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

단청(丹靑).

오완선 2013. 10. 10. 21:19

무주 적상산 안국사 극락전의 편액 위아래 단청에 학(鶴)이 그려져 있다. 뒤쪽 처마 밑 폭 1m쯤 되는 공포(栱包)는 단청 없는 민나무다. 옛날 극락전 짓고 난 주지에게 하얀 도포 입은 노인이 찾아왔다. 노인은 "백일 동안 단청을 할 테니 사방에 천을 두르고 안을 보지 말라"고 한다. 주지는 99일째 날 호기심을 못 이겨 들여다보고 만다. 노인은 없고 학이 붓을 물고서 단청을 하다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마지막 하루 칠하지 못한 부분이 뒤처마에 남아 있다고 한다.

▶부안 내소사 대웅전 천장 왼쪽에도 단청을 빠뜨린 부분이 있다. 새가 그리다 사미승이 문틈으로 엿보자 사라졌다고 한다. 이 설화들에는 단청이 사람 힘으로 해낼 수 없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우리 단청은 중국 일본보다 보색과 명암을 강렬하게 대비시켜 화려하다. 소재와 문양도 비단 무늬부터 용·봉황·꽃·덩굴까지 다채롭다. 살림집에서도 하다 조선시대에 사치스럽다고 금한 뒤 궁궐·절·누각·서원에 전해 온다.


	[만물상] 단청(丹靑)
▶단청은 건물의 위엄을 높이고 곱게 단장하기보다 중요한 목적이 목재 수명 늘리기다. 민어·대구 부레로 빚은 아교를 바르고 돌가루와 조갯가루 물감을 칠해 갈라지고 썩고 벌레 먹는 것을 막았다. '적삼 소매를 반만 걷고 천장을 우러러 조용히 붓을 움직이는 승려가 있다. 운필삼매(運筆三昧), 인기척에도 아는 체가 없다.' 예용해가 '인간문화재'에 묘사한 단청 명장(名匠) 만봉 스님 모습이다.

▶만봉 스님은 여섯 살에 출가해 2006년 아흔여섯에 입적하기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빼어난 예술감각으로 경회루 단청을 비롯한 걸작을 숱하게 남겼다. 숭례문 복원공사에서 단청을 지휘한 무형문화재 홍창원 단청장(匠)이 만봉 스님 제자다. 그런데 지난 5월 새로 지은 숭례문 서까래에서 단청 벗겨진 곳이 스무 군데 넘게 발견됐다. 알고 보니 완공 3주 만에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홍창원 단청장은 "화학 물감 대신 몇 십년 만에 조갯가루 호분(胡粉) 물감과 천연 아교를 쓰면서 생긴 일"이라고 했다. 빛깔을 잘 내려고 호분을 너무 두껍게 칠해 갈라졌다는 얘기다. 제대로 해보려다 일이 어긋난 셈이다. 화장기 가신 민낯처럼 빛깔 날아간 단청도 아름답다. 내소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미황사 대웅전이 그렇다.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빛바랜 단청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이라고 했다. 단청은 세월과 비바람에 스러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숭례문 단청은 한 달도 안 돼 금가고 벗겨졌다니 어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