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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산문(實相山門) 지리산(知異山) 실상사(實相寺)

오완선 2015. 3. 19. 10:48

천불천탑?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이라니? 이를테면 그렇게 많은 불상과 불탑을 말하는 것이니, 전국 방방곡곡에 자리 잡은 대소사찰을 일컫는 의미로 생각한다. 물론 화순 운주사처럼 단일사찰에 석불과 석탑이 많아서 그 절을 말할 때 천불천탑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불상과 탑이 많은 절은 제법 손꼽히고 있으니 반드시 탑과 불상이 많은 절집을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크고 작은 절집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다.

전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노라면 내 신앙과 종교와 관계없이 거의 매번 사찰을 방문하게 되고 그 안에 위치한 많은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 지방문화재, 그리고 불교 관련된 건축, 조각, 회화, 공예 작품과 거기에 깃든 역사, 문화 등을 만나보고 전해 듣게 된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겨진 삼국시대 이래로 현재까지 대략 2천 년이 넘는데 불교가 이 땅에 전해진 것은 약 1,600여 년 전.

삼국시대에 불교가 공인되고 고려는 불교국가로 이어졌으니 조선 시대의 억불(抑佛)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문화와 역사 속에 녹아든 불교의 흔적과 자취는 상상이상일터, 불교문화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논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삼국시대 이전, 우리나라의 고대사 부분에 대한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들여다봐야겠지만 이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한다.

그래서 문화유산 답사를 꾸준히 다니는 입장에서 언젠가는 절집탐방 이야기를 쓰긴 써야 할 텐데 막상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이어 나갈지 늘 고민이었고 부담스러웠다. 비록 '종교의 자유'라는 현실 하에 살지만 자칫하면 종교에 대한 비난이나 비방, 또는 편협한 시각이라는 지적을 받거나 의견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어 더욱 조심스러웠다. 더구나 필자는 종교가 천주교인지라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아무리 미루고 남겨놓아도 불교문화에 대한 답사 이야기 없이 문화유산답사를 풀어갈 방법이 없고, 그러다 보니 절집을 다녀본 이야기를 어떤 형태로든 엮어보아야 할 당면한 입장이 되었으니 나름대로 최대한 치우침 없이 기록해보려 한다.

즉, 종교적인 입장에서 접근이 아니라 단순히 문화유산에 대한 답사, 불교문화의 이해를 전제로 한 접근, 그리고 객관적인 기술로 일관하려 하지만 사람이다 보니 때때로 나의 주관과 판단이 튀어나오더라도 넓은 혜량 있으시기를 기대하며 소위 천불천탑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답사한 전국의 절집탐방기를 시작하려는 바 그 시작의 매듭은 우선 구산선문 절집들 이야기부터 풀기로 한다.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기록된 사항 외에는 해당 사찰의 설명이나 안내문을 인용함.)


구산선문(九山禪門)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삼국시대에 들어와 왕조들로부터 공인되고 왕실로부터 귀족, 서민들의 신앙으로 그 범위를 넓혀가던 중 중국에 유학하여 선(禪)을 배운 다수의 유학승들이 일시에 귀국하면서 선종(禪宗)이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으며, 신라 후기에 이르러 불안했던 국내 정세 탓으로 급속히 전파되고 지방호족들의 후원을 받던 중 고려에 들어와서는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보다 안정되고 지방 세력과 왕족을 연결, 사회적 통합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명망 있는 선사들이 배출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유력한 산문들이 생겨나니 후대에 이를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부르게 된다.

▲한국화로 그린 실상사 전경,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만수천 옆 들판에 자리 잡은 평지사찰로 자그마한 느낌이다.

