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서울의 종묘와 사직, 左와 右가 바뀌었다?

오완선 2021. 4. 2. 17:14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건설할 때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건설했다./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 강사 및 저술가 조훈철씨가 책을 꺼내 펼쳤다. 옛 지도가 2장 나왔다. 두 지도에는 모두 서울의 경복궁, 종묘, 사직단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 지도에는 경복궁이 위쪽에 위치하고 왼쪽에 사직단, 오른쪽에 종묘가 있었다. 다른 지도에는 경복궁이 아래쪽에 위치하고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있었다. 마치 앞 지도를 180도 뒤집어 놓은 것 같았다.

외부인의 시각에서 본 경복궁. 경복궁이 위쪽에, 종묘가 오른쪽에, 사직단이 왼쪽에 있다.

우리 선조들이 생각한 방위 개념에서 본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의 위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이 위치해 있다./조훈철 문화재 작가

조씨는 “위의 지도는 서구인이 경복궁을 향해 바라보는 시각에서 그린 지도이고, 아래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본 우리 조상의 시각에서 그린 지도”라고 말했다. 이어 “조선은 한양으로 천도 후 도성 건설을 하면서 종묘를 왼쪽에, 사직단을 오른쪽에 두는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을 썼다”며 “한국 공영방송에서조차 서구의 시각에서 본 지도에 바탕을 두고 우묘좌사 식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우리 조상들이 만든 뛰어난 문화유산을 서구인의 시각에서 이해하면서 좌우와 동서남북 등 공간 개념이 뒤바뀌어 선조들의 사상이 반대로 해석되는 문화재 곡해 현상이 허다하다”고 비판했다.

조씨는 지난 13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 40만㎞를 다니며 문화재를 답사했다. 우리 조상들의 시각으로 문화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10여만장의 사진을 찍고 5000여개의 동영상 자료를 모아 분석해 ‘문화재 공부법’이라는 책을 2015년에 출간했고, 최근 개정판을 냈다. 그는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를 이해하려면 문화재들의 바탕에 깔린 조상들의 체계적인 사고, 다시 말해 문화재 이론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경제 현상은 경제학 이론으로만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꽤 있다. 배경에 문화적, 전통적, 심리적, 정치적, 군사적인 요인이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 현상을 분석할 때 서구의 경제학 이론틀이 맞지 않는 부분에서는 이러한 영향이 나타난다. 현장 답사를 통해 길러진 조씨의 우리 문화재 감상법이 한국 경제와 정치에 스며들어 있는 우리 조상들의 철학적 문화적 건축학적 관점을 이해하는데 유용할 것으로 생각해 만나보기로 했다.

인터뷰는 지난 3월 29일 오후 2시 서울 경복궁 내 경회루 옆 카페 ‘사랑’에서 진행됐다. 그를 만나러 경복궁으로 들어갈 때 경복궁 앞 세종대로에 서울시장 선거 플래카드가 붙여 있고, 유세 차량이 확성기를 울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문화재 현장 답사 13년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문화재 관련된 저술을 하면서 대학 강의도 하고, 전국적으로 공직자 및 교사, 학생 및 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문화재 강의와 답사 지도도 하고 있다.”

―문화재와 인연은?

“1990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들어가면서 첫 인연을 맺었다. 1995년 석사 졸업후 박사 과정에 진학하면서 대학 강의도 하고 문화재 답사도 했지만 큰 자각은 없었다. 외환위기가 기승을 부리던 1999년 박사 과정 수료 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재직중 생활이 어려워 박물관도 그만 두고 대형 입시학원에서 영어 강사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2012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TV 화면에서 숭례문이 불길과 연기 속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그동안 문화재를 소홀히 했던 나를 우리 조상들이 꾸짖는 듯한 느낌이 왔다. 한 일주일간 밥도 못먹고 잠도 못잤다. 이후 완전히 생각을 바꾸었다. 문화재를 공부하면서 문화재를 국민들에게 소개하고 안내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2012년 2월 10일 화재가 발생한 숭례문 주변에서 소방차들이 화재진압 작업을 하고 있다./조선일보 DB

―그래서 직장을 그만 뒀나?

“문화재를 보는 법을 국민들과 공유하자고 생각했지만, 막상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직장을 당장 그만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밤 시간을 이용해 주로 새벽 4시까지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주말에는 전국의 문화재 현장을 부지런히 누비고 다녔다.”

조씨는 우리가 조상들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3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①우리 조상들의 눈으로 문화재를 봐야 한다. ②우리 문화재, 특히 야외 건축물의 배치에 가장 중요한 것은 터잡기이다. 여기에는 필히 풍수(風水)가 접목되어 있으므로, 풍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면 대한민국 문화재를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③ 문화재는 현장 답사가 정말 중요하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공식적으로는 불교나 풍수 이론을 배격했다. 그 결과, 문서상 그들에 관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나 실제 건축물을 만들 때에는 풍수이론을 많이 도입했기 때문에 책만 봐서는 안되고 반드시 문화재 현장을 답사해야 우리 조상들의 사고 체계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씨의 이러한 3가지 주장이 어떤 의미인지 하나씩 물어보기로 했다.

