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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재앙을 막아라...정도전이 만든 9대 풍수비책 1.

오완선 2021. 4. 2. 17:10

정도전이 서울 재앙을 막기 위해 만든 9가지 풍수 비책

[김기훈의 天地人] 조훈철 문화재 작가 ②/③

조선시대 한양 도성 건축의 책임자였던 정도전./경기도

문화재 이해법②

:풍수를 알아야 한다

문화재 작가 조훈철씨가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다고 강조한 두번째 관점, 풍수(風水)에 관해 질문을 했다.

―요즘 세대는 풍수라고 하면 미신이라고 생각한다.

“풍수를 미신으로 만든 것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측면이 가장 크고 심각하다. 일본인들은 조선을 영구적으로 합방하려면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민족 정신을 고양하는 중심적인 정신 코드를 조선어, 역사, 그리고 풍수로 파악했다. 그래서 풍수 현장을 찾아서 없애면 조선인들을 통치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풍수를 미신이라고 선전하면서도, 실제로는 풍수 현장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풍수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다른 원인을 하나 더 든다면 조선조 무덤자리를 둘러싸고 일어난 여러 폐단때문이다. 이는 조선조 유교 사회에서 자식의 최고 덕목은 효의 실천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좋은 곳으로 모셔 그 영향을 자손이 누리겠다는 과욕이 빚은 사회적 갈등의 결과이다. 이 현상은 오늘날에도 진행형이다.”

―풍수는 도대체 무엇인가?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인 말로 알려져 있다.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풍수는 원래 인간이 땅에서 살면서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찾는데서 유래했다. 살아 있는 생명의 기운이 감도는 장소가 개인이나 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음을 경험한 인간은 좋은 땅을 구하고자 그 방법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것이 풍수의 기원이다. 풍수라는 단어가 어색하다면 인문지리학, 자연지리학 혹은 환경 심리학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한국의 풍수는 역사가 얼마나 되나?

“한국의 자연환경에 맞는 자생적 풍수 이론은 5000년 전 청동기 시대 조성된 고인돌에서 찾을 수 있을만큼 뿌리가 깊다. 70%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조건 하에서 한국인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자연현상은 겨울철 한랭한 시베리아 북서 계절풍이었다. 예전에 난방 시설이 열악하던 시절에는 집 뒤에 산을 두어 북서 계절풍을 가리고, 앞에는 생존의 필수 조건인 물이 흐르는 구조를 가장 이상적인 생활 터전이라 생각해서 그 곳에 정착하여 살았다. 오늘날 명당터라고 불리는 곳은 대부분 이러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 갖춰진 곳을 말한다.”

풍수의 기본 개념도

―풍수는 고려시대까지 득세를 하다가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사라진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미신타파와 불교를 배척한 조선에서조차 풍수는 하나의 당당한 학문으로 자리를 잡고 500년 조선왕조와 그 맥을 같이 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기록을 보면 조선 순조 때까지 풍수를 과거 시험의 과목으로 채택했다. 조선의 왕들 가운데 세종, 세조, 정조 등은 모두 풍수의 대가였다.

또한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풍수에 대한 지식이 유학의 경전만큼 해박했다. 성리학은 출세를 위한 학문이지만 풍수는 생존을 위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의 왕이나 왕비가 승하했을때 왕릉의 터잡기에서 잘 드러난다. 왕릉터를 어느 당파가 정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대립

―조선시대 문화재에 풍수가 남아 있는 흔적의 사례를 들면?

“조선이 남긴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궁궐, 서원, 정원, 사대부 종택, 왕릉 등등 어느 한 곳이라도 풍수가 개입되어 있지 않은 문화유산이 없다. 다시 말하건대, 풍수는 미신이 아니라 주어진 자연환경을 가장 잘 이해해서 윤택하게 삶을 영위하려는 조상들의 삶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다. 사례를 원한다면 먼저 한양 도성 이야기부터 해 보자.”

―어떤 이야기인가?

“한양 도성 계획 이야기이다. 조선의 건국자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 왕의 스승인 무학대사와 당대 실권자인 정도전 간에 궁궐의 방향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선조 때 대문장가인 차천로의 ‘오산설림’을 보면 무학대사는 동향을, 궁궐 조영의 책임자인 정도전은 남향을 주장했다. 무학대사는 궁궐을 남향으로 하면 남쪽에 관악산이 놓이게 되는데, 관악산은 오행상 불(火)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궁궐을 눌러 화재가 빈번히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주례라는 중국 고전을 인용하면서 ‘예로부터 군주는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악산이 정면에 있지만 한강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화기가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반론을 폈다. 결국 실권자인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북악 아래 현재 위치에 경복궁이 자리잡게 됐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와 풍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의 삼성산 사자암 벽화.

―풍수를 강조한 무학대사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것 아닌가?

“정도전은 성리학자였지만,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풍수에 일자무식꾼이 풍수의 대가인 무학대사와 풍수 설전을 논리적으로 펼친다는 것이 이해가 되나?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 공신이기 이전에 이미 고려의 신하일 때부터 성리학에도 능통했지만 불교, 풍수 등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보는 게 지극히 상식적인 추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학대사의 주장을 반박하면서도 찜찜했는지, 풍수에서 주장하는 재앙을 막기 위해 여러가지 비보(보완책) 조형물을 설치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문화재 현장을 조금만 지식과 애정을 가지고 답사해보면 정도전이나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조성한 비보 조형물의 확인이 가능하다.”