구산선문은 실상산문(실상사), 가지산문(보림사), 희양산문(봉암사), 동리산문(대안사), 봉림산문(봉림사), 성주산문(성주사), 사굴산문(굴산사), 사자산문(흥령선원), 수미산문(광조사) 등인데 이들은 선(禪) 사상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한 종파였다. 그러므로 고려 시대에 들어와 구산선문은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선종으로 자연스럽게 결집하여 갔으며 이후 선종과 교종의 통합운동과 단일 종단으로의 결집과정을 거쳐 오늘날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선종으로 자연스레 이어져 왔다.


실상산문(實相山門) 지리산(知異山) 실상사(實相寺)

천불천탑, 절집 답사이야기의 첫 순서는 구산선문중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문을 연 지리산 실상사이다. 지리산 북쪽 뱀사골 계곡을 따라 내려간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자리 잡은 실상사는 커다란 지리산 품에 안겨는 있지만 의외로 차분하게 평지 들판에 자리 잡은 아늑하고도 조촐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마조도일선사의 제자인 서당지장선사의 선맥을 이어받고 돌아와 구산선문 중 처음으로 실상선문을 열었고, 2대조 수철화상(秀撤和尙)이 법맥을 이어서 고려까지 선종의 근본 도량으로 자리 잡았던 실상사는 크고 웅장한 건물 수십여 동이 장관을 이루었으나 여말선초(麗末鮮初) 잦은 병화(兵禍)로 쇠퇴를 거듭하다 세조 말년에는 완전히 폐사(廢寺)되어 그 후 200년간 방치되었다.

▲다리를 건너기 전 왼쪽 장승, 건너서 왼쪽 장승과 오른쪽 장승, 모두 약 3m 남짓한 제법 큰 크기이다.

기간 중 백장암에 머물던 스님들은 숙종 5년(1679) 백장암마저 불이 나자 침허조사를 비롯한 300여 스님이 실상사의 재건을 조정에 상소하여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하고 사세(寺勢)를 회복하는 듯하였으나 고종 20년(1883) 유생들의 방화로 대적광전을 비롯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이듬해 월송 스님이 보광전을 다시 짓는 등 세 번째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국보 1점, 보물 11점 등 단일사찰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일설에는 지리산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 너머 일본의 후지 산과 일직선상으로 놓여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자리 잡고 앉아있다는 주장과 함께 보광전 내의 동종(銅鐘)에는 일본지도가 그려져 있고 타종 시 일본지역을 때림으로써 일본을 누르고 한국이 흥하게 한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일정강점기에는 주지 스님이 고초를 겪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오는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돌장승

실상사는 도로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매표소에서 표를 끊은 후에 걸어서 만수천을 건너 잠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이 만수천에 걸린 다리가 해탈교인데 다리 건너기 전 좌우와 다리 건넌 후 좌우에 모두 4개의 돌장승이 서 있었으나 건너기전 오른쪽 돌장승은 몇 해 전 큰물에 떠내려가고 나머지 3개의 돌장승이 남아 있다.

건너기 전 왼쪽 것은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라 씌어있고, 다리 건너 왼쪽은 '대장군(大將軍)', 마주 보고 있는 오른쪽은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인데 각각 옹정3년(1725년), 신해년(1731년)에 만들었다고 씌어있으니 영조 때에 세운 것이다.

절 입구에 토속신앙의 상징인 장승이 서 있는 것이 특이한데 불교에서 토속신앙을 받아들여 절 입구에 세운 것인지, 그와는 무관하게 주민들이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세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의 모습이며 무섭다기보다는 다소 우스꽝스럽고 친숙한 모습이다.

▲연꽃이 심어진 연못 뒤로 야트막한 절집 건물들이 보인다.

 

▲일주문 없이 만나는 첫 건물이자 진입문 격인 천왕문, 좌우로 얕은 담장이 이어져 아늑하며 바로 절 마당이 보인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주불전인 보광전이 보이고 그 앞마당에는 석등 하나와 좌우로 한 쌍의 삼층석탑이 서 있다.

