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2/낙서

흥청망청

오완선 2015. 6. 8. 15:05

최근 영화 ‘간신’이 프랑스에서 선판매돼 화제를 낳고 있다. 간신은 연산군에게 미녀를 바쳐 왕을 쥐락펴락하려는 간신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다. 사진은 영화 간신에 나오는 한 장면.

 

우리 역사상 최악의 폭군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사람을 꼽는다. 바로 연산군(燕山君, 1476~1506년)이다. 두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사화(士禍·사림파가 화를 입음)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조선의 4대 사화 중 1498년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는 모두 연산군 폭정이 주요 원인이었다. 연산군은 사화를 주도하면서 그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사림파나 훈구파를 가리지 않고 가차 없이 탄압했다. 물론 폐출된 왕이라는 점 때문에 기록에 일부 과장은 있겠지만, ‘연산군일기’에 기록된 연산군의 폭정을 보노라면 ‘폭군의 타이틀’이 너무나 어울린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한 해의 세금도 버거워하던 백성에게 2~3년 치 세금을 미리 거둬들이는가 하면 노비와 전답에도 각종 명목을 붙여 세금을 부과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줬다.

 

1504년 8월에는 금표(禁標)를 확대해 경기도 일원의 민가를 철거하라는 명을 내렸다. 금표는 본래 군사훈련이나 왕의 사냥을 위해 일시적으로 백성들 출입을 통제하는 지역을 말한다. 연산군은 민가를 허물고 그 입구마다 금표비를 세워 백성들 출입을 막고 자신만의 향락의 무대가 되는 사냥터를 넓혀 갔다.

 

연산군은 누구보다 궁궐에서 자주 잔치를 베풀면서 타락한 군주의 전형을 보여줬다. 자태가 고운 여자들을 전국 팔도에서 찾아내 이들을 궁궐의 기녀로 차출했다. 채홍사(採紅使)로 칭해진 사람들이 기녀 선발에 나섰고 이때 뽑힌 기녀들은 운평(運平), 흥청(興淸) 등으로 불렸다.

 

“경회루 연못가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산 위에 월궁(月宮)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해 그 사이가 기괴만상이었다.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 그리고 산호수(珊瑚樹)도 만들어 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누각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운평 3000여명을 모아 노니, 생황과 노랫소리가 비등했다. 또 횃불 1000자루를 늘어세워 밤이 낮처럼 밝은데, 흥청 수백 명이 늘어앉아 풍악을 연주했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보면 이 사람이 일국의 왕인지 공연 감독이자 주연배우인지 헷갈릴 정도다. 연산군이 흥청 끼고 노는 것을 한탄한 백성들은 연산군의 위세에 눌려 그 앞에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했지만 이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의미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을 민간에 유행시켰다. 오늘날까지 이 말이 유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사의 잘못을 경계하는 의식은 수백 년을 넘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 후원 역시 사치와 향락의 공간으로 전락했다. 연산군은 후원에 높이와 넓이가 수십 길이 되는 서총대(瑞葱臺)를 세우고, 그 아래 큰 못을 팠다. 또 임진강 가의 석벽 위에는 별관을 지어 유람하고 사냥하는 장소를 만들었는데, 굽이진 원(院)과 빙 두른 방(房)이 강물을 내려다보는 등 극히 사치스러우면서도 교묘했다.

 

워낙 독재군주였던 만큼 연산군 시대에는 엽기적인 형벌들이 개발되기도 했다. ‘연산군일기’에는 천장(穿掌)이라는 손바닥 뚫기, 몸을 지지는 낙신(烙訊), 가슴을 빠개는 착흉(斮胸), 뼈를 바르는 과골(剮骨), 손을 마디마디 자르는 촌참(寸斬)을 비롯해,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는 쇄골표풍(碎骨飄風) 등 최악의 형벌을 자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익명서(匿名書)와 다른 죄로 잡힌 자가 서로 연루돼 옥을 메웠는데, 해를 넘기며 고문해 독한 고초가 말할 수 없었다”는 기록 또한 연산군 시대의 참혹한 상황을 증언해준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 “신이 본래 서연관(왕세자의 스승)으로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깨쳐드렸다면 전하께서 이런 과실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상소문을 올린 조지서라는 인물은 결국 참형을 당하고 효수(梟首)됐다. 연산군은 효수할 때마다 죄명을 적은 찌를 매달게 했는데, 조지서에게는 ‘제 스스로 잘난 체하며 군주를 능멸한 죄’라는 찌가 붙었다.

