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16세 북한 광산 여공, 통일 연구하는 국책연구원이 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오완선 2024. 6. 30. 11:36

 

탈북민 조현정 박사가 걸어온 길

지난해 12월 탈북민 최초로 국책연구기관에 공채로 채용된 조현정 박사.2003년 7월 31일. 태국 방콕 주재 일본대사관에 아이 두 명을 포함한 탈북민 10명이 진입했다. 탈북민이 중국이 아닌 나라에서 현지 외국 대사관에 진입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망명 요청을 했지만, 일본 정부가 불허하면서 8월 23일 한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 내린 이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얼굴을 숨기기에 바빴다.

그런데 남자 아이의 손을 잡은 한 여성만은 달랐다. 카메라 앞에서 당당히 얼굴을 내밀고 행복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2023년 12월 이 여성은 박사가 돼 통일연구원에 당당히 입사했다. 국무총리 산하 국책연구기관에 공채로 채용된 제1호 탈북민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통일연구원 인권연구실 조현정 부연구위원(49)의 얘기다. 북한에서 태어나 한 달도 안돼 고아원에 보내졌고, 16세에 광산노동자가 됐던 그의 운명은 대한민국에서 완전히 바뀌었다.

● 생후 보름 만에 고아원으로

조 씨가 태어난 곳은 북한 북부의 무산군이다. 1975년 무산광산 노동자 부부의 딸로 태어난 그는 보름 만에 고아원에 보내졌다. 어머니가 출산과 동시에 개방성 결핵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흔히 1970년대는 북한이 한국보다 잘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때에도 이미 북한 사람들은 생활은 넉넉지 않았다. 매일 도시락까지 싸서 출근하기엔 배급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조 씨의 어머니는 남편에게만 도시락을 보내고, 자신은 빈 도시락을 들고 출근했다. 임신하고도 그런 생활이 이어졌다. 결국 어머니는 임신 중 영양상태가 악화되면서 감기에 걸렸고, 곧바로 개방성 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떨어진 조 씨는 어머니 젖을 먹을 수가 없었다. 분유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외할머니가 아이를 들쳐업고 젖동냥을 다녔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가족들은 토론 끝에 아이를 도소재지에 있는 나남애육원(고아원)에 보내기로 했다.

13개월 뒤 애육원을 찾았던 외할머니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애육원에서 제대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한 아이는 제대로 앉지도 못했고, 뒤통수에는 머리카락도 자라지 않았다. 이대로 그냥 둬도 죽고, 데려 가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외할머니는 절망의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애를 끓이다 할머니는 아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외할머니는 무산광산의 한 직장에서 미장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이를 업고 매일 출근했다. 미장공은 단독 작업이 가능해 아이를 작업장 옆에 눕혀놓고 일한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조 씨는 어린 시절 주말마다 외할머니와 함께 어머니가 격리돼 있던 결핵요양소로 면회를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요양소에는 결핵에 걸린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2003년 8월 23일 아들의 손을 잡고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는 조 씨가 기자들의 카메라에 찍혔다.

● 10살도 안돼 떠난 부모

조 씨의 아버지는 목공기술자였다. 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평양시 보통강구역였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로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온 가족이 하루아침에 아오지탄광으로 추방됐다. 아오지탄광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손재주를 인정받았고, 사정이 조금 나은 무산광산으로 이송됐다. 그리고 무산에서 조 씨의 모친을 만나 결혼했다.

조 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하는 목공소를 가끔 따라 갔다. 그러다 4살 때 큰 일을 당한다. 호기심에 돌아가는 기계톱을 만졌다가 엄지손가락을 포함해 오른손 손가락 2개가 절단된 것이다.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요양소에 있던 어머니가 완치되지 못한 채 그가 6살 때 돌아가신 것이다.

어머니가 숨진 뒤 두 달쯤 됐을 때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왔다. 이어 담요 두 장과 그릇 두 개만 주고 조 씨와 외할머니를 집에서 몰아냈다. 쫓겨난 조 씨는 외할머니와 함께 인근 마을의 허름한 집을 수리해 살아야 했다.