장승을 지나 찻길과 인도로 구분된 길을 백여m 올라가면 자그마한 연지(蓮池)가 나오고 일주문 없이 바로 천왕문 옆으로 야트막한 담장을 둘러친 아늑한 절집이 나온다. 천왕문 사이로 절 마당이 직선으로 바라보이는 개방형 구조로 우람한 건물이나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누각이 없이 평범한 모습이다.


삼층석탑 (보물 제37호)

실상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말 실상사를 처음 지으면서 함께 세운 것이다. 5.4m 높이로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으로, 특히 상륜부가 온전히 남아 있는 보기 드문 탑이다. 넓은 지대석에 하층기단이 든든하며 상층기단은 우주와 탱주를 새긴 안정감 있는 모습이다.

▲실상사 삼층석탑, 서탑과 동탑의 쌍탑 형식이다.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상륜부 모습, 왼쪽 서탑의 상륜부에는 수연이 없다.

기단 위에 얹힌 3층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층별 몸돌에는 귀퉁이에 우주를 새겼을 뿐 별다른 조각이나 문양은 없다. 1층에 비하여 2층과 3층 몸돌 높이를 과감히 줄여서 상승감이 경쾌하고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있는 상륜부는 매우 드문 경우로 불국사 석가탑 상륜부를 복원할 때 이곳을 참조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석등 (보물 제35호)

석등도 통일신라 후기 대표적인 석등이며, 특히나 석등에 등을 켤 때 오르내리는 돌계단이 남아있는 국내 유일의 석등이다. 팔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에는 아래쪽에 안상이 새겨졌고 위에는 연꽃잎이 넓게 새겨진 일반적인 모습이나 귀꽃이 장식되었으며 그 위로 솟아 화사석을 받치는 간주석이 통상 8각인데 비하여 이 석등은 둥근 모양을 3단으로 하여 언뜻 보면 장고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고복형(鼓腹形) 간주석은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과 유사한데 당시 이 지방에서 유행한 석등의 형식으로 보인다.

▲보광전 앞의 석등.
▲석등에 불을 켤 때 오르내리는 삼단의 돌계단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8면의 화사석은 각 면마다 직사각형의 화창(火窓)을 뚫어 보통 4개의 화창을 내고 나머지에는 사천왕상 등을 새기는 일반적인 형태보다 창이 많은 구조이다. 각 면에는 창호를 고정하기 위한 작은 구멍 흔적이 남아 있다. 팔각지붕에는 하대와 같은 귀꽃장식이 돌출되어 있으며 상륜부에는 복발과 보개, 보주가 그대로 남아있다.


보광전

▲보광전, 실상사의 주전(主殿)으로 불탄 자리에 규모를 줄여서 다시 세웠다.
▲7칸 이상으로 추정되는 본래의 넓은 기단 위에 다시 좁은 기단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보광전의 삼존불, 본존불은 조선 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여느 절집 대웅전처럼 꽃 창살이 아닌 평범한 여염집 같은 띠 살창에 창호를 발라 차분하고 겸손해 보인다.
▲보광전에서 내다본 모습, 석등과 쌍탑이 보이고 입구의 천왕문 너머로 지리산 천왕봉 운해(雲海)가 흘러간다.

고종 20년(1883), 절터를 욕심내어 불을 지른 이 지역 유생들에 의해서 소실된 후 다음 해에 월송 대사가 다시 지은 건물이다. 원래는 더 넓은 금당 터가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 위에 작은 기단을 만들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팔작지붕으로 세웠다.


동종(銅鐘)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

▲보광전 안에 있는 동종(銅鐘), 유두가 다소 아래로 내려가 있고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가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정면 중앙에서 오른쪽에 일본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일본을 때리기 위해 늘 비켜난 자리를 친다고 한다.

