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갈이라고 들어봤나요? 아니면 Carl Ferris Miller는 아시나요?
민 원장이 생전에 수목원 내 숙소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지난 2001년 새천년 첫 식목일을 맞이하여 지난 세기에 이룩한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인 국토녹화 사업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을 기리기 위해 광릉 국립 수목원에 숲의 명예전당을 건립했다. 녹화를 국가 정책사업으로 추진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현사시나무를 만든 세계적인 임목육종학자 현신규 박사, 평생 종자채집 등 나무와 함께 살아온 나무 할아버지 김이만옹, 전남 장성에 500㏊가 넘는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조성한 독림가 임종국씨에 이어 천리포수목원을 세계적 수목원으로 키운 민병갈(본래 이름 Carl Ferris Miller, 79년 한국인으로 귀화) 전 원장 등을 모셨다.
먼저 칼 페리스 밀러, 즉 민병갈 원장부터 살펴보자.
생전에 활짝 웃음을 보이고 있다.
민병갈 전 원장(1921~2002)=미국인으로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로 독신으로 지내면서 한국의 산림녹화와 수목원 조성에 평생을 바친 감동적인 외국인이다. 민 전 원장은 살아생전 본인 스스로 “난 한국의 수목과 결혼했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의 수목 조성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가꾼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충남 태안에 가꾼 62만㎡(약 18만여 평) 천리포 수목원은 2000년 아시아 최초, 세계 12번째로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 받았다.
민 원장이 생전에 수목원 한가운데서 망중한을 즐기는 모습.
민 원장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건 순전히 우리의 아픈 역사 때문이다. 그는 버크넬 대학과 콜로라도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 해군 중위로 군에 복무했다. 마침 세계 2차 대전 중이었고, 그도 외국으로 파견 나가야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는 한국에 왔다. 해방 후 미 군정청이 지배할 때인 1945년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때 미군장교로 한국으로 온 것이다. 먹고 살 거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 한국의 무슨 매력에 끌렸는지 ‘한국이 좋다’며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게 한국과 결혼까지 한 첫 사연이다.
뒤쪽에 있는 사람이 20여년간 민병갈 원장으로 모셨던 정문연 부장.
그는 짝사랑한 한국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RAS(Royal Asiatic Society, 왕립 아세아학회) 한국지부에 가입했다. 이 기관은 영리목적 없이 한국의 예술, 관습, 역사, 문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미국, 영국, 독일 3개국이 합작해서 설립한 조직이다. 타계할 때까지 이 단체에 속해 있었다. 한국의 경제 재건위원회에도 많은 조언과 자문을 아끼지 않았다. 49~51년까지 원조 협조처, 52~53년엔 유엔 군사 원조단, 53~82년까지는 한국은행 고문으로 활동했다. 미국에서 대학 다닐 때 그의 전공은 경제학 이었다.
싱싱한 신록을 뽐내고 있는 천리포 수목원의 수목들.
그는 많은 활동을 하던 중 한국 자생식물과 가옥에 특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RAS에서 활동하다 일주일에 한번씩 전국의 산과 사찰을 방문했다. 김이만 할아버지와 조무연 옹과도 인연을 맺은 것도 한국의 자생식물에 관심을 보이고 수집할 때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들이 천리포 수목원을 가득 채운다.
1962년 사재를 털어 충남 태안에 2㏊(2만㎡)를 사들이면서 식물원 조성의 서막을 알렸다. 한국은행 등에 고문으로 있으며, 서울에 올라올 땐 꼭 홍릉 수목원에 들러 종자 채집과정을 배우고 동시에 수목을 사들였다. 70년 서울에서 재개발로 해체된 한식 기와집을 천리포로 운송하여 전통한옥 기와집과 초가집을 보전하면서 본격 수목원 조성에 나섰다. 이후부터는 국내외에서 희귀종이나 국내 자생종은 빠지지 않고 수집했다. 특히 호랑가시나무와 목련, 단풍나무, 동백, 무궁화를 주요 5속으로 꼽아 관리했다. 그 중에서도 호랑가시나무와 목련을 가장 아꼈다.
천리포 수목원은 세계수목협회에서 아시아 첫번째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했다.
목련학회와 호랑가시나무학회도 천리포수목원에서 개최했고, 국제 수목학회에 참석해 종자교환과 양묘업자와 교류도 활발히 했다. 이렇게 모은 수목원에는 지금 세계 50여 개국에서 수집한 1만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목련류는 전 세계 500여종중 410여종을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에서 들여온 수종의 규모로 볼 때 국립임업시험연구원보다 많다. 세계 수목협회는 2000년 10월 천리포 수목원을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Arboretum distinguished for merit)’으로 지정했다. 아시아에서는 첫 번째이고, 세계에서는 열두 번째였다.
천리포 수목원의 아름다운 모습.
그는 사람 발길을 타면 나무가 시달린다고 해서 수목원을 일반에 공개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인 지난 2002년 돼서야 비로소 일반에 공개했다. 그가 특히 좋아하고 아낀 목련의 망울이 활짝 터지는 4월 초 천리포 수목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천리포 수목원 큰 저수지에 온갖 수목들이 만발해 자라고 있다.
민 원장을 20여 년간 곁에서 보필한 천리포 수목원 정문영 부장은 “민 전 원장이 살아계실 때와 수목원 분위기가 너무 달라 안타깝다”며 “과거엔 목표와 방향을 향해 분명하게 달려갔지만 지금은 희미한 실루엣같이 변해버린 느낌이다”고 안타까워했다.
숲의 명예 전당에 헌정된 민병갈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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