그런 수모를 당했어도 외할머니는 “내가 죽으면 그래도 너에게 남은 것은 아버지 뿐”이라며 “자주 가서 아버지와 친분을 쌓으라”고 종종 조 씨를 부친의 집에 보냈다.

어렸을 때는 시키는 대로 했지만, 새엄마의 냉대는 어린 나이에도 참을 수 없었다. 다섯 번 정도 아버지를 찾은 뒤 발길을 끊었다. 그렇게 조 씨는 10살도 안 돼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

유일한 보호자였던 외할머니는 그가 열 살 때 연로보장(정년퇴직)으로 퇴직했다. 이후 조 씨는 외할머니가 시장에서 소소한 장사로 벌어오는 돈으로 살아야만 했다.

2023년 한 행사에 참가해 축사를 하고 있는 조 씨.

● 좌절된 교사의 꿈

조 씨는 “부모없는 아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 열심히 공부했다. 또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토끼가죽이니 폐지, 폐철 등도 제일 열심히 챙겨갔다. 그런데 아무리 성적이 우수해도 그가 원했던 학급의 핵심 간부가 될 수 없었다. 학생 간부 자리는 부모의 권력 순으로 배정됐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도 “이 사회는 돈과 권력이면 다 되는구나”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중학교 때는 가수의 꿈을 품고 학교 음악부에 뽑혔지만 한 달도 안돼 쫓겨났다. 손가락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탓이다. 10대의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충격이고 절망이었다.

평소에 공부를 잘했던 터라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교원이 되는 것으로 꿈을 바꿨다. 하지만 그가 대학 시험을 치를 때 외할머니가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뒷바라지 없이 대학에 다니는 것은 불가능했다. 외할머니도 돌봐야 했던 조 씨는 결국 선생님의 꿈을 접었다.

조 씨는 1991년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졸업한 남자들은 군에 가고, 여자들은 무산광산으로 보내졌다. 조 씨는 광산 검사과에 배정됐다.

그에게 맡겨진 업무는 마광기(광석을 잘게 부수는 기계) 3,4대를 대상으로 1시간마다 한 번씩 철정광과 미광의 철성분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8시간 일을 하고 퇴근하면 병상에 누워있는 외할머니를 돌봐야 했다. 손녀의 극진한 간호에 외할머니는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호전됐다. 다만 안면마비는 고치지 못했다.

당시 조 씨의 소원은 외할머니에게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대접하는 것이었지만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무산광산 사람들은 배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외할머니가 소소한 장사와 소토지 농사를 지어 식량을 조달했지만, 1995년 집에 도둑이 들어 모든 식량을 털어갔다. 살길이 막막했다.

 

● 22세 첫 탈북

하지만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었다. 직장에서 만난 친한 언니의 부모가 조 씨를 좋게 봤고, 그를 며느리로 삼고 싶다고 했다. 그 집안은 중국에 친척들이 많아 풍족하게 살았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조 씨는 20세에 결혼을 선택했다. 결혼을 하고나서야 외할머니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대접하고 싶다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듬해 7월 아들도 태어났다.

결혼으로 굶어 죽을 걱정은 덜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삶이 지옥으로 바뀌었다. 풍족하게 자란 남편은 뇌물을 주고 무단결근하면서 술과 도박, 폭력을 일삼았다. 보다 못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중국 친척집에 말해줄테니, 중국에 건너가 돈을 벌라”고 했다.

그렇게 조씨는 1997년 8월, 13개월 된 아들을 업고 처음으로 두만강을 건넜다. 외할머니는 친척집에 맡기고 “꼭 돈을 벌어올 테니 석 달만 좀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헤어지기 전 두부밥 2개를 사드린 것이 외할머니와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큰 결심을 품고 중국에 갔지만, 불법체류로 아이까지 있는 여성에게 일자리가 생각처럼 쉽게 생기지 않았다. 두 달 정도 연길에 머물다가 시댁의 다른 친척이 사는 흑룡강성에 들어갔다.