실상사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범종이 있었는데 깨진 상태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고, 현재 보광전에 있는 범종은 몸체에 기록되기를 강희(康熙) 33년(1694)에 주조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침허대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범종에는 우리나라 지도와 일본의 지도가 새겨져 있어 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이와 같은 소문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주지 스님이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종 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는데 지금도 지도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흥미롭다.


약사전과 철조여래좌상 (보물 제41호)

보광전 오른편에는 약사전이 있다. 고종 20년 방화 때에도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경내의 유일한 조선 중기 목조건물이다. 약사전에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우리나라 정기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실상사의 2대조 수철화상이 4천 근의 철을 들여 약사여래불을 주조, 봉안하였다고 하나 화재로 전소한 후 폐사된 동안에는 들판에 홀로 계셨다고 한다.

▲약사전, 보수 중이라 목재 부분이 벗겨져 보인다.
▲대웅전인 보광전이 띠 살창인 데 비하여 약사전은 예쁜 꽃살 창인데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라 한다. 과연 호국사찰답다.
▲철조여래좌상, 약사여래라고 하는데 아미타여래로 보기도 한다. 실상사 창건 초기에 만들어진 철불의 걸작이다.
▲현재의 손은 나무로 깎아서 조립한 것이며, 파손된 본래의 철제 손은 옆에 보관되어 전시 중이다.

높이 2.7m의 거대한 철불, 약사여래불은 두발을 완벽하게 얹은 결가부좌를 취한 채 양손은 아미타불의 구품인을 취한 듯 보인다. 그런데 약사불이라니? 자세히 살펴보니 약사불의 상징인 약합(약그릇)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현재의 양손은 최근에 나무로 만들어 끼워 넣은 것이지만 1987년 복원할 때 나온 철제 손과 같은 모양이라 하니 바뀌었을 리는 없다.

이에 대하여 약사불도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하며, 그래서 이 불상을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에서 본존으로 모시던 노사나상(盧舍那像)이라고도 하고, 원래의 손이 아미타 수인을 하고 있어 아미타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2대 조사인 수철화상이 약사여래상과 석탑 2기를 세웠다는 설이 있어 현재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상은 수철국사가 조성한 약사불로 본다. 나라에 좋은 일이 있으면 땀을 흘린다는 영험함으로 소문이 난 부처님이다.


목탑 터

▲목탑 터로 추측되는 자리, 기단과 초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가운데에는 심초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남아있다.

실상사가 크고 웅장하였으나 불타고 폐사된 후 지금의 절집들을 복원하였다고 하는데 주전인 보광전의 원래 금당 터 기단이 넓은 것을 보아도 충분히 상상이 가며, 또한 입구인 천왕문 오른쪽에 위치한 건물터는 아무리 보아도 삼 층이나 오 층 목탑건물터로 보인다. 법주사 팔상전보다는 다소 작았을지 몰라도 제법 크고 화려한 목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왕문을 들어서서 바라볼 때 왼쪽에 요사채가 있고 그 뒤편으로 극락전과 승탑, 승탑비들이 있다. 실상사 요사채.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옛 해우소, 자꾸만 눈이 갈 만큼 작고 아담하지만 멋스러운 건물이다.

보광전과 동종, 앞마당의 석등과 쌍탑, 약사전과 그 안에 모신 철조여래불, 그리고 목탑 터를 보고 나서 ‘이 작은 절에 어찌 이리 귀한 보물들로 꽉 채워졌는고!’ 라는 감탄을 하며 밖으로 나오기 십상인데 절 왼쪽 요사채 뒤로 극락전이 있고 그 주변에 홍철, 수척 두 스님의 승탑과 탑비가 있는데 꼭 둘러보기를 권한다. 그쪽에만 보물이 다섯 점이 있다.


극락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된 극락전, 얼핏 지나치기 쉽다.

