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조선의 마지막 유배지' 제주도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은 광해군 15년인 1623년의 일이었습니다. 반정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은 광해군은 사다리를 타고 궁 담장을 넘어 내시의 등에 업힌 뒤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달아나 상주로 변장하곤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은 아닌가?”(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의 기록) 북인의 영수이자 광해군대의 실세였으나 집권 후반기에는 서로 각을 세우는 관계였던 이이첨이 자신에게 칼을 겨눈 것으로 의심할 정도로 광해군의 현실적인 상황 판단력은 매우 낮았습니다. 밀고로 인해 발각된 광해군은 반정군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나왔다고 합니다.
폐위와 함께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광해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됐습니다. 계축옥사 이후 지금의 덕수궁인 서궁에 강제 유폐됐던 광해군의 계모 인목대비는 마침내 복권되자마자 “그(광해군) 부자를 씹어먹어도 시원찮다”며 죽여버리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교적 명분을 최우선시했던 인조반정의 주역들은 “폭군을 내치는 일은 있어도 주륙(誅戮)하는 일은 없다”며 반대했습니다. 몇몇 신하들은 경기 수사 신경진에게 ‘잘 처리하라’는 쪽지를 보냈는데 이것은 광해군을 몰래 죽이라는 뜻이었지만 신경진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정권에서 밀려난 북인 세력의 인조에 대한 역(逆)쿠데타 기도는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국제적인 여론은 인조에 대해 비우호적이었습니다. ‘왜군 3000명을 동원해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헛소문이 날 정도였고, 명나라의 책봉은 2년 가까이 미뤄졌습니다.
아마도 윤리 의식 수준은 높았지만 정보력은 많이 부족했던 듯한 명나라 등주자사는, 배를 타고 산동에 도착한 조선 사신단을 향해 “제 임금을 시해한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새로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과 이를 계승한 청나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의 명분에는 ‘광해군을 위한 복수’였고 1636~1637년 병자호란 무렵에는 광해군을 핑계로 조선 내정에 대해 간섭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쫓겨난 지 14년이 지나 병자호란이 벌어지고 있던 1637년까지도 광해군은 강화도에서 멀쩡히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청군이 철수한 직후 조정은 광해군을 강화도에 그냥 둬선 안된다고 여기게 됩니다. 유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이죠. 이 대목에서, ‘인조실록’은 이미 쫓겨난 임금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니 일종의 사찬(私撰) 역사서를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호송하는 사람에게 엄중히 분부해 그 가는 곳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배 위의 4면은 모두 휘장으로 막았다가 배가 닿은 뒤에야 비로소 알렸다.>
<뱃길이 험난하여 거의 죽을 뻔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배가 멈춘 뒤 휘장을 떼고 내리기를 청하여…>
1637년 6월 16일, 배에서 내린 광해군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멀리 정상이 구름에 가린 높은 산이 보이는 가운데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색 현무암으로 쌓은 주변의 돌담들이었을 것입니다. 광해군은 물었겠죠.
“여기가 어디냐?”
“제주도입니다.”
“뭐, 뭐라고!”
<광해가 깜짝 놀라고 크게 슬퍼해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아하이도차·我何以到此),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하며 안정을 찾지 못했다.>
이것은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국제공항에 내릴 때 창밖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야~ 제주도 왔다!’며 기뻐하는 21세기의 정서와는 매우 다른 관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의 한 선배 기자는 ‘추자도에 가 보니 산 위에서 멀리 한라산이 보였다’며 ‘거길 가고 나서야 왜 제주도가 조선시대 가장 열악한 유배지였는지 알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남쪽 진도나 강진, 완도에서 배를 타고 또 남쪽으로 내려가면 추자도가 나오고, 거기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제주도인 것입니다. 수도 한양에서 가장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이 바로 ‘멀고 나쁜 섬’인 원악도(遠惡島), 당시만 해도 문명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던 제주도였습니다. 최근 제가 추자도에 가서 돈대산 정상에 올라 보니 과연 머나먼 곳에 한라산이 보여 그게 무슨 개념인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광해군이 닿은 제주도 해안은 과연 어디였을까요. 며칠 전 제주올레길 20코스를 걷다 제주시 구좌읍 행원포구를 지나다 보니 올레길 중간 스탬프를 찍는 곳이 보였습니다. 근처 숱한 풍력발전소가 바람개비처럼 돌아가고 있던 그곳에 비석 하나가 있었습니다. ‘광해군 기착비’였습니다. 기착(寄着)이란 ‘목적지로 가는 도중 어떤 곳에 잠깐 들름’이란 의미니, 최종 목적지인 제주목 관아 근처 유배지로 가기 전 제주도 해안에 상륙한 지점이란 뜻이 됩니다. 분위기 좋은 해변 카페들이 즐비한 바닷가에 덩그러니 세워진 그 비석을 보고 자못 착잡한 심정이었습니다.
