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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0호 경주 불국사 다보탑

오완선 2015. 3. 19. 10:45

공식명칭 : 경주 불국사 다보탑 (한자 명칭 : 慶州 佛國寺 多寶塔)
지정일 : 1962.12. 20
테마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탑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불국로 385, 불국사 (진현동)

문화재청 설명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그중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당하여,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만이 남아있다.

어느새 국보탐방이 20호에 이르렀다. 지난 17, 18, 19호 국보가 부석사 소재로 이어져 새삼 감탄하던 중 드디어 불국사로 넘어오니 이번에 소개할 국보 20호를 비롯하여 21, 22, 23, 24호까지가 불국사 소재 문화재들이며, 석굴암(25호)과 무열왕릉비(26호)를 거쳐 다시 27, 28호까지 6개의 국보가 불국사 품 안에 있다는 사실에 낮고 조용한 흥분이 인다. 그래 드디어 불국사다.


불국사(佛國寺)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사적(事蹟) 등 다른 기록을 보면 불국사는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는데 김대성에 이르러 크게 중창하였다거나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 부인의 발원에 의거 창건하였고 이후 여러 번의 중창을 거친 후 김대건에 이르러 가장 크게 수리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김대성에 이르러 불국사는 대웅전 25칸, 다보탑·석가탑·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오늘날에도 불국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내국인뿐 아니라 많은 외국인이 찾아오는 한국의 대표적 사찰이다. 사명(寺名)이 불국(佛國)임에야 더이상 절집에 대한 이야기를 보태는 것이 무의미하다 할 것이다.
향후 할 수만 있으면 한 사나흘 머무르면서 불국사 전체에 대한 세세한 답사기를 써보고 싶다.


다보탑(多寶塔)

▲다보탑이 새겨진 10원짜리 동전.

10원짜리를 주우면서 '다보탑,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고 노래한 시인이 있었다. 바로 이 다보탑이다.

석가여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칠보탑이 땅에서 솟아나와 큰소리로 석가의 말이 진리라고 하였다는데서 비롯된 다보탑(多寶塔). 우리 문화유산 답사꾼들이 이형탑(異形塔)의 대표로 손꼽는 아름다운 탑이다.

이 다보탑은 우리들의 탑에 대한 생각을 여지없이 무색하게 만드는 화려한 탑이다. 옆에 있는 석가탑은 3층 석탑이라고 하지만 다보탑은 몇 층 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위 문화재 설명도 층수를 헤아리기 어렵다고 씌어 있다. 그만큼 설명이 어렵도록 복잡하고 화려하며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통상 말하는 '2층 기단에 삼층석탑'이라는 신라 시대 석탑의 상식을 무참히 깨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보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방으로 계단을 놓은 기단과 그 위에 4개의 기둥으로 받친 네모꼴의 사각이 1층, 네모지붕 위에 얹힌 사각 난간 안에 팔각으로 돌려진 2층,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작은 난간을 돌린 원형이 3층이며 버선발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습들이 받치고 있는 개석 위에 상륜부가 있는 3층탑의 구조로 보인다. 그렇지만 굳이 다보탑을 3층탑이라고 할 것은 아니라고 보니 층수에 대하여는 그만하기로 한다.

▲다보탑 전경, 남쪽에서 찍은 모습이다.

다보탑의 기단은 높고 육중하게 세웠으며 사방으로 각 9층의 계단을 내고 계단마다 2개씩의 돌기둥을 세웠는데 실제 이 계단을 통하여 탑을 오르내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남원 실상사에 석등 앞 작은 계단은 보았으되 이처럼 탑의 몸돌에 오르는 정식 계단을 세운 것은 유일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사방으로 낸 계단이 안정적이며 마치 건축물을 연상케하는 구도가 된다.

▲다보탑의 기단 부분과 그 위에 세워진 우람한 돌기둥.