요사채 뒤편으로 숨겨진 듯 자리 잡은 극락전은 옛 이름이 부도전(浮屠殿)이었는데 창건주 홍척국사와 그 제자 수철화상의 승탑과 탑비를 근처에 모셨으니 그 까닭에 부도전이라 한 듯하다. 그 후 수리와 중건을 거쳐 극락전이라 하니 두 분을 마침내 극락으로 모신 것인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 어칸은 빗살 창, 좌우는 정자살창문으로 단정해 보인다. 극락전 옆 건물은 요사채처럼 보이는데 선승(禪僧)이 머무는 곳인지 작은 현판에 목탁(木鐸)이라고 새겨 걸은 것이 눈길을 끈다.


승탑과 승탑비

극락전을 바라보아 바로 앞에 홍척국사 탑비가, 왼쪽에 승탑이 있고 극락전 오른쪽에 수철화상의 승탑과 탑비가 있다.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최초의 산문인 지리산 실상산문을 개산한 홍척 스님은 증각이란 시호를 받았고 이 탑이 세워진 후 응료라는 탑 명을 받았기에 홍척국사 탑비는 '증각대사응료탑(證覺大師凝蓼塔)'이라 부른다. (보물 제38호)

탑비는 비신은 없어진 채 받침대인 귀부와 지붕돌인 이수만 남아있는데 낡고 쇠락해 마멸이 심해 보이지만 이수 앞면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 새겨져 있으며, 용머리가 아닌 거북 머리로 조각한 귀부는 다소 감각이 떨어져 보인다. (보물 제39호)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인 홍척국사 승탑, 상륜부에 앙화와 보륜, 보주가 남아있으며 지붕의 귀꽃은 떨어져 나갔다.
▲홍척국사 탑비는 비신이 없어진 채 받침과 지붕돌만 남아있다. 귀부의 거북 머리는 떨어진 것을 붙인듯하다.

실상산문 2대조사인 수철화상 승탑과 탑비는 극락전 오른쪽에 있다. 물론 홍척과 수철 스님 두 분의 승탑, 탑비의 최초위치가 이곳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하는데 다행히도 수철화상의 탑비는 비신이 그대로 남아있어 실상사의 창건 내력을 말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수철화상 승탑 역시 스승 홍척국사 탑비처럼 전형적인 8각 승탑이며, 진성여왕 7년(893)에 입적하자 수철화상 시호를 내렸고 승탑이름을 능가보월이라고 하였으니 '수철화상능가보월탑(秀撤和尙楞伽寶月塔)'이라 불러야 한다. (보물 제33호)

수철화상 탑비는 일반적인 거북 받침돌이 아니라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세웠으며, 머릿돌에는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을 조각하였고 중앙에 능가보월탑비(楞伽寶月塔碑)라고 새겼다. 글씨는 식별이 어렵게 마모되었지만 수철화상의 출생과 입적, 부도를 세우게 된 과정을 당대에 성행한 구양순체로 새겼다. (보물 제34호)

▲스승 홍척국사의 승탑과 비슷한 전형적인 팔각승탑의 수철화상 승탑, 상륜부에 노반석만 남아있다.
▲수철화상 탑비, 사각형 받침대를 세운 것이 특이하다.

이렇게 하여 구산선문의 첫 개산사찰인 실상사를 둘러보았다. 산하 암자들을 포함하여 지리산의 풍광까지 즐기려면 이삼일을 머물러도 모자랄 터이지만 그래도 절 앞에서 하루 머문 후 이른 아침에 차분하게 둘러보니 참 좋다. 크지도 않고 우람하지도 않은 절집과 주변 지형의 편안함, 그러나 어느 하나 소홀할 수 없는 소중한 우리 문화재가 빼곡한 실상사는 호국사찰의 자부심으로 든든해 보였으며 국보를 보유한 백장암은 스님들이 참선하는 선원으로 운영하면서 중고등과정의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 학교'와 출가수행자 교육기관인 '실상사 화엄학림'등 교육기관은 물론 귀농 학교 등 다른 절집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들이 있어 관심이 간다. 일심으로 정진하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