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2/낙서

‘교주 박정희’는 1원이라도 내셨는가

오완선 2012. 12. 29. 07:54

경북 경산에 있는 영남대 전경. 부정입학 사건 이후 박근혜는 영남대 이사직을 사임하고 학교로부터 손을 떼겠다고 공언했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 사학분쟁조정위원회로부터 7인의 이사 중 4인의 추천권을 다시 돌려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3> 뇌물바구니 영남대

박근혜 후보의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꼭 바로잡아야 할 문제가 정수장학회와 영남대 문제이다. 박근혜가 선거에서 패배했다 하더라도 정수장학회와 영남대가 제자리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거 결과마저 저 모양이 되었으니 정의의 실현은 또다시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당장 어떤 결과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외칠 것은 외쳐야 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처럼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장물은 장물이고, 뇌물은 뇌물이다. 정수장학회가 박정희 군사정권이 인질납치극을 벌여 빼앗은 몸값을 담아둔 장물바구니였다면, 영남대학교는 박정희에게 갖다 바친 진상품을 모아 만든 뇌물바구니였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는데, 박근혜 당선자는 대변인에 이어 초절정 막말 신공을 보인 더러운 입들을 국민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중용하고 있다. 이를 보면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보수는 다 어디로 갔는가 다시 한번 탄식하게 된다. 영남대는 500년 선비를 키워온 조선의 뿌리 깊은 보수 세력이 좋은 말로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다카키 마사오 세력에 의해 어떻게 능욕당하고 피눈물을 흘리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가슴 아픈 사례이다.

경주 최부자의 마지막 노블레스 오블리주

영남대학교는 1967년 12월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통합되어 박정희에게 바쳐졌다. 먼저 대구대학의 사연을 살펴보자. 일제 강점기에 이 땅에는 대학이라는 간판이 붙은 곳은 경성제국대학 한 곳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은 3·1운동 이후 민립대학 건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가 민립대학 건립을 막기 위해 부랴부랴 설립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가 각각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로 승격한 것을 비롯해서 전국 각지에서 대학 설립의 열풍이 불었다. 호남에서는 무려 7만2000명이 성금을 내 광주에 조선대학교를 건립했고, 영남에서는 대지주들이 돈을 모아 대구대학을 건립했다. 조선대학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설립 실무를 맡았던 박철웅의 개인 소유로 전락했고, 20년을 지켜온 대구대학은 박정희의 우아한 노후를 위한 장치로 전락했다. 1947년 경북의 유지들을 추동하여 대구대학의 설립을 주도한 것은 경주 최부잣집의 12대손 최준이었다.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말고, 재산은 만석 이상 불리지 말고, 흉년에 싸게 나온 땅 탐내지 말고, 사방 100리에 굶어죽는 사람 없게 하라는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인 최부잣집의 마지막 재산은 대구대학 건립에 다 들어갔다. 최준은 만석꾼 대지주였지만, 그 자신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고, 안희제와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임시정부에 막대한 자금을 보냈다. 해방 후 백범이 환국하여 가장 보고 싶어한 이가 바로 최준이었다. 백범이 최준을 만나 맞춰보니 최준이 안희제를 통해 임시정부에 보낸 돈이 1원도 비지 않고 그대로 전달되었다는 대목은 두고두고 후인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1946년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 일대를 휩쓴 ‘10월 항쟁’을 보면서 대지주들은 세상이 확실히 바뀌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대구에서 3만석을 했다는 정해붕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지주였지만, 최준의 권유로 대구대학 설립에 800만원의 거금을 내놓았다.