제주도로 유배를 갔던 조선의 숱한 거물들, 그러니까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같은 쟁쟁한 인물들 중에서도 ‘VVIP’는 바로 광해군이었던 것입니다.
‘연려실기술’은 당시의 상황을 좀더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원포구에 내려 어쩔 줄 몰라하던 광해군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습니다. 호송 임무를 맡고 그를 마중 나온 제주목사 이확이었습니다. 이확은 당황하고 슬퍼하는 광해군의 가슴에 제대로 못을 박습니다.
<제주목사가 문안하며 무릎을 꿇고 나아가 말했다. “공자께서 임금으로 계실 때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물리쳐 멀리하고, 환관과 궁첩들로 하여금 조정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게 했더라면 어찌 이런 곳에 오셨겠습니까? ‘덕을 닦지 않으면 배 안에 탄 사람이 모두 적국(敵國)’이라는 옛말을 모르십니까?>
이 인용구는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출처는 ‘사기(史記)’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입니다. 병가(兵家)에 해당하는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와 그의 손자인 손빈, 그리고 전국시대의 병법가 오기(吳起·?~기원전 381)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본래 위(魏)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인 증자 문하에서 공부했던 오기는 재승박덕이라는 평을 듣는 가운데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명성을 떨쳤는데,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의 말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筆生則死)’도 원래 오기가 썼다는 ‘오자병법’에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손자오기열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위나라 군주인 무후(武候)가 오기와 함께 강에서 배를 타고 있었는데 경치가 매우 좋은 것을 보고 “강산이 이렇게 험준해 아름다우니 우리 위나라의 보배로다”라며 감탄했습니다. 그냥 맞장구를 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말에 오기는 굳이 오기 있는 딴지를 걸었습니다. “나라의 보배는 군주의 덕에 있는 것이지 강산의 험준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 삼묘씨에서 하나라 걸왕, 은나라 주왕에 이르는 ‘험준한 절경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군주의 실책으로 망한 나라들’의 예를 든 뒤 이렇게 말합니다.
若君不修德, 舟中之人盡爲敵國也.
약군불수덕, 주중지인진위적국야.
(만약 군주가 덕을 닦지 않는다면, 배 안에 함께 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적국의 편이 될 것입니다.)
덕을 닦아 올바른 정치를 펴지 않는다면 자기 편이었던 사람들도 등을 돌리고 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경고였습니다.
광해군 역시 ‘사기’의 이 대목을 읽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제주 목사로부터 이 인용을 들은 광해군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淚속(竹아래束옆에欠)속下不能語.
누속속하불능어.
(눈물이 펑펑 흘러내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후 광해군은 세상을 달관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귀양지에 따라간 궁녀 중에 유독 성질이 모질고 제대로 수발을 들지 않는 여자를 보고 광해군이 꾸짖었는데, 궁녀는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영감이 사직을 받들지 못해 나라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해 놓고, 이 섬에 들어와선 도리어 내게 모시지 않는다고 책망하니 속으로 부끄럽지 않소? 영감이 왕위를 잃은 것은 스스로 취한 것이지만 우리는 무슨 죄로 이 가시덩굴 속에 갇혀 있단 말이오?”
광해군은 고개를 숙이고 한 마디 말도 없이 탄식할 뿐이었다고 ‘연려실기술’은 기록합니다. 다만 주변 사람들을 모두 분개하게 만든 그 무례한 궁녀는 다른 일로 인해 좋지 않게 죽었다고 합니다.
제주연안여객터미널에서 제주국제공항까지 카카오T 택시를 타고 가던 도중, 지도에서 돌연 ‘광해군적소터’라는 지명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광해군의 유배지인 ‘적소(謫所)터’는 제주시 한복판, 현재 제주시 중앙로 제민신협 본점 자리로 추정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지금 비석 하나가 설치돼 있습니다. 1653년 네덜란드 선원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한 뒤 수용됐던 곳도 바로 그 자리라는 얘깁니다.
광해군이 제주 생활을 한 지 3년이 지난 1640년, 새로 제주목사에 부임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시방이었습니다. 그는 인조반정의 주역 중 한 명인 이귀의 아들로서 반정 당시 그 역시 참여해 공을 세운 바 있었던 인물입니다. 정사공신 2등에 봉해져 전라도 관찰사에까지 올랐으나, 병자호란 때 근왕병 투입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죄를 얻어 유배됐다가 사면된 뒤 예전 관직보다 낮은 등급인데다 열악한 부임지라 할 수 있는 제주목사로 근무하게 됐던 것입니다. 여기서 광해군과 맞닥뜨렸으니 참으로 외나무다리 같은 형국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제주목사가 바뀐 사실을 ‘밥상의 변화’를 통해서 인지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연려실기술’의 기록입니다.