거기서 농촌에 자리를 잡고 막 돈을 벌려는 순간 북한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떠나고 얼마 안 돼 외할머니가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빨리 돌아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조 씨는 지금도 외할머니만 떠올리면 죄책감 때문에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를 대신해 키워준 외할머니에게 효도하려했던 선택했던 방법이 불효의 길이 된 것 같아 평생의 한으로 남게 됐다. 외할머니가 돌아가니 이젠 북으로 돌아갈 이유도 사라졌다.

중국에서 조 씨는 1997년 한반도의 이슈였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때 “여기서 언제 잡혀갈지 몰라 숨을 죽이고 살 바에는 한국에 가자”는 결심이 섰다.
하지만 어린 아들을 데리고 쉽게 떠날 용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당시엔 중국에 있는 탈북민들이 한국으로 가는 방법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중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오래되면서 조 씨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탈북민들도 알게 됐다. 1년쯤 지나니 한국으로 가려는 탈북민이 11명이 모였다. 그중에는 조 씨의 남편과 시동생 두 명도 있었다. 남편은 아들을 찾겠다고 중국으로 따라들어온 것이다.

통일연구원 채용 이후 찍은 프로필 사진.

● 북송 이후 받은 10년형

1998년 말 이들은 나침판과 지도를 사들고 중국 남부의 난닝으로 간 뒤 라오스로 넘어갔다. 동남아를 통해 한국으로 오는 길은 2000년 이후부터 개척됐다. 그 이전까지 동남아 각국은 탈북민을 잡아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냈는데, 라오스도 다르지 않았다.

라오스에서 중국으로 송환된 뒤 수감된 난닝감옥에서 이들 11명은 목숨을 건 단식을 시작했다. 일주일 넘게 밥을 먹지 않자 당황한 현지 공안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당시엔 중국 남부에는 탈북민이란 개념 자체가 생소해 이들을 외국인으로 대해주었다.

풀려난 이들은 이번엔 미얀마로 향했다. 나침판에 의지해 미얀마까진 들어가는 데 성공했지만 이번에도 잡혔다. 다시 중국에 송환됐는데, 이번엔 쿤밍감옥이었다. 일행은 또 단식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이들은 1999년 1월 비행기에 실려 북중 국경 투먼으로 옮겨진 뒤 곧장 북한으로 송환됐다. 당시엔 한국으로 가려던 사실이 들키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송환되기 전 일행은 “죽어도 비밀을 지키자”고 약속했다.

북한으로 끌려가자마자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따로 분리됐다. 며칠 뒤 조 씨는 아들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3살 밖에 안 된 아들이 동상에 걸려 손이 시꺼멓게 부풀어있었다. 가슴 미어질 듯 아팠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북송된 아이들은 연고자가 찾아올 때까지 그런 열악한 상태에서 방치돼 있었다.

국경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고 어른들은 도 소재지인 청진집결소로 이송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행을 기도했던 사실을 모두가 잘 숨겼는데, 일행 중 한 명이 끝내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실을 고백했다. 청진집결소에서 이들은 도 보위부에 넘겨져 3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은 뒤 10년형을 언도 받았다.

절차와 형식에 따라 10년형을 선고받았을 뿐이지 사실상 종신형이었다. 한국으로 가려 했던 사람은 10년이 지나도 해도 석방시키지 않는다. 게다가 정치범수용소에서 10년을 견디고 살아남아 출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전에 다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 씨는 수용소에서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 졸지에 자식들을 다 잃게 된 시어머니가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중국 친척들에게서 8000위안을 구해온 뒤 평양 보위부의 연줄을 찾아 뇌물을 먹였다. 뇌물의 힘은 엄청났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에 따라 조 씨는 ‘피동분자’로 분류돼 6개월 만에 석방됐다. 남편과 시동생들은 1년형으로 감형 받고 요덕수용소에 끌려갔다가 2000년 여름쯤에 모두 집으로 돌아왔다.

2006년 10살이 된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 방콕 일본대사관 진입

조 씨는 석방된 이후 감시를 피해 도망갈 틈을 수시로 노렸다. 그리고 2000년 겨울 다시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갔고, 산동 위해에 있는 식당에 취직했다.