최준이 비록 만석꾼이었고, 경북 일대 여러 지주로부터 많은 출연금을 거뒀지만, 농지개혁을 거치면서 지주들의 경제력은 약화되어 현대적인 대학을 발전시켜나가기에는 힘에 부쳤다. 1961년 5·16 군사반란 후 군사정권은 ‘대학 정비 사업’을 표방하면서 여러 가지 시설기준을 들이밀며 신규 투자를 강요했지만, 이미 모든 재산을 학교에 쏟아부은 최준에게는 무엇을 투자하고 말고 할 여력이 없었다. 이 무렵 최준은 삼성의 이병철을 떠올렸다. 이병철은 경남 의령 출신이지만, 삼성은 대구에 깊은 연고를 갖고 있었다. 이병철이 최준을 찾아왔을 때 그는 이병철에게 “자네, 보성전문을 누가 세웠는지 아나?”라고 물어보았다. 이병철이 “그야 김성수 아닙니까”라고 답하자 최준은 “아닐세, 보성전문은 원래 이용익이 세웠고 손병희가 맡아 하다가 김성수가 인수한 것이네”라면서 대구대학은 자신이 전재산을 들여 키워왔지만, 이제 이병철이 맡아 잘 키우면 사람들이 “대구대는 이병철이 만들어서 잘됐다고 후대에서 칭송을 할 거네”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최준과 이병철이 만나는 자리에 입회했던 최준의 손자 최염에 따르면 이병철이 종잇장처럼 납작 엎드려 절하며 “선생님, 제가 정성을 다해서 대구대를 한수 이남의 제일 대학으로 만들겠으니, 맡겨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최준은 1964년 12월 아무 조건 없이 대구대 운영권을 이병철에게 넘겼다.

이병철은 왜 순순히 헌납할 수밖에 없었나

대구대학이 대지주와 유림들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 출발했다면, 청구대학은 ‘대중대학강좌’라는 대구시보사가 주최한 야간강좌에서 출발했다. 강좌를 주도한 최해청 자신이 젊은 시절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아픔을 맛보았기에 가난 때문에 공부의 기회를 놓친 “청년 남녀가 비분의 눈물을 머금고 있음”에 좀더 민감하게 반응하여 야간강좌를 마련한 것이다. 이 강좌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수백명의 젊은이가 모여들었고, 수강생들은 야간대학 설립 기성회를 조직했다.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많았지만, 언제나 문제는 늘 돈이었다. 다행히 고무와 피혁, 신발 등을 만드는 중소기업가들의 모임인 ‘경북포화조합’이 조합의 재산을 내놓아 이를 바탕으로 청구대학은 첫발을 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지주와 유림이 후원했던 대구대학에 비해 청구대학의 재정은 늘 열악했다. 1961년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청구대학은 시설과 건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때 2년제 대학으로 격하되기도 했다. 학교 설립 때부터 학장을 맡아 고군분투해온 최해청은 1966년 재단 경리직원의 횡령사건이 터지자 학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화불단행이라고 없는 살림에 대형 횡령사건을 맞은 청구대학은 1967년 6월15일 신축중이던 6층 건물이 붕괴되어 인부 10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하는 초대형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는 원래 5층으로 설계된 건물을 무리하게 6층으로 짓고 또 철근을 적게 넣어 날림으로 공사하다 발생한 인재였다.

심각한 재정난에 형사처벌 위험까지 겹치자 청구대학 이사진은 설립자 최해청의 뜻과는 상관없이 묘한 꾀를 냈다. 박정희에게 학교를 맡아달라고 간청하면 재정난도 피해가고 형사처벌도 면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청구대 교수로 박정희에게 열심히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이은상이 박정희와 교섭할 인물로 꼽혔다. 이은상은 박정희에게 천년만년 대통령 할 수는 없으니 퇴임 후에 무엇을 할 건가를 생각해야 한다며 대학 총장을 하는 게 가장 떳떳할 것 같다고 능란한 말솜씨로 부추겼다. 박정희의 비서실장 이후락 역시 박정희의 ‘퇴임’ 후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건물 붕괴사건 2주 뒤인 6월29일 청구대학 이사회는 설립자인 최해청을 배제한 채 이사회를 열어 학교법인 청구대학 운영의 전권을 ‘박정희 대통령 각하’에게 일임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7월26일 박정희 정권은 청구대학의 이사회를 개편하여 이사장에 봉명그룹 소유주이자 공화당 의원인 이동녕을, 상임이사에 청구대 진상의 법적 실무를 담당할 변호사 한석동을, 이사에 김성곤, 서정귀, 이후락, 오일룡을 임명했다. 이동녕은 박정희가 일제 때 문경에서 교사로 있을 때 학부형이라는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고, 서정귀는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창으로 호남정유를 맡아 박정희의 정치자금의 한 루트였고, 이후락은 설명이 필요 없는 박정희교 신도였고, 쌍용그룹의 김성곤은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신임 이사진 중에서는 오일룡만이 청구대학 동창회 회장이었다. 이후락이 이사회에서 한 발언에 따르면 이들 이사진은 박정희가 직접 지명하면서 “당신네들이 청구대학의 이사로 들어가서 학교를 돕고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해야 되겠다”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 설립을 주도했던 경주 최부잣집의 12대손 최준. 만석꾼 대지주였지만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그는 백범 김구 선생이 환국하여 가장 보고 싶어했던 인물이었다. 도서출판 황금가지 제공