문화재 이해법①

:조상의 관점에서 문화재를 바라보라

―첫번째부터 물어 보자. 조상의 눈으로 문화재를 봐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선진국들은 역사와 전통을 중시한다. 이는 그들 조상들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여 계승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도 진정한 선진국 반열에 오르려면 조상들의 생각을 정확히 읽어내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그런데 조상들의 생각은 대부분 글로 혹은 조형물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문제는 글들은 번역이 되지 않은 한문으로 쓰여져 읽을 수가 없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번역이 안 된 한문으로 된 서적이 30만권 내외 소장되어 있지만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일반 국민이 몇 명이나 될까? 또 조형물들은 교육기관에서 제대로 이론을 가르치지 않아 국민들이 생활 주변에서 접해도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조상의 눈으로 보지 않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 왼쪽과 오른쪽에 대한 이해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은 이후 질풍노도처럼 불어닥친 서양의 문물이 급속히 전파되면서 서양 시각이 정통 이론인양 착각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한국의 문화재를 그들의 관점에서 이해하다 보니 좌우와 동서남북 등 공간 감각이 뒤바뀌어 있는 사례가 많다. 문화재 이해를 위한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이다.”

―좌우와 동서남북은 지리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이 뒤바뀌었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이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은 서양지리학과는 다르다. 결국은 관점의 차이인 것이다. 서양은 공간을 바라볼 때 손님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지만 동양은 주인의 시각에서 공간을 바라보기 때문에 터를 정한 후 조형물을 배치할 때 공간 배치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동양의 조형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왼쪽(左)과 오른쪽(右), 상대향(向)과 절대향, 동입서출(東入西出), 음양오행, 천간지지 같은 기본적 이론들을 반드시 습득해야 한다. 오늘날 거의 잊혀진 이론들이지만 이런 개념들은 요즘 말하면 교통신호등 체계와 같아서 조선시대에는 누구나 아는 보편적 지식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파괴시킨 데다, 해방 이후에는 우리 스스로 전통문화에 관한 이론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이들의 지식으로 우리 문화재를 해석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그 현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들은 문화유산에 대해 주인의 관점이 아니라 구경꾼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사례가 빈번하다.”

 

좌우 뒤바뀐 종묘사직

―사례를 들면?

“궁궐의 왼쪽에 조상들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를 두고 오른쪽에 지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둔다는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들 수 있다. 이는 한·중·일 동양 3국에서 도성을 건설할 때 가장 중요하게 삼았던 기준이다. 이 때 왼쪽과 오른쪽의 기준이 무엇인가? 예컨대 서양식 지도를 보면 지리적으로 북쪽이 항상 위이기 때문에 경복궁이 위쪽에 있고 왼쪽에 사직단, 오른쪽에 종묘가 있다. 이렇게 보면 좌묘우사가 아니라 좌사우묘가 된다. 서울 세종대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 위치에서 경복궁을 바라보는 셈이다.”

―조상들은 어떻게 봤나?

“조선은 유교 국가로서 유교 예법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군주남면(南面)이다. 이는 국왕은 반드시 북쪽에 자리를 잡고 남쪽을 바라보면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궁궐 배치는 반드시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남향을 원칙으로 한다.

임금은 이런 공간 속에서 남쪽을 바라보면서 정치를 하는데, 이런 시각이 좌우를 정하는 기준이 된다. 즉, 임금이 남쪽을 바라보았을 때 궁궐 밖 왼쪽에 종묘가 있고 오른쪽에 사직단이 있다. 이렇게 봐야 좌묘우사가 제대로 이해가 된다. 한양의 도성 건설에서 경복궁을 축조할 때 북한산의 백운대-경복궁-숭례문-관악산을 잇는 남북축이 기본 골격이고, 그외 세부적인 것들을 풍수적인 관점에서 배치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다.”

―또 다른 사례를 들면?

“조선 왕릉의 우허제를 들 수 있다. 우허제는 왕비가 먼저 돌아가셔서 능을 조성할 경우 왕이 훗날 왕비와 함께 묻히기 위해 능의 오른쪽을 비워두는 것이다.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서오릉의 홍릉에 가면 우허제의 흔적을 찾을 수 았다. 홍릉은 조선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홀로 누워 계시는 곳이다. 이곳에 와서 관람객의 입장에서 왕릉을 바라보면 능의 왼쪽이 비어 있다.

그래서 왜 우허제라고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 주인 입장에서 봐야 오른쪽이 비어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른바 좌우를 정하는 기준을 모르면 우리 문화재를 볼 때 오리무중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된다. 절대향과 상대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절대향 vs 상대향

―상대향(向)이라니?

