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11.29 13:40 | 수정 2019.11.29 14:20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 康弘) 전 일본 총리가 29일 오전 101세로 별세했다.
교도통신은 이날 일본 보수 정치계의 거두이자 일본 현대 정치사의 산 증인 나카소네 전 총리가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고인의 장남 나카소네 히로후미(中曽根 弘文)의 일흔 네번째 생일을 지낸 바로 다음날이었다.
1918년 5월 27일 군마(群馬)현에서 태어난 나카소네는 도쿄(東京)대를 졸업한 후 태평양 전쟁 때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정치계에는 종전 직후인 1947년 28세 때 중의원(衆議院) 선거에 당선되면서 입문했다.
이후 20회 연속으로 중의원에서 의원직을 유지했다. 1959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입각했고, 이를 기점으로 1982년에는 첫 총리직에 올랐다. 이후 5년 반(1806일) 동안 총리로 집권하면서 ‘국철·담배·전력 민영화’를 주도했다. 누적된 적자로 국가재정에 압박을 주던 국영 기업들을 과감하게 몰아세우는 그의 막강한 권력에 일본 언론이 붙여준 별명은 ‘대통령급 수상(大統領的首相)’.
그가 총리직을 맡았던 시기는 일본 거품 경제가 절정에 달해 긴자가 불야성을 이루고 ‘메이드 인 재팬’ 공산품이 전 세계시장을 호령했던 때다. 지금 아베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처럼 나카소네는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돈독한 친분을 쌓았다. 일본에서는 두 사람 이름을 따 ‘론야스 밀월(蜜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덕에 일본은 대일 무역적자 문제로 ‘일본 때리기’를 고심하던 미국의 복수를 피해갈 수 있었다.
교도통신은 이날 일본 보수 정치계의 거두이자 일본 현대 정치사의 산 증인 나카소네 전 총리가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고인의 장남 나카소네 히로후미(中曽根 弘文)의 일흔 네번째 생일을 지낸 바로 다음날이었다.
1918년 5월 27일 군마(群馬)현에서 태어난 나카소네는 도쿄(東京)대를 졸업한 후 태평양 전쟁 때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정치계에는 종전 직후인 1947년 28세 때 중의원(衆議院) 선거에 당선되면서 입문했다.
이후 20회 연속으로 중의원에서 의원직을 유지했다. 1959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입각했고, 이를 기점으로 1982년에는 첫 총리직에 올랐다. 이후 5년 반(1806일) 동안 총리로 집권하면서 ‘국철·담배·전력 민영화’를 주도했다. 누적된 적자로 국가재정에 압박을 주던 국영 기업들을 과감하게 몰아세우는 그의 막강한 권력에 일본 언론이 붙여준 별명은 ‘대통령급 수상(大統領的首相)’.
그가 총리직을 맡았던 시기는 일본 거품 경제가 절정에 달해 긴자가 불야성을 이루고 ‘메이드 인 재팬’ 공산품이 전 세계시장을 호령했던 때다. 지금 아베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처럼 나카소네는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돈독한 친분을 쌓았다. 일본에서는 두 사람 이름을 따 ‘론야스 밀월(蜜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덕에 일본은 대일 무역적자 문제로 ‘일본 때리기’를 고심하던 미국의 복수를 피해갈 수 있었다.
대표적인 지한파이자 일본 정계 최고의 한국통이었던 만큼 가까운 한국 정치인들도 많았다. 박태준 포항제철 초대사장, 김종필 전 총리와 막역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가까웠다. 1981년 신군부가 '김대중 사형 판결'을 내렸을 때 나카소네는 감형 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냉전시대인 1983년 일본 총리 최초로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40억달러 경협 차관을 제공한 것도 나카소네가 주도한 일이었다. 그는 차관 제공을 반대하는 세력에 "한국이 번영해야 북한이 남침해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나카소네가 전두환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 후 술자리에서 한국 가요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한국말로 열창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이후 인터뷰에서 이 일에 대해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며 두고두고 회고했다.
그는 퇴임 후에도 85세까지 현역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2003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가 ‘비례대표 후보자 73세 정년’을 도입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은퇴했다. 정계 은퇴 후에도 나카소네는 일본 총리들의 멘토 역할을 자임했다. 공익재단법인 ‘세계평화연구소’와 초당파 국회의원 모임 ‘신헌법제정의원동맹’ 회장을 맡으며 안보와 헌법 개정 문제 같은 현안에 대해 활발하게 발언했다.
그는 지난 2015년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 "한국과 중국이 제기하는 역사 문제에 진중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며 "과거에 대해 솔직하게 반성하고, 행동은 엄격하게 삼가야 하며, 민족이 입은 상처는 3세대 100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글을 기고했다.
생전에 요미우리 신문과 서면 인터뷰에서 나카소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역사 인식에 대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판단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식 민지배에 대한 사죄를 구했던) 무라야마 담화를 따라 성의 있는 표현을 시대의 흐름 속에 담아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의 장남 히로후미는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2008년 아소 다로 자민당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낸 명망 높은 정치인이다. 그의 손자 나카소네 야스타카(中曽根 康隆) 역시 2017년 중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중의원에 입성했다.
그는 냉전시대인 1983년 일본 총리 최초로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40억달러 경협 차관을 제공한 것도 나카소네가 주도한 일이었다. 그는 차관 제공을 반대하는 세력에 "한국이 번영해야 북한이 남침해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나카소네가 전두환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 후 술자리에서 한국 가요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한국말로 열창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이후 인터뷰에서 이 일에 대해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며 두고두고 회고했다.
그는 퇴임 후에도 85세까지 현역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2003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가 ‘비례대표 후보자 73세 정년’을 도입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은퇴했다. 정계 은퇴 후에도 나카소네는 일본 총리들의 멘토 역할을 자임했다. 공익재단법인 ‘세계평화연구소’와 초당파 국회의원 모임 ‘신헌법제정의원동맹’ 회장을 맡으며 안보와 헌법 개정 문제 같은 현안에 대해 활발하게 발언했다.
그는 지난 2015년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 "한국과 중국이 제기하는 역사 문제에 진중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며 "과거에 대해 솔직하게 반성하고, 행동은 엄격하게 삼가야 하며, 민족이 입은 상처는 3세대 100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글을 기고했다.
생전에 요미우리 신문과 서면 인터뷰에서 나카소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역사 인식에 대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판단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식
그의 장남 히로후미는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2008년 아소 다로 자민당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낸 명망 높은 정치인이다. 그의 손자 나카소네 야스타카(中曽根 康隆) 역시 2017년 중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중의원에 입성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29/20191129018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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