위해에서 1년 반쯤 지났을 때 조 씨는 탈북 브로커를 소개받았다. 당시에는 탈북민들이 브로커를 통해 한국으로 가는 방법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2002년 여름 중국을 떠나려 했다. 그런데 앞서 출발했던 팀으로부터 탈북민 구출 활동가로 알려진 한국인 목사가 여정 중 여성들을 성폭행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계획을 취소했다.

대안을 찾아야 했고, 2002년 말 1인당 300만 원을 주기로 계약하고 중국을 출발했다. 태국 방콕에 도착해 현지 한인교회를 찾아가니 한국행을 기다리는 탈북민이 빼곡했다.

교회에서 마련해준 임시 거처에서 두 달쯤 기다리는 동안 남편이 미국에서 탈북민을 난민으로 받아주는 법안이 통과되었다며 한국보다 미국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한국행을 기다리던 탈북민 여럿이 이에 동조했고, 조 씨도 따라나섰다. 이들은 방콕 미국대사관 진입을 계획하고 며칠 동안 주변을 맴돌며 정찰했다. 하지만 진입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일본대사관으로 가보자고 방향을 바꾸었다. 일본대사관은 차가 드나들 때 전기 철문이 열렸다 닫히는 시간이 길어 그 틈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2003년 7월 31일 조 씨를 포함한 탈북민 10명은 그렇게 일본대사관 진입에 성공했다.

일본대사관에 들어간 뒤 유엔의 조사를 받았다. 처음엔 미국에 보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유엔 측은 요구를 거절했다. 그들은 일본으로 보내달라는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의 일본대사관 진입은 당시 언론에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대사관 담장 밖에는 기자들이 진을 쳤다. 외부 활동이 금지된 채 일본대사관 경내에서 머무는 24일 동안 강당에 칸막이를 하고 살아야 했다.

이 때 한국대사관에서 찾아와 “한국으로 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고, 승낙하면 최대한 빨리 한국에 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설득했다. 마침내 일행이 한국에 가겠다고 결정하자 3일 만에 비행기를 타게 됐다.

2020년 8월 조 씨는 이화여대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 대한민국에서의 첫 최우수상

2003년 8월 23일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공항 밖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북한에 가족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하지만 북에 아무 연고도 없는 조 씨는 굳이 얼굴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가 아들의 손을 잡고 미소를 띤 채 공항 밖을 나오는 사진은 그렇게 포착됐다.

조 씨는 한국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부자가 되고 싶었다. 태어나서부터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 살았기에 무조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회에 나가서 10년 안에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이를 위해 이를 악물었고, 하나원 시절부터 하나씩 실천해 나갔다. 손가락 장애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컴퓨터 타자 연습도 열심히 했다. 그 결과 하나원을 졸업할 때 치르는 타자 시험에서 동기생 중 1등을 차지했다.

그가 하나원에 있을 때부터 여성들에게도 운전면허 이론 수업이 진행됐고, 시험을 칠 기회도 주어졌다. 당시 동기 50여 명 가운데 남성 1명과 여성 3명만이 이론시험을 통과했는데, 조 씨는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노력 끝에 조 씨는 하나원을 졸업할 때 최우수상을 받았다.

하나원 교육과정을 마치고 정착한 곳은 충남 서산이었다. 하나원을 나올 때 그는 “시간은 돈이다”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사회에 나오자마자 벼룩시장을 뒤져 새벽부터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았고, 그렇게 처음 찾은 일이 신문배달이었다.

하나원을 수료한 지 보름도 안된 어느날 동네 신문지국에 방문해 배달자리를 찾는다고 했다. 함북 사투리를 쓰는 28세 젊은 여성이 잘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자, 지국장은 기특했는지 100세대를 할당했다.

집집마다 구독하는 신문 종류도, 부수도 달랐다. 하지만 그는 한 달 만에 코스와 정보를 모두 습득했다. 초기엔 새벽 2시에 나와 100세대를 배달하는데 4시간 반이 걸렸지만 두 달 뒤엔 3시간으로, 나중엔 한 시간으로 줄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전문성은 노력의 산물이란 교훈도 얻었다.