 

연산군은 궁중의 내관들에게는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했다.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해 어디서나 안전하리라.”

 

신언패에 새겨진 내용이다. 한마디로 보고 들은 것을 입으로 전하면 죽는다는 경고였다. 한번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 집에 한글로 쓰인 익명서가 전해졌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 임금은 신하를 파리 죽이듯 하고 여색에 절도라고는 없다.”

 

이에 분노한 연산군은 한글의 학습을 탄압하고, 한글로 간행된 서적을 불태울 것을 지시했다. 1506년에는 조정 관리들에게 머리에 쓰는 사모(紗帽) 견본을 내리면서 앞쪽엔 충(忠)자, 뒤쪽엔 성(誠)자를 새기게 했다. 사모 두 뿔은 어깨 위로 늘어지게 해 왕이 아랫사람을 통제하는 뜻을 보이게 했다.

 

연산군의 폭정에 기름을 부은 여인도 있었다. 기생 출신에서 일약 후궁의 지위에 오른 장녹수(張綠水)다. 실록에서는 장녹수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했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했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해 웃었으므로,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

 

장녹수가 연산군의 총애를 업고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녹수는 각종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으며 막후에서 권력을 조정한, 연산군 정권 실질적인 2인자였다. 장녹수는 연산군이 폐위된 후 길거리에서 돌세례를 받으며 성난 군중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연산군은 폐위되기 얼마 전까지도 “조선은 왕의 나라다. 조선의 백성 모두가 왕의 신하요, 조선 땅의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내 것이다”라고 할 만큼 독재와 폭정을 정당화시키는 발언을 자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재촉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연산군의 폭정을 견디는 데 한계를 느꼈던 일부 관리들은 연산군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차곡차곡 세워 나갔다. 마침내 1506년 9월 2일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훈구대신들이 중심이 돼 연산군을 추방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추대했으니 이가 중종이다.

 

반정의 선봉에 섰던 3인방 중 박원종은 연산군과 개인적으로 원한 관계가 깊었다. 연산군의 음행은 도가 지나쳐서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 씨도 범했다. 연산군의 큰어머니뻘 되는 박 씨는 이때의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했는데 박 씨는 바로 박원종의 누이였다. 박원종은 누이의 자결로 연산군에게 늘 원통함을 갖고 있던 차에, 이조참판으로 있다 연산군을 비판하는 시를 써 말직인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된 성희안과 의기투합했다.

 

거사 하루 전날인 9월 1일 저녁 성희안, 박원종, 김감, 김수동, 유순정, 유자광 등 반정 주체 세력과 건장한 무사들이 훈련원에 속속 모여들었다. 이날 밤 반정군들은 창덕궁의 돈화문을 통해 연산군 처소를 급습했다. 반정군 규모에 놀란 궁궐 수비군은 거의가 궁궐을 빠져나왔고, 몇몇 승지와 함께 끌려 나온 연산군은 그 화려했던 독재자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벌벌 떨기만 했다. 그를 지켜주는 신하도 없었다. 박원종 등은 곧이어 경복궁에 가서 대비인 정현왕후(성종의 계비)에게 진성대군 추대할 것을 청했고 진성대군은 중종으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중종은 곧바로 연산군을 폐위시켜 강화도 교동(喬洞)으로 유배를 보냈다. 교동으로 쫓겨난 연산군이 가시 울타리 안에 거처하게 되자 백성들이 왕을 뒤쫓아 원망하며 지었다는 노래가 실록의 기록에 전한다.

 

충성이란 사모(紗謨)요 / 거동(擧動)은 곧 교동(喬洞)일세

 

일만 흥청(興淸) 어디 두고 / 석양 하늘에 뉘를 좇아가는고

 

두어라 예 또한 가시의 집이니 / 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지요

 

이 노래에서는 한자음이 비슷한 용어를 사용해 연산군이 관리들에게 쓰게 한 사모(紗帽)를 사모(詐謀·사기)로, 거동한 곳이 결국은 유배지 교동으로, 연산군이 좋아한 각시(婦)가 결국은 가시 울타리가 됐음을 풍자했다. 사치와 향락으로 점철됐던 연산군에게 가시 울타리는 큰 스트레스가 됐고 유배된 지 두 달 만인 1506년 11월 유배지에서 병을 얻어 31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연산군, 그의 말로는 이처럼 비참하고 쓸쓸했고 역사는 그를 최악의 독재군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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