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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탄길, 천상에 어린 막장의 눈물

오완선 2015. 11. 18. 18:18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구름도 탄식하며 넘나드는 길이 이제는 구름도 감탄하는 길이 되었다. 광부들이 한 삽 한 삽 삶을 파내던 곳은 골프장과 스키장이 되었고, 허파가 석고처럼 굳어가는데도 들어가야 했던 갱 위에는 한 방에 인생역전을 노리는 이들이 득실대는 카지노가 들어섰다.

세상의 모든 길에는 인간의 삶이 다져져 있다. 개인과 가족과 공동체의 땀과 눈물과 피가 배어 있다. 그들의 희로애락과 절망과 희망을 씨줄과 날줄 삼아 짠 피륙이 길이다. 초등학교가 없어지고, 갱도가 폐쇄되고, 광부가 사라졌다고 잊힐 순 없다.

소년은 백운산 8구에서 태어나 운락초등학교를 다녔다. 1~2학년 때까지만 해도 코찔찔이였다. 까만 코가 들락날락하는 찔찔이…. 학교까지는 십리 길. 산허리를 타고 가는 먼 길이었지만 머루, 다래 따 먹고, 겨울이면 나무 스키와 비료포대 썰매로 내리막길을 미끄러지는 재미가 쏠쏠했다. 짝꿍을 떠올리며 단풍잎 주워 책갈피에 끼울 때는 공연히 볼이 상기됐다. 고원의 칼바람은 혹독했지만, 활활 타는 교실의 장작난로와 친구를 생각하며 그 길을 내달렸다.

그러나 바퀴가 열 개나 되는 제무시(GMC) 행렬을 만나면 꼼짝없이 기다시피 해야 했다. 제무시는 하루 삼교대로 캐낸 탄석을 함백역으로 실어 날랐다. 동쪽 만항재(해발 1330m)에서 올라와 정암산 백운산 두이봉 질운산 산허리를 거쳐 새비재(해발 1000m)에 이르러서야 고개 밑으로 제무시는 사라졌다. 물결치는 백두대간 위로 아득하게 이어지는 그 행렬은 장관이었지만, 맑은 날이면 탄재로 하늘과 땅은 까맸고, 비가 오면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는 죽탄길이었다. 학교는 백운산과 두이산 사이 화절령 밑에 있었다.

그 길이 아주 특별하다는 걸 안 건 사북읍(해발 500m 안팎)에 가보고 나서였다. 저의 학교는 해발 960m, 저의 집은 해발 1200m, 그리고 길은 1100~1300m를 오르내렸다. 읍내에서 일년의 반이 겨울인 백운산 꼭대기 마을은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사북읍은 소년에게 꿈의 도시가 되었다. 명절 때나 가보던 곳이었다.

그곳 아이들도 저처럼 산이며 개천이며 집이며 사람을 까맣게 그렸지만, 소년의 눈에는 말쑥하기만 했다. 사북에서 서커스단이라도 만나거나 극장 영화라도 한 편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운수대통이었다. 안경다리 맞은편 빵집의 찐빵은 얼마나 맛있던지…. 다시 화절령을 오를 때면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공연히 화가 났고, 그래서 지천에 깔린 꽃을 마구 꺾었다. 그래서 꽃꺾기(花折) 고개라고 했나?

오르는 길 왼쪽 지장산엔 동양 최대의 수직갱이 있던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였다. 지장산은 버력더미, 아예 석탄산이었다. 중턱엔 650갱 광부 마을이 있고, 그곳 아이들은 근처 지장초등학교에 다녔다. 지금의 강원랜드 카지노와 호텔이 들어선 곳. 30분 정도 더 올라가면 해발 900m의 백운산 6구 화절령 마을이다. 다소 완만한 비탈에 一자형 연립주택 수십동이 들어서 있었다. 한 동마다 5가구가 살았고, 가구당 5~6평 공간에 방 2, 부엌 1칸이 배당돼 있었다. 화장실은 대여섯 동이 함께 쓰는 공동화장실뿐이지만, 소년에겐 그곳마저 꿈이 되었다. 학교도 가깝고, 읍내도 가깝고…. 그러나 그곳은 1970년대 반공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던 북한 아오지탄광 세트로 이용되곤 했다. 대한민국의 아오지.

20분 정도 더 올라가야 운락초등학교다. 해발 960m쯤 된다. 학생이 많을 땐 140명이나 됐다. 이 중 100명 정도가 화절령 마을에서 살았다. 학교는 이제 기념석 하나만 남기고 흔적도 없다. “이곳은 운락초등학교가 소재했던 곳으로, 1967년 3월1일 설립돼 22회 544명의 학생이 졸업했다. 폐광과 함께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1992년 2월28일 폐교되어 건물을 철거했다. 1994년 10월.” 불과 24년 만에 없어졌다.

새카만 아이들이 검은 운동장에서 검은 신발을 신고 검은 공을 차고, 검은 고무줄놀이를 하던 검은 학교. 그러나 아이들은 맑고 밝았다. ‘처음 사북으로 이사 오던 날/ 나는 검정나라에 온/ 기분이었어요./ 물도 시커멓고/ 지붕도/ 건물도/ 아니, 아저씨들의 얼굴도/ 처음 사북에 이사 오던 날/ 나는 그만/ 빙그레 웃어버렸죠.’(이아영 어린이, ‘이사 오던 날’)

화절령 마루는 초등학교에서 다시 20여분 더 올라가야 한다. 고개 남쪽은 영월 중동면 직동이고, 동쪽으로는 만항재, 서쪽으로는 새비재로 이어지는 신작로다. 운탄길이다.