한양의 3가지 풍수 위험

―어떤 것인가?

“궁궐을 남향으로 조성했을 경우 경복궁은 풍수상으로 3가지 위험에 노출된다. ①관악산의 불기운 ②삼성산(호암산) 바위의 호랑이 기운 ③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과 우백호 인왕산의 높이와 지세의 불균형에 따른 궁궐의 우환 등이다.”

―어떤 비보책을 썼나?

“관악산 화기 비보책으로는 ①한강이 궁궐에서 너무 멀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질 못하므로 숭례문 앞에 인공연못인 남지(南池)를 조성해 소방수로 쓰려고 했다(1차 방어선). ② 북한산(백운대)-경복궁-숭례문-관악산 축선에 맞게 궁궐을 건설하되 숭례문의 대문 방향을 정남에서 서쪽으로 조금 틀어서 관악산 화기가 직접 닿는 것을 피했다(2차 방어선).

③ 남대문의 현판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쓰고 세로로 배치했다. 숭례문의 숭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모습을 본 뜬 상형문자이고, ‘례’자는 오행상 불에 속하면서 방위는 남쪽에 해당한다. 숭례라는 글자는 남쪽에 불을 지른다는 의미가 있다. 글자를 세로로 쓴 것은 불을 불로써 막아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니 결국 이화제화(以火制火)이다. 관악산 화기에 대한 맞불 작전이 숭례문 현판 글씨에 숨어 있다.(3차방어선)

④관악산 불기운이 직접 궁궐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도로의 축을 틀어놓았다. 경복궁의 안산(案山) 격인 황토마루(지금의 조선일보 근처)에서 종로거리(현재 종각)로 축을 틀어 남대문 시장을 지나 숭례문에 도달하도록 도로 계획을 수립했다. 그 결과 궁궐의 축선과 세종로의 축선이 일치하지 않는다.(4차 방어선)”

한양의 화재를 막기 위해 설치한 남지(남쪽 연못)가 있던 자리.

조선 왕조가 도성을 건축할 당시에 경복궁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굽은 축선.

―서울 금천구에 위치한 삼성산 바위의 호랑이 기운에 대한 대책은 어떤 것이었나?

“궁궐을 조성할 때 건물들이 여러 차례 무너지는 사고가 났는데, 이것은 삼성산에 있는 호랑이 형상 바위의 기운이 궁궐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⑤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호압사’라는 절을 지어 이 기운을 눌렀다.”

서울 금천구 삼성산에 있는 호랑이 바위와 아래 호압사.

―세번째 위험인 좌청룡 낙산과 우백호 인왕산의 지세의 불균형은 무슨 뜻인가?

“풍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낙산은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한다. 우백호인 인왕산과 비교해 보면 높이나 지세가 현격히 떨어진다. 낙산의 명칭은 돌궐어로 우유를 뜻하는 타락(駝酪)에서 비롯됐다. ⑥우백호인 인왕산(338m)보다 높이가 3분의 1(126m)인 점을 고려해 허약한 기를 보충시키는 의미에서 낙산이라고 지었다. ⑦또 동대문(흥인문) 편액에 ‘갈 지(之)’ 자를 넣어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써 허약한 기를 보충했다. 갈지(之)는 용트림하는 글자체이다. ⑧동대문 밖에 문을 둘러싸는 옹성을 쌓아 지형이 낮은 허함을 풍수적으로 보충했다. ⑨그리고 지금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자리에 청계천 준설할 때 나온 흙으로 가산(假山)을 쌓아, 낙산의 산줄기가 낮고 약해 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풍수적으로 허한 기를 보충하기 위해 세운 동대문의 옹성./조훈철 문화재 작가

용의 모양을 한 '갈 지'자를 넣어 기세를 강화해 '흥인지문'으로 쓴 흥인문(동대문)의 현판.

―그렇다면 서울은 풍수지리적으로 완벽한 곳은 아니지 않은가?

“풍수적으로 100% 완벽한 지형은 없다. 큰 틀에서 장소가 정해지면 그 취약한 점은 풍수 비보로 보완을 해서 자연과 더불어 살려고 한 것이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이고 우주관이었다.”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은 이유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풍수의 흔적이 남아 있는 또 다른 문화재는?

“조선시대 왕릉이다. 왕릉은 조선의 왕이나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이 가장 집약된 문화재이다.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앞에서 말한 왕릉의 우허제는 풍수의 유산이다. 풍수에서 산 사람의 집은 양택(陽宅), 죽은 사람의 집은 음택(陰宅)이라고 부르는데, 좌우의 중요도는 정반대이다. 즉 양택은 왼쪽 사물의 지위가 더 높고(左上右下), 음택은 오른쪽 사물의 지위가 더 높다(右上左下).

예를 들어, 경복궁은 산 사람의 공간이니 기준이 정해지면 항상 왼쪽이 높다. 조선시대 관직인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고, 조정에서 왕의 왼쪽에 위치한 문반이, 오른쪽에 선 무반보다 높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반면 죽은 사람이 있는 왕릉이나 종묘는 묘지 주인 입장에서 봤을 때 오른쪽 부분이 지위가 더 높다. 왕릉에서 죽은 왕비의 오른쪽에 왕을 모시도록 비워 둔 것은 음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재 답사를 갈 때에는 산 사람의 공간인지, 죽은 사람의 공간인지 먼저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조상들의 생각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