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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문화재 탐방] [1] 시안(西安)에서 만난 진시황(秦始皇)

오완선 2015. 12. 1. 18:43

 

입력 : 2015.12.01 09:47

시안은 중국의 서북(西北)지방, 섬서성(陝西省, 샨시성)의 성도(省都)로 장안(長安)이라고도 불렸으며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다. 샨시성은 중국 문명의 탄생지로 3황 5제의 황제, 염제, 복희, 요 임금 등이 터전을 잡았고 당 태종, 한 무제 같은 인물이 나온 곳이며 현재의 중국 시진핑 주석과 마잉주 대만 총통도 이곳 사람이라고 한다.

▲시안 성벽, 명나라 때에 완성된 성벽으로 많이 파손된 것을 최근 복원하였는데 높이 12m, 너비 12~18m, 길이 14㎞이다. 성벽 사방에는 각기 문이 있는데 남문은 황제만이 다닐 수 있고, 북문은 사절단이 오가는 문, 동문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들, 서문은 실크로드를 향해 열린 문으로 서방의 상인들이 낙타를 타고 출입했다고 한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는 황제가 남문을 열고 친히 나가 맞이했다고 한다.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시안은 서주(西周), 진(秦), 전한(前漢), 신(新), 서진(西晋), 전조(前趙), 전진(前秦), 후진(後秦), 하국(夏國),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까지 13개 왕조의 수도였는데 가장 번성한 때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 때였으며, 100만 명이 넘는 인구와 계획적인 성곽도시로 서역까지 이름을 떨쳤지만 이후 수많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아야만 했다.


진시황제(秦始皇帝)

BC 259년, 진나라 군주인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태어나 31대 왕이 되었으며 이후 전국을 통일하여 중국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 조희는 조나라 기생으로 거상 여불위(呂不韋)가 데리고 있었으나 여불위는 그녀를 장양왕에게 바쳤으며 그때 조희는 이미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이를 숨겼으니 그 아들이 진시황, 즉 진시황이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여불위는 그때만 해도 후계자가 아닌 장양왕을 보위에 올려놓았으며, 즉위 3년 뒤에 장양왕이 사망하자 진시황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국왕의 자리에 올랐고 이후 36년간 재위하다가 50세에 사망하니 즉위 초 5년간은 아버지 때 승상에 오른 여불위(呂不韋)가 섭정을 하였는데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두르고 심지어 모친 조태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여불위는 자신의 수하 중 노애라는 건장한 남성을 환관으로 꾸며 조태후에게 들여보내니 노애와 조태후는 은밀히 지내면서 둘 사이에 2명의 아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그 노애는 시황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군사들에게 제압당하고 능지처참 되었으며, 어머니 조 씨마저 죽이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죽이지는 않은 채 감금하였으며 노애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2명도 살해하였다.

그리고 승상의 자리에 있던 여불위를 자결케 하니 BC 237년 마침내 여불위는 자결하고 시황제는 비로소 친정을 시작하였고 이후 주변의 나라들을 하나하나 점령하여 39세가 되는 BC 221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전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최초의 황제

전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국왕(國王)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더 높고 고귀한 칭호를 원하였는데 여러 가지를 고심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중국의 전설적 삼황오제에서 따온 황제(皇帝)로 정하였으며, 자신이 처음 황제이니 시황제(始皇帝)라고 부르라 하였다. 그리고 죽은 후에 신하들이 선왕의 시호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후대황제들은 2세, 3세 황제로 부르게 하였지만, 통일제국 진은 그가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으니 영원무궁 이어나가리라던 그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폭군 시황제

시황제는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고 전국을 군현제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다스리는 등의 치적도 없지 않으나 아방궁 건설과 만리장성 축조 등 지나치게 크고 많은 대규모 토목공사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고 나라의 재정이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역사를 거스르는 폭정이 일어나니 바로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자신의 통치에 반발하고 이의를 다는 학자들을 단속한다는 이유로 학자들의 책을 불사르고(분서, 焚書), 학자들을 잡아들여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니(갱유, 坑儒) 마침내 시황제가 희대의 폭군이 되는 역사적인 사건들이다. 시황제는 이를 진언하는 황태자도 변방으로 보내버리고 재임 중 법을 엄히 적용하니 그 대표적인 형법이 연좌제로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가족들까지 죄를 물어 몰살시키거나,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 모든 가구를 함께 처벌하는 등으로 죄인이 넘쳐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꿈

이렇듯 천하를 통일하고 무자비한 형법으로 폭압을 일삼으며 아방궁을 지어 호화로움과 사치, 향락으로 지새우던 시황제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묘약이었다. 불로장생약을 구해오면 후한 상을 내린다는 황제의 칙령에 따라 수많은 주술가들이 모여들고 별난 약재들이 바쳐졌지만, 효험이 없을 뿐 죽음에 처한다고 한들 불로장생약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중 서복이라는 자가 전설의 산 봉래산에 가서 불로장생약을 구해오겠노라고 금은보화에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씩을 싣고 배를 타고 떠났으니 제주도 서귀포에도 이 자가 들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끝내는 돌아오지 않은 채 전설처럼 전하는 말은 유구 지방(지금의 오키나와)으로 가서 왕국을 이루고 잘 살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진다.