백운산은 흔히 석탄이 절반이라고 했다. 게다가 올라갈수록 노두탄이어서 찾기도 쉽고 채굴도 쉬웠다. ‘착한’ 광산업자 채기엽씨가 아들(채현국)과 함께 처음 갱도를 뚫기 시작한 갱(해발 1177m)도 그곳에 있었다. 그런 갱이 길 따라 수십개나 됐다. 1177항, 1070항 등 해발 높이가 갱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갱 옆의 사택촌에도 그 숫자가 붙었다. 오로지 탄을 캐기 위해 존재하는, “밤에는 밤이고 낮에도 밤인” 공간을 상징하는 숫자였다. “뒤숭숭하다던 꿈자리 금세 잊으신 듯/ 만근하면 라면 한 상자 나온다며/ 자리 털고 일어나 출근하시던” 그 광부, “평생을/ 광부의 훈장인 양/ 진폐증을 달고/ 하늘 가신 아버지”(이명분, ‘광부였던 울 아버지’)들의 막장이었다.

만항재에서 새비재까지는 35㎞. 그 길은 1962년 저 악명 높은 국토건설단이 개설했다. 5·16 쿠데타 세력들은 병역미필자를 구제한다는 핑계로 조폭이나 부랑아들을 붙잡아 들였다. 이들을 군대식 편제와 군대식 규율 아래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예비역 하사관과 장교가 이들을 지휘하고, 헌병이 막사나 작업장을 지켰다. 새비재 아래 신동읍 예미엔 숙소가 일부 남아 있다. 작은 창문엔 예외 없이 철조망이 촘촘히 쳐져 있다. 무려 2000여명이 그곳에서 노역을 했다.

길은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잇는 것. 그곳으로 물자와 사람과 정보가 오고 가며, 그 길로 말미암아 사람과 마을은 다시 태어난다. 중국 윈난성, 쓰촨성 그리고 티베트 고원의 사람들은 차와 말과 소금 따위를 교환하기 위해 해발 4000m 산허리를 따라 수천㎞나 되는 차마고도를 뚫었다. 소년이 다니던 그 길을 차마고도에 빗대 운탄고도라고도 하지만, 운탄길은 태생이 다르다. 오갈 데 없는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탄을 캐러 산정까지 올라왔고, 그들이 캔 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강제 동원된 이들에 의해 개설됐다.

그렇게 세상으로 나간 석탄은 구공탄이 되어 가난한 이들을 살렸다. 그들의 시린 등을 덥혀주고, 밥도 짓고 국도 끓이고 도루묵도 구워내는 착한 연료였다. 살인적인 저임금 속에서 그들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농민에게 강요된 저곡가, 광부들이 목숨 걸고 캐낸, 싸디싼 석탄 때문이었다.

그때는 구름도 탄식하며 넘나드는 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구름도 감탄하는 길이다. 물결치는 백두대간 산록을 굽어보며 걷는 길이다. 광부들이 한 삽 한 삽 삶을 파내던 곳은 골프장과 스키장이 되었고, 허파가 석고처럼 굳어가는데도 들어가야 했던 갱 위에는 한 방에 인생역전을 노리는 이들이 득실대는 카지노가 들어섰다.

화절령에서 하이원리조트, 골프장에 이르는 6~7㎞ 구간은 야생화 꽃길로 바뀌었다. 백운산 정상을 중심으로 밸리콘도 북쪽엔 바람꽃길, 동쪽 골프장 쪽으론 얼레지꽃길, 처녀치마길, 바람꽃길, 양지꽃길, 박새꽃길이, 서쪽 스키장 정상부 주변엔 산철쭉길, 산죽길, 낙엽송길…. 제무시가 헉헉거리던 만항재에서 새비재까지 운탄길엔 원색의 라이더들이 달린다.

세상의 모든 길에는 인간의 삶이 다져져 있다. 개인과 가족과 공동체의 땀과 눈물과 피가 배어 있다. 그들의 희로애락과 절망과 희망을 씨줄과 날줄 삼아 짠 피륙이 길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 같은 이는, 그런 길을 걷는다는 걸 ‘존재의 확인 과정’이자 ‘자신을 해체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운탄길은 브르통의 말로도 담기 힘들다. 그곳엔 현대사의 저 어둡고 고통스런 밑바닥의 삶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피와 눈물이 산업화의 거름이 되었고, 땀은 이 땅의 에너지가 되었으며, 사북항쟁 등으로 터져나온 분노는 불의한 땅에 정의를 세우는 갱목이 되고, 삶 자체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추동력이 된 이들의 이야기다. 초등학교가 없어지고, 갱도가 폐쇄되고, 광부가 사라졌다고 잊힐 순 없다.

 
곽병찬 대기자
화절령 근처 해발 1133m 능선엔 지하갱도의 함몰로 땅이 꺼지면서 생겼다는 도롱이 연못이 있다. 파란 하늘이 고스란히 잠기도록 물은 맑았다. 그 맑은 물 앞에 서면 공연히 슬프다. 그런 그들이 잊히는 게 서럽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2015.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