낮에는 운전학원을 다니며 실기시험 준비를 했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학원셔틀버스 운전기사의 부인이 “보험설계사란 직업이 있는데, 노력한 것만큼 돈을 받을 수 있으니 해보면 어떻겠냐”고 귀띔을 해줬다.

귀가 솔깃해진 그는 선뜻 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 한 달 동안 SK생명 서산지점에서 보험설계사 자격시험 교육을 받았다. ‘클라이언트’ ‘리쿠르팅’ 등 낯선 외래어와 금융, 경제지식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차근차근 공부하면서 보험설계사 시험도 합격했다. 이후 지점장 면접에서 “학연, 지연, 혈연도 없고, 말투도 다른데 과연 보험영업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조 씨는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압니까”라며 받아쳤다.

 

● 34세에 되살아난 선생님의 꿈

이후 그의 하루 일과는 새벽 2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바쁘게 진행됐다. 새벽 신문 배달에 낮에는 보험 영업, 저녁 퇴근 이후엔 마트 출납원으로 일한 것이다. 주말엔 대형마트에 가서 알바를 했다. 하루 3시간 정도 자면서 억척스럽게 살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됐고, 그들을 통해 보험계약도 따냈다.

보험설계사가 된지 9개월 만에 그는 모범 사례로 사보에도 실렸다. 또 2004년 10월 경향신문에 ‘남한사회 적응 성공모델 되고파’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기도 했다.

그는 2007년 12월 보험설계사 일을 그만두었다. 그만둘 때 월수입도 800만 원 가까이 됐지만 집안 사정이 발목을 잡았다.

“남편은 정착을 잘 하지 못했어요. 어디에 취직해도 한 달을 버티지 못하다가 급기야 장사를 한다고 중국에 나가 반년씩 있다가 들어왔어요. 참다 못 해 2006년에 이혼했는데, 그러고 보니 작은 동네에서 살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는 다른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다가 골프장 캐디라는 직업이 수입이 좋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관련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수도권 골프장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30세가 넘으면 신입으로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2008년 4월 강원도 고성의 한 골프장에 입사해 2014년 1월까지 근무했다. 캐디 생활은 골프라는 스포츠 종목에 대한 전문지식과 캐디 업무에 대한 전문성 이외에도 건강한 체력을 갖춰야만 가능하다. 그는 그런 캐디 생활을 6년이나 버텨냈다. 그리고 2010년 속초에 24평 아파트를 샀다. 10년 만에 자기 집을 마련하겠다는 꿈을 7년 만에 이룬 것이었다.

캐디로 일하던 중 그는 동료 캐디가 한국방송통신대를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말을 듣자 북한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선생님이 되려던 꿈이 다시 떠올랐다. “사람은 늘 배워야 한다”던 외할머니의 말씀도 생각났다. 가난 때문에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하고 싶어졌다.

1년의 준비 끝에 그는 2009년 방송대 청소년교육과에 입학했다. 필드에서 하루종일 뜨거운 땡볕과 눈비를 맞으며 뛰어다니다 보면 몸은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대학 공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한 번의 휴학없이 4년 만에 방송대 교육학사와 ‘청소년지도사 2급’ 국가자격증을 따냈다. 방송대 학부 동기들과 ‘인문학 동아리’를 만들고, 다양한 인문서적을 읽으며, 지나온 삶의 성찰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삶에 눈을 뜨기도 했다.

“책을 읽고 일주일에 한번씩 토론하다 보니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어요. 한국에 와서 돈만 보고 살았던 삶이 최선이었나, 인생에 가치있는 일은 무엇인가, 얼마나 가져야 부자라 할 수 있고, 또 부자가 되면 내가 행복할까 이런 고민이 시작됐어요.”

교육학사 학위를 받을 때의 성취감은 지금까지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 뿌듯했다. 제대로 효도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외할머니에게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후 공부가 너무 재밌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공부할 때 가장 행복했으니, 그 행복을 계속 누리고 싶었습니다.”

2021년 한 학회에 참가해 발표를 진행하고 있는 조 씨.