대구대의 설립을 주도한
경주 최부잣집 12대손 최준은
조건없이 운영권을 이병철에게…
이후락은 박정희가 진상받은
청구대를 대구대와 합치는 꾀를…
이병철은 꼼짝없이 대학을 뺏겼다

대한민국의 어떤 사립학교도
‘교주’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박근혜와 그 측근들은
죽은 박정희를 ‘교주’라고
영남대 정관 1조에 못박았다

박정희는 앉아서 청구대학을 진상받았지만, 청구대학은 퇴임 후 그가 자리잡기에는 너무 작았다. 이후락은 청구대학에 대구대학을 합쳐 종합대학으로 만드는 꾀를 냈다. 박정희가 청구대학을 진상받았을 때는 대구대학의 운영권을 맡은 이병철이 1966년의 한비 밀수사건으로 곤경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병철은 사건이 터지자 9월22일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이 밀수사건 자체가 박정희와의 긴밀한 협의에 의한 것이었기에 헌납을 이행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이병철은 이듬해인 1967년 10월 한비 주식 51퍼센트를 정부에 헌납했다. 이병철의 큰아들 이맹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삼성이 대구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후락씨가 어느 날 대구대학을 정부에 넘기라고 요구했다”고 하는데, 당시 재기를 노리고 있던 이병철로서는 박정희 정권의 요구에 대구대를 “그대로 헌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병철은 대구대와 청구대가 통합하여 영남대로 발족한 지 두달 뒤인 1968년 2월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이은상이 박정희에게 퇴임 후의 모양새를 고려하여 대학 총장을 하라고 권유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실제로 박정희가 그 좋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1978년 정신문화연구원이 만들어질 때도 박정희가 퇴임 후를 생각해서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독재자 박정희는 영남대 총장으로도, 정신문화연구원 원장으로도 가지 않고 권력을 꼭 쥐고 있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스물아홉의 ‘소녀 가장’ 박근혜는 박정희 사후 6개월 만에 1980년 4월24일 소리 소문 없이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때의 이사진은 영남대 총장 이인기,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 박영수, 문교부 장관 이규호, 전 대한변협 회장 곽명덕, 대구엠비시(MBC) 사장 한준우, 경남기업 사장 신기수, 영남대 교수 조경희, 육영재단 이사 유연상 등등이었다. 이들 중 박영수, 이규호, 곽명덕, 한준우, 신기수는 이때를 전후하여 정수장학회 이사를 지냈고, 유연상은 박근혜의 사촌 형부였다. 그러나 박근혜가 무슨 근거로 이사장을 맡느냐는 반발이 심해 그해 11월8일 이사장 자리를 내놓고 평이사로 물러앉았다. 그렇지만 실제 학교를 장악하고 운영한 것은 박근혜였다.

