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부릅니다. 책 읽기 좋은 날씨 덕분이죠. 최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 분위기는 더욱 달궈진 모양새입니다. 비록 ‘한강 작가’와 관련한 열풍일 뿐 전체 출판계까지는 아니다라는 시각도 있지만 워낙 ‘독서하지 않는 한국’이었기에 이마저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한 가지 바람을 얹어본다면 여행도서도 많은 관심을 받았으면 합니다. 여행 유튜브가 인기를 누리면서 지상파는 물론 OTT까지도 여행 영상을 바탕으로 한 프로그램이 넘쳐납니다. 물론 아름다운 자연이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여행영상은 눈을 떼지 못할 만큼 흥미롭습니다. 다만 여행책도 그만의 매력이 있습니다. 오히려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어 꼭 볼만 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여책저책은 여행의 구미를 당길 여행 에세이 두 책을 소개합니다. 여행이 직업인 16년차 여행기자의 ‘조용한 여행’과 77세의 나이로 인도에 배낭여행을 떠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여행하는데 있어 천편일률이란 없다. 각자의 개성에 맞게 떠나면 그게 바로 여행이다. 다만 유행 내지는 흐름으로 묶어볼 수는 있다. 다음 질문들을 잘 헤아려 보자.
- 여행지에 책 한 권은 꼭 챙겨 간다.
- 도시의 활기참보다 자연의 고요함이 좋다.
- 여러 곳에 짧게 들르기보다 한곳에 오래 머물기를 좋아한다.
- 좋은 게 넘치는 기쁨보다 나쁜 게 적은 편안함을 선호한다.
- 경유 비행의 번거로움을 감수하더라도 인적 드문 곳으로 떠나고 싶다.
- 때론 카페 하나를 목적지로 삼고 떠난다.
- 여행의 순간을 SNS 에 실시간으로 남기기보다 종이 위에 글로 쓰기를 좋아한다.
어떤가. 이 7개의 질문 중 동의하는 의견이 많다면 당신은 ‘조용한 여행’ 주의자다. 이 책의 저자가 딱 그렇다. 16년째 전국은 물론 세계를 누비고 있는 16년차 여행기자 최승표가 ‘조용한 여행’이란 책을 냈다.
그가 말하는 ‘조용한 여행’이란 정적인 풍경, 차분한 분위기만을 말하지 않는다. 달리기, 스키, 스쿠버다이빙 같은 격정적인 운동이나 익스트림 레저를 하는 가운데에도 ‘조용한 여행’은 깃들어 있다. 이를테면 경북 문경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마주한 공중의 적막, 오직 삭삭, 슝슝 눈을 헤치고 나가는 소리만 작게 메아리쳤던 일본 니가타현의 야간 스키장. 뿐만 아니다. 조용한 여행은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 중계하는 대신 속으로 곱씹거나 가만히 묵히는 태도 또한 포함한다.
여행 중 만나는 최기자의 모습은 실제 책 속에 잘 녹아 있다. 저자는 출장지에서 누구보다 일찍 아침을 맞는다. 두 발과 흐르는 땀방울로 현지의 아침을 느끼기 위해서다. 달리기 얘기는 ‘책 3장’에 실렸다. ‘시속 10 킬로미터, 풍경을 눈에 담기 좋은 속도’라는 제목으로 담은 글에서는 달리기를 하면 달리 보이는 풍경을 묘사한다. 층간소음으로 괴로움을 겪던 시절 위로가 된 남산 달리기, 매년 벚꽃철에 열리는 경주 벚꽃 마라톤 참가기가 조용한 여행에 한 발 다가가게 한다.
이 얘기와 함께 ‘조용한 여행’은 6장으로 나뉜다. 1장 ‘수면제 없는 고요한 밤’에서는 귀가 예민한 여행자들에게 절실한 고요의 순간을 전한다. 마테호른을 바라보며 잠자리에 든 스위스 고산 호텔에서의 밤, 미국 데스밸리국립공원에서 올려다본 밤하늘 등이 여기 속한다. 2장 ‘비대해진 자아를 잠재우다’에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대자연의 순간이 담겼다. 혹등고래, 오로라, 유빙, 야생 코끼리를 만난 이야기를 전한다.
