으나 속리산에서 가장 멋진 구간이고 바위틈새의 개구멍 4-5곳을 낮은 포복으로 통과해야만 했다
형제봉에서 천황봉, 비로봉, 신선대. 문장대, 관음봉, 묘봉에 이르기까지 활모양의 형태로 이어진 속리산의 주능선은 경북 상주시와 충북 보은군의 경계를 이루며 백두대간은 문장대에서 도 경계선과 잠시 이별하고 청화산에서 다시 조우하게 된다
청화산으로 이어지는 늘티재에서 몇 일간의 산행을 모두 마치고 지나가는 차량의 도움의 받아 괴산에서 동서울행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 앞으로 이어갈 대간 길을 상상해본다.
문경새재를 지나 월악산권역으로 진입하여 소백산을 찾아가는 큰 그림은 그려지고 있으나 소백산까지 남은 거리는 얼마나 되고 몇 일이 소요될 것인지 아직은 가름하기가 쉽지 않다
왜, 백두대간을 완주한다고 고집을 부려 이 고생을 하는지 한편으로는 후회도 되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포기하자니 그동안 고생한 것이 아깝고 특히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할 가장으로서 포기한다는 것은 체면이 말이 아니다.
하여튼 고생은 사서하고 있으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이 땅에 백두대간이 있는 것을 원망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