기단 위에는 평면적을 조금 줄인 모습으로 받침돌 위에 네 귀퉁이로 크고 묵직한 사각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사각의 지붕돌을 얹었는데 네 귀퉁이만 살짝 들어올렸을 뿐 평범한 네모지붕을 받치는 기둥 위 받침돌은 마치 목조건물의 결구 모습을 보는 듯하다. 즉, 석재를 목조건물처럼 깎고 다듬어 육중하지만 곡면으로 공굴려 모양을 낸 크고 작은 2단의 받침돌을 복잡하게 얹고 끼운 것이다. 그리고는 가운데에 목탑에 심초석을 세우듯 탑의 중심을 받치는 기둥을 하나 더 세웠다. 단단하고 야무지게 안정적인 모습이다. 필자는 이 부분을 다보탑의 1층이라고 보았다.

▲기단 위에 세워진 육중한 네모 기둥과 지붕돌 받침석의 우아한 모습.

1층의 네모지붕돌 위에는 다시 조금 작아진 모습의 네모 난간을 둘렀고 난간 안에는 지금까지의 사각형이 아닌 팔각의 구조를 쌓아 올렸는데 모서리마다 위 아래보다 중간이 좁고 가는 모습의 받침대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는 중심을 받치는 구조 위에 조금 넓어지는 모양의 8각 지붕돌을 올렸는데 이 8각 지붕돌은 다시 그 위에 있는 원형을 받치는 역할을 겸하는 듯하다.

팔각 위의 원형부분은 완전히 둥근 모습이라기보다는 8각을 뭉뚱그린 원형인 듯한데 각진 부분쯤에 대나무 마디 모양의 받침대를 세우고 중심석이 받치는 돌에는 둥글게 돌아가며 앙련을 새겼다. 이 8각진 부분이 2층, 원형부분을 3층으로 보았다.

▲사각형의 난간 안으로 8각형 구조를 얹었고, 그 위로는 다시 8각 난간을 두른 후에 원형을 얹은 모습이다.
▲사각과 팔각 난간의 근접 모습. 보수중 촬영.

16면에 2개씩의 앙련을 새긴 8각에 가까운 원형돌 위로는 다시 또 8각의 받침돌을 세우고 그 위로 버선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습의 받침석을 8개 세운 후 얇고 평편하지만 귀끝을 살짝 들어올린 8각의 옥개석을 얹어 마무리하였는데 8각 귀퉁이마다 풍탁(風鐸)을 달았던 듯 구멍이 뚫린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위로는 높아서 잘 안 보이지만 사진으로 볼 때에 노반과 복발, 앙화, 보류, 보개가 나름대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

▲다보탑의 8각, 원형 부분과 상륜부.

참 복잡다난하고 화려하게 아름다운 다보탑이다. 그저 층수를 셀 수 없고 구조나 모양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다고 뭉뚱그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답사기라고 본대로 느낀 대로 적어보았다. 높이가 10m가 넘어 위로 갈수록 자세히 관찰하기가 어렵고 이형탑이라는 특징으로 해석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양해를 구한다. 전문가의 상세한 설명이 어딘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다보탑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에 대대적인 해체, 수리하였으나 그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으며, 탑 내부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사리장엄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을 뿐 아니라, 탑 기단 위에 놓인 4마리의 돌사자 중 3마리도 이때 분실되었으며 지금은 아마도 그중 가장 못생겼을 한 마리만 남아있어 문화재를 답사할 때마다 쌓이는 일제에 대한 분노가 하나 더 늘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사자의 위치가 지금처럼 한변의 중앙이 아니라 사각형의 각진 모서리 부분이었다는 주장도 있어 흥미로운데 또 다른 주장은 사자는 다보탑을 세울 때 함께 만든 것이 아니라 추후 따로 조각하여 위치시킨 것이라는 말도 있으니 참고 바란다.

그 후 우리 손으로 1972년과 지난 2009년에 대규모 수리, 보수하였으며 지금은 그 옆에 있는 석가탑을 수리 보수중이다. 60년대에 석가탑 보수때 옥개석을 떨어뜨려 깨어진 것도 있다 하니 수리, 보수도 함부로 할 것은 아닌 듯하며, 완벽하게 보수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이처럼 다보탑을 일컬어 참 화려하고 아름다운 탑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내공이 쌓이고 답사에 이력이 더해지면, 그 곁에 서 있는 무뚝뚝해 보이는 석가탑(삼층석탑)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무어라 보탤 말이 없이 감탄하게 된다.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표준이 된 석가탑 이야기는 바로 다음 편에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