4장은 ‘좋은 게 많기보다 나쁜 게 적은’이란 제목이 달렸다. 베트남 달랏과 사빠 등의 여행기를 수록해 취향에 딱 맞는 여행이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야기한다. 5장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저자 특유의 캐릭터가 생생히 보여진다. 서핑, 스노클링, 스쿠버다이빙으로 만나는 바다 속 세계를 ‘서핑하는 할아버지가 되는 꿈’이란 제목으로 풀어냈다. 6장 ‘일상에서 멀지 않은 행복’은 라이프스타일 여행을 다뤘다. ‘여행하는 나’와 ‘일상의 나’ 사이의 간극을 덴마크 코펜하겐, 프랑스 프로방스, 서울숲, 미국 요세미티국립공원 여행을 통해 돌아봤다.
이 씨 | 바른북스
‘여정의 끝자락에서’의 저자는 ‘이씨’가 아니라 ‘이 씨’다. 물론 이름도, 필명도 있는 그지만 그가 ‘이 씨’로 불리고자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스스로 글솜씨도 치열함도 적어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씨는 무리를, 이 씨는 개체를 뜻하는 만큼 후자를 선택해 저자명을 등록했다.
유별나다할 만큼 이름에 대한 뒷얘기는 사실 더 있다. 저자는 강원도 외진 산골, 빈집 문간방 하나를 얻어 2년 넘게 살았다. 그는 처음 만나는 동네 분들에게 이 씨라고 인사를 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를 이씨라 여기기 시작하면서 다소 서먹했던 거리가 좁혀지고, 오래전부터 같이 살던 사람들처럼 스스럼없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이씨 속에서 이 씨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쉽고 편안함이 삶의 전부가 아닐뿐더러, 무리에 매몰되면 개체의 존재가 무의미해지기도 했다. 조화를 이루는 것은 주체가 무엇이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름은커녕 그 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민망하게 느껴졌다는 저자는 글쓰기만은 이어가겠다고 결심했다. 그게 이 씨로 사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인생 여정을 보내며 매듭을 맺은 결과물이다. 저자는 지난 8월 77세, 희수(喜壽)를 맞았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77세는 분명 많은 나이다. 그런 그가 의외의 선택을 해 탄생한 책이 ‘여정의 끝자락에서’다. 저자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떠난 인도 여행을 중심으로 그동안 다닌 배낭여행을 책으로 옮겼다. 6번이나 찾았던 인도는 그가 처음 배낭여행을 시작했던 곳이고, 여러 사연과 추억이 엉켜 있는 나라였기에 끝을 맺는 의식을 치르는 곳도 인도로 정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여행이란 무엇인지, 여행은 왜 하는지, 나름대로 정리한 생각을 독자들과 공유해 보려 시도했다. 여행자들은, 낯선 사람들과 만남, 다양한 문화 경험, 역사적 현장이나 유적지 순례, 익숙하지 않은 음식 체험 등을 통해 확장된 시야와 깊어진 사고, 다름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 폭을 넓힌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익숙한 곳에서 멀리 떨어진 외로움 속에서 자신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여기기도 한다.
저자는 여행을 떠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여행하는 동안 실수도 저지르고, 시행착오로 고생도 하고,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하지만 예기하지 못한 즐거운 일 역시 경험한다. 때로는 신비로운 광경에 넋을 잃기도 하고, 운명 같은 만남은 평생 이어지는 우정이나 사랑의 계기로도 남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떠난 곳에 두고 온 ‘나’의 일상을 바라보는 일, 그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여행이다.
어쩌면 그런 여행의 정의가 인도로 그를 발걸음하게 했는지 모른다. 자신을 정화하고, 쌓인 업을 하나씩 허무는 의식을 치르기에 인도만큼 적절한 장소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바라나시 가트에 앉아 화장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늘 같은 생각을 했다고 전한다. “어떻게 하면 잘 돌아갈 수 있을까.”
202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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