시황제, 세상을 떠나다

이렇듯 천하를 손에 넣은 후 시황제의 관심은 불로장생이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만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는 재위 중 다섯 차례나 전국을 순행하였는데 이때도 역시 주관심 사항은 불로장생약이었다. 시황제의 지나친 욕심과 닦달, 그리고 포상을 노린 수상한 자들의 아첨으로 끊임없이 몸에 좋고 생명을 연장한다는 약을 마셨는데 이것이 시황제에게 치명적인 독(毒)이 되었으니 바로 수은 중독이다. 결국, 시황제는 50세의 나이에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폭군으로 일컬어지는 시황제는 실제로 살해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늘 다섯대에 이르는 황제 수레를 대열 중에 운행하면서 자신이 어디에 탔는지 모르게 하였으며 그러던 중 마지막 순행은 BC 210년으로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 막내아들 호해를 동행하였는데 사구 지방에 이르러 위독해진 시황제는 환관 조고에게 유언장을 쓰라 하며 옥새는 적장자인 부소에게 전하고 부소로 하여금 자신의 장례를 치르도록 유언을 남긴 뒤 7월 22일, 50세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긴 채, 심지어 시신 썩는 냄새를 감추려고 바다 생선을 함께 운반하면서 생선 썩는 냄새로 위장하였으며 환관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하여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를 자결하게 하고 막내아들 호해가 즉위하게 하니 그가 2세 황제이다.

▲진시황릉, 즉위 후 건조를 시작해 천하 통일 후 수형자 70만 명을 동원하여 36년간 만들어 완공하였다. 능위에는 석류나무가 가득하여 시안을 석류의 도시로 만들었고 사방에 백양나무가 둘러 심어 하나의 야산으로 보인다. 주변 둘레가 25km나 되는 거대한 무덤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현재 내부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병마용(兵馬俑),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흙으로 빚어진 병사와 말을 가리킨다. 진시황의 명령으로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3개의 전시관으로 연결되었는데 아직도 일부는 발굴 중이다.

 

▲흙으로 빚어진 병사와 말들은 발굴과 동시에 산화하여 색이 바래고, 대부분이 부서진 채 나와서 정밀한 작업으로 되살리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온전하게 발굴되어 보물급 대우를 받는 몇몇 토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까지 50억 명 이상이 관람하였다.
이렇듯 세상을 모두 내 손에 쥐고도 모자라는 마지막 한 가지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한 욕심이었다. 영원히 살기 위하여 온 세상을 수소문하고 별난 약재를 다 지어 올렸지만, 그 약효는 잠시 잠깐, 시황제의 몸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수은중독이었다. 차라리 여염집에서 평범한 곡식과 채소로 끼니를 때웠다면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시황제는 치명적인 독(毒) 수은이 체내에 쌓이면서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객지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영웅이었다.

게다가 믿고 있던 신하들도 주군을 배신하고 유서를 조작하여 황태자를 없애버리고 유약한 왕자를 즉위케 하니 영세 무궁토록 이어갈 줄 알았던 천하대제국이 진시황 사후 4년 만에 멸망하고 마는 무서운 역사를 우리는 한 편의 영화, 한 편의 전설처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은 진시황의 절반도 안 되는 돈과 명예, 권력을 잡으려고 부나비처럼 뛰어다니다가 넘어지고 자빠진다.

여전히 현대를 사는 과학인들도 불로장생을 찾아다니고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금은보화가 곧 행복이라고 눈에 불을 켜고 움켜지려고만 하니 연금술과 불로장생 묘약은 인류역사상 끊이지 않은 수수께끼이자 끝내 버리지 못하는 마지막 욕심인지도 모른다. 과연 진정한 행복, 삶에 대한 만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으로 건강해지고 고통과 질병에서 자유로워지거나 최대한 멀리 벗어날 수 있을까?

부귀공명에 눈과 귀가 먹지 않고 영생불멸에 현혹되지 않으며 그야말로 자연 속에서 천수(天壽)를 즐기는 삶은 어려운 것인가? 몇 천 년의 역사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는 시안, 진시황을 만나고 와도 풀리지 않는 화두(話頭)를 앞에 놓고 쉽사리 답을 구하지 못한다.

늘 여유로운 휴식과 섭생, 나를 놓아주는 여유를 즐겨보는 여행, 그리고 자연 친화적인 삶 속에서 질병으로부터 멀리하는 건강유지. 피폐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쌓여가는 고통과 불안, 불행하다고 느끼는 마음들을 치유하며 살 수 있는 작은 행복을 터득하는 지혜가 필요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