<(이시방이) 고을 사람을 단속해 밥상을 깨끗이 해 올렸더니, 광해가 대접이 전과 다른 것을 기뻐해 말했다. “이는 반드시 지난날 내게 은혜를 입은 자일 것이다” 그러자 늙은 궁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네가 어떻게 아느냐?” “대감이 전일에 신하들을 등용하고 내치는 데 한결같이 후궁의 비방과 칭찬을 따랐습니다. 이 목사가 만약 일찍이 부정한 길을 통해 은혜를 받았던 자라면 반드시 옛 임금을 박대해 지난 제 행적을 덮으려 할 것인데, 어찌 감히 정성을 다하기가 이같을 수 있겠습니까.” 광해가 뒤에 (신임 제주목사가) 이시방이라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숙여 눈물을 흘렸다.>
잠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행원포구의 광해군기착비 뒷부분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달리 성실하고 과단성 있는 정사를 펼쳤으나 당쟁의 와중에 희생된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쟁에 희생됐다고요? 자신이 당쟁을 이용해 북인 세력을 안고 전횡을 펼치다 쫓겨난 것은 아니고요?
1990년대 이후 학계에서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습니다. 알고보면 명나라와 청나라(후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친 현군(賢君)인데 명분론에 빠진 반정 세력에게 밀려났다는 것이죠. 노무현 정부에 와서 광해군은 미·중 사이의 균형 외교를 강조하던 정책의 롤모델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구체적으론 ‘명나라(미국)를 빨리 손절하고 명·청(미·중)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는 것이 바람직했다(=친중 국가로 변신해야 한다)’는 속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짜 광해군(이병헌)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친다는 2012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 이어, 최근에 나온 영화 ‘노량’은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 나온 마지막 장면에서 마치 광해군이 이순신의 유지를 받든 군주인 것처럼 묘사되는 해괴한 설정까지 보였습니다(유성룡·이항복·이덕형을 다 내친 북인 정권이 무슨 이순신을 계승했다고…).
일단 외교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광해군과 그의 조정은 인조반정 당시 불과 1000명 남짓한 훈련 받지 못한 병력에 의해 무너질 정도로 어설픈 시스템 위에 있던 정권이었습니다(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내정을 보면, 궁궐 복구와 신축 등 무리한 토목 공사로 임진왜란 직후의 국가 재정을 파탄냈으며, 위 ‘연려실기술’의 기록에서 보듯 매관매직을 자행해 백성에 대한 수탈을 유도했습니다. 계축옥사는 도덕성의 타락도 문제지만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대숙청극이 정치적 참사로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북인 중에서도 대북 세력만 껴안고 나머지 정치 세력은 모두 내치는 이해 못할 정치적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4년 전, 광해군 때의 정치사를 다룬 연구서 ‘모후의 반역’을 낸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를 인터뷰했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광해군은 도대체 어떤 군주였다고 봐야 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계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자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던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안위(安危)와 보신(保身)에 병적으로 집착했습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이중 외교를 펼친 것도, 자세히 보면 누구에게도 잡혀가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대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봐야 합니다.”
광해군이 제주에서 세상을 떠난 것은 이시방이 제주목사로 온 이듬해인 1641년의 일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제주로 온 지 4년 뒤의 일이었고,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지 18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만 66세였습니다(66년 2개월). 조선의 임금 27명 중에서 영조(81세), 태조(72세), 고종(66년 3개월)에 이어 네 번째로 장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쫓겨난 광해군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주도에 도착해 제주도라는 것을 알고 불안 증세를 보인 뒤, 마중 나온 제주목사에게서 손자오기열전을 인용하는 말을 듣고 난 뒤의 반응입니다. 행원포구는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25㎞ 떨어진 곳입니다. 일부러 여기로 상륙했을 리가 없습니다. 기록에도 나왔듯이 풍랑을 만나 고생했고, 이로 인해 예상치 못한 곳에 표착한 것이죠. 광해군이 그곳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은 제주목사가 그곳까지 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불안 증세’ 정도에 머물러 있던 광해군은 ‘군주가 덕을 닦지 않으면 배 안의 사람들이 적이 된다’는 제주목사의 말을 듣고서 비로소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광해군은 분명 이 순간에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참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덕을 닦지 못한 군주여서 이런 일을 겪는구나’라는 깨달음 말입니다. 그 이후엔 면박을 당할 때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탄식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참회의 순간은, 더 이상은 멀리 갈 곳이 없는 최후의 장소까지 다다른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2025.01.24. 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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