● 6년 만에 석사, 박사 끝내

그는 대학을 졸업할 때 탈북청소년의 학교생활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 그런데 논문을 쓰면서 보니 북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북한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오지의 광산마을에 갇혀 있었다 보니 다른 곳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청춘의 한이 서린 북한이 어떤 곳인지 학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학사를 마치고 석사과정에 도전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서 알아본 끝에 2014년 3월 이화여대 북한학 석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었다. 전업학생으로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었던 바람도 성사됐다. 미국의 조지소로스가 설립한 ‘열린사회재단’의 공동체리더십장학금 3기 장학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2016년 8월 석사를 졸업한 뒤에는 남북한 교육통합에 비전을 두고 교육학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박사과정에서는 각종 장학금과 학자금 대출로 버텼다. 그렇게 6년 만에 석사와 박사 과정의 정주행 끝에 그는 2020년 8월 마침내 교육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의 졸업논문은 ‘북한 중등교사들의 교직경험에 대한 질적 연구’였다. 북한에서 교사가 되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북한 교사들의 교직 경험을 분석하여 박사가 된 것이다.

어렵게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는 했지만, 그가 졸업한 시기는 코로나19로 인해 최악의 취직 환경이었다. 남북관계가 단절돼 북한을 연구하는 전공자들이 설 땅도 좁아지고 있었다.

그는 남북한을 경험한 탈북민 연구자들이 설 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보자!” ‘맨땅에 헤딩’하는 마음으로 버텨왔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2020년 10월 탈북민 연구자들의 학술연구공동체인 “이음연구소”를 창립했다.

2019년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온 아들과 함께. 북한 감옥에서 얼어죽을 뻔했던 아들은 한국에 와서 군면제 혜택을 스스로 포기하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 “통일 한반도의 교육부 장관이 되렵니다.”

2023년 12월 통일연구원은 조 씨를 부연구위원으로 채용했다. 통일연구원은 1991년에 통일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으로 설립된 이후, 1999년 1월 국무총리 산하 국책연구기관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북한을 연구한다는 목표가 무색하게 지난 30년 동안 탈북민을 공식 연구위원으로 채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기조가 바뀌었고, 탈북민 박사 중 우수한 사람을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수십 명의 탈북민 연구자 중 조 씨가 처음으로 뽑혔다. 현재 그의 직함은 인권연구실 부연구위원이다.

“저는 공부하고, 글을 쓰고, 연구하는 것이 너무 즐겁습니다. 일단 연구원에 채용되었으니 최선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열심히 살려 합니다. 제가 잘해야 후배들에게도 길이 열릴 거라 생각하니 어깨가 무겁기도 합니다.”

앞으로 그가 꿈꾸는 미래 희망은 훨씬 더 크다. “통일이 된다면 북한의 교육과정을 다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교육과정 개발이 가장 중요해질 겁니다. 교육학 박사로써 그 과정에 꼭 참가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단순한 학자를 넘어 통일한국의 교육부 장관이 돼 그 과정을 주도하고 싶습니다.”

소신을 갖고 당당하게 사는 삶은 그가 7살 때 한국에 데리고 온 아들에게도 유전됐다. 아들은 입국과 동시에 군 면제혜택을 받았지만, 군에 입대할 나이가 되자 한국 사회에서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고 싶다며 특전사를 지원했다. 면제 혜택을 받았는데 굳이 꼭 가야 되겠냐고 의아해하는 병무청에 직접 찾아가 설득한 끝에 입대 허가를 받아냈다. 체력이 부족해 특전사에 가진 못했지만, 해병대에 자원하여 군 생활을 잘 해내고 전역했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직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조 씨가 34세라는 늦은 나이에 방송대에 입학할 당시 그 나이에 공부해 어디에 써먹을거냐며 핀잔을 주고 만류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45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우려하던 사람들의 시선을 감탄으로 바꾸었다.

49세인 지금 그는 자신이 원했던 통일과 남북 교육통합을 위한 학자의 길에 들어섰다. 20년 전 그는 일간지에 ‘남한사회 적응 성공모델 되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돌아보면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실천해왔다.

“꿈을 이루려면 행동하라.” 이는 그의 좌우명이다. 조현정은 20년 뒤에 만나도 여전히 누군가의 본보기로 살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