1988년 7월 부산일보 파업사태가 정수장학회 문제를 사회적 관심사로 만들었다면, 그해 10월과 11월의 영남대 학내 민주화 운동은 박정희 일가가 명문 사학 영남대를 어떻게 망쳐놓았는지를 샅샅이 드러냈다. 그해 10월18일 사립대학으로서는 너무나 드물게 영남대학이 국회 문교공보위원회의 국정감사를 받게 된 것은 박근혜가 전권을 장악한 영남대의 비리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때 국정감사에서 박정희 사후에 박근혜가 측근 이사들과 함께 영남대 정관 1조에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을 못박았다는 것이 밝혀지자 사립대학을 국회가 왜 감사하느냐고 국정감사를 반대했던 의원들 입에서도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김영삼의 오른팔이었던 김동영은 영남대 재단이사장 조일문에게 ‘교주’로 되어 있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재단에 출연한 자금은 얼마입니까?”라고 따져 물었고, 조일문은 “문서상 나타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김동영은 이어 “현재 재단 이사로 박근혜씨가 되어 있는데, 박근혜씨가 재단에 출연한 액수는 얼마입니까?”라고 물었고 조일문은 또 “그것도 나타나 있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대한민국의 어떤 사립학교도 ‘교주’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일단 설립되면 사립학교라 하더라도 공익법인이기 때문에 특정한 개인이 주인일 수 없다. 그런데 박근혜와 그 측근들은 죽은 박정희, 돈 한 푼 낸 적이 없는 박정희를 ‘교주’라는 희한한 말로 정관에 못박은 것이다. 이러니 사유화란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재단의 압력에 의해 이뤄진 부정입학

국정감사에서, 그리고 학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줄곧 거론된 것은 이른바 측근 4인방의 전횡이었다. 영남투자금융 회장 김정욱, 동 전무이사 조순제, 영남의료원 부원장 손윤호, 재단 사무부처장 곽완석 등 측근들은 박근혜를 대신하여 학교를 운영하면서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특히 심각한 것은 부정입학 문제였다. 영남대 교수협의회가 밝힌 바에 따르면 학교 당국은 1987년 8명, 1988년 21명 등 모두 29명에게서 최고 2000만원(현재 2억~3억)을 받고 부정입학을 저질렀다. 대기 합격자가 나올 경우 앞순번에게 연락을 거주지가 아닌 본적지로 하여 고의로 연락을 못 받게 하고, 돈을 낸 부정입학자를 대신 입학시키는 수법을 썼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재단이사 아들의 경우 커트라인에서 무려 60점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합격했다. 검찰이 밝힌 바에 따르면 부정입학으로 거둬들인 돈은 모두 3억9000만원인데, 교비로 쓴 것은 3500만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부정입학이 재단의 압력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장부상 재단전입금이 잡혀 있지만, 실제 돈은 들어오지 않았고, 재단 이사진은 총장에게 부정입학을 해서 돈을 마련하라고 강권했다는 것이다. 당시 총장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전 총장 김기택은 박근혜가 실질적 이사장으로 모든 업무 결정을 하였고, 박근혜가 임명한 김정욱, 조순제, 손윤호, 곽완석 등 4인방이 박근혜의 지시를 집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근혜는 이사장과 이사로 있던 8년 동안 딱 한 차례밖에 영남대를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정입학 사건이 불거지자 박근혜는 12월2일 영남대 이사직을 사임했고, 정수장학회 이사와 영남대 이사를 겸하고 있었던 김정욱, 김창환, 손미자 등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박근혜는 영남대로부터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하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에는 7인의 이사 중 4인의 추천권을 박근혜에게 헌납하여 학교를 다시 박씨 왕조로 만들었다. 지면이 부족하여 다 쓸 수 없지만 박근혜가 영남대를 맡았던 기간은 사립대학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비리가 다 일어난 시기였다. 2007년만 해도 한나라당 당내 경선 과정에서 이런 문제가 거론은 될 수 있었지만 2012년 수구언론은 다들 입을 꾹 닫아버렸다. <동아일보> 1988년 11월3일자는 교수협의회 부정입학진상특위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여 부정입학 사건은 “곽완석 사무부처장이 부정입학을 박근혜 이사에게 건의, 부정입학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박근혜 이사가 부정입학을 공모했다면 정말 큰 문제이지만, 그가 측근들이 저지른 비리를 몰랐다면 그것은 또다른 재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