“동서남북을 정할 때 지리상의 동서남북보다 주인 입장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우리 조상들은 사방위를 정할 때 절대향, 즉 지리적인 동서남북보다, 주인이 위치한 공간을 북쪽으로 설정하는 상대향을 중시했다. 따라서 상대향 북쪽은 실제 방위와는 무관하다. 상대향의 관점에서 보면 주인이 전면을 바라볼 경우 주인이 위치한 장소가 북쪽, 전면이 남쪽이 된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왼쪽은 동쪽, 오른쪽은 서쪽이 된다. 이는 우리 문화재의 배치에 숨겨진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이다.

제사상의 홍동백서, 좌청룡 우백호, 서원의 동재 서재, 동입서출(東入西出), 남한산성의 4대문 가운데 서문의 이름인 우익문, 사찰의 동탑 서탑 등은 모두 상대향에 바탕을 두고 이름을 짓고 조형물을 만든 사례들이다.”

―만약 건물이 북쪽을 향한 북향 건물이라면?

“대구의 도동서원은 북향집이다. 강당 서쪽에 있는 건물은 실제 방위는 서쪽이지만 동재라고 부르고, 동쪽에 있는 건물을 서재라고 부른다. 실제 지리적인 방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북쪽에 있는 주인이 남쪽을 향해 본다는 대전제가 모든 건축물의 명칭에 새겨 있기 때문이다.”

―제사상에서 붉은 과일을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두는 홍동백서도 같은 원칙인가?

“그렇다. 실제 방위와 달리 위패가 있는 쪽이 무조건 북쪽이 된다. 그러므로 위패를 기준으로 왼쪽은 동쪽, 오른쪽은 서쪽이 된다. 제사상의 원칙 중 하나인 홍동백서를 이러한 방위 원칙에 적용하면 동쪽에는 붉은 과일인 대추를 놓고, 오른쪽 서쪽 끝에는 껍질을 깐 흰 밤을 놓게 된다. 초등학교 선생님들께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상대향 개념을 제도권 교육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 본다.

남한산성에 가 보라. 4개의 문이 있다. 동쪽문을 좌익문, 서쪽문을 우익문이라고 하는 것도 이같은 원리이다. 인조가 항복할 때 서쪽 우익문으로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왜 서쪽문을 우익문이라고 할까? 이런 이름을 짓는 성리학자들의 사고 체계에 상대향이란 개념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리들을 오늘날 우리들은 잊고 있다.”

―임금이 북쪽에서 서서 남쪽을 바라 볼 때 왼쪽이 동쪽, 오른쪽이 서쪽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 예컨대 경상도가 왼쪽, 전라도가 오른쪽이 된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우에는 어떻게 되나? 임금이 뒤를 돌아 북쪽을 볼 경우에는 왼쪽 평안도가 동쪽이 되고, 오른쪽 함경도가 서쪽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북향의 집을 가진 집 주인과 달리, 임금은 반드시 남쪽을 보고 방위를 정했다. 우리 민족의 집터인 한반도 전체가 남향이라고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함경도가 왼쪽이므로 동쪽, 평안도가 오른쪽이므로 서쪽이 된다. 방향을 정할 때 임금이 북쪽을 향해 돌아서지는 않는다.”

문화적 열등감 초래

―좌우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나?

“첫 단추를 잘못 끼워놓으니, 문화재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니 감동이 없다. 조상들이 남긴 문화 유산이 우리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한국의 공영방송에도 이렇게 좌우의 개념을 서구인의 시각으로 바꿔서 소개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주인의 입장에서 우리 문화재를 축조했는데, 손님의 입장에서 문화재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 책에 표현된 것과 방송에서 설명하는 것이 달라 국내외의 많은 시청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한다. 문화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러한 문제점은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역사와 전통을 중시한다면 조상들이 남긴 유산들을 보존할 때 그들의 생각을 제대로 읽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한국인의 자존심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문제점은?

“이런 측면을 생각해 보라. 우리 조상들은 예컨대 경복궁 같은 건축물을 지을 때 사방의 지형지세에 맞춰 높이와 크기를 정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건물 내부에서 밖을 바라볼 때 조망이 좋은지, 자연환경과 잘 어울리는지 여부이다.

그런데 외부인의 시각으로만 보면 이러한 중요점은 사라지고 건축물의 크기만 보인다. 그러니 중국의 자금성에 비해 한국의 경복궁이 작다는 측면만 부각된다. 경복궁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주인의 관점, 주변 자연 경관을 최대한 내부로 수용하려던 주인의 관점은 사라진다. 이래서야 조상들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나?”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의 방위-공간 개념의 중심점이었던 경복궁./조훈철 문화재 작가

―지금까지 이런 문제점이 왜 부각되지 않았나?

“우리가 의식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 제도권 내에서 이런 기초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동안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되려면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역사와 문화의 기반 하에서 정치, 경제, 외교, 교육 문제를 심도있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김기훈의 天地人] 조훈철 문화재 작가 ①/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