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고향을 ‘굴레에서 날개’로 바꾼 여장부

오완선 2015. 12. 1. 18:46

입력 : 2015.09.08 10:11

부안 백련농장 김성숙 대표

이만하면 어지간한 사내들도 두 손 두 발 들고도 남았을 법하다. ‘몸이 부셔져라 일한다’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 거친 손과 온 몸 구석구석 부적 같은 흉터들이 그의 집념어린 5년을 증명하고 있다.

귀농, 귀촌엔 ‘돌아간다’는 말이 반이다. 원래 있었던 자리로 이동하는 일, 사전적으로만 보면 누군가에겐 맞는 말이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누군가에겐 틀린 말이기도 하다. 농촌이나 농업에 대한 한 톨의 일가견도 없는 사람들이 시골 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경우에도 ‘돌아갈 歸’는 어김없이 따라붙으니 말이다.

‘귀농, 귀촌’은 이제 하나의 고유명사로 정책적인 의미나 일종의 사회 트랜드로 여겨지고 있지만, 실은 정서적/사회역사적 맥락에 더 부합하는 용어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우리는 연어처럼, 귀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고향으로, 자연으로. 그러니 그것은 본능이고 자연스러운 것임을, 전국 각지에서 스스로 증명해 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리라. ‘귀농, 귀촌’, 그래서 가혹한 현실임에도 여전히 매혹적이다.


자갈밭을 연꽃 군락지로… 19일간의 대장정

부안 백련농장 김성숙(59) 대표. 천생 여장부, 어쩌면 하다 보니 여장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온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귀농, 귀촌’은 낭만과는 동떨어진 세상이라는 사실을….

그는 시어머니의 치매와 중풍으로 맏며느리의 멍에를 걸머지고 자의 반 타의 반 고향으로 내려왔다. 자신의 고향이자, 남편의 고향이며, 시댁과 친정 모두의 고향인,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신촌마을. 저 많은 인연과 세월 이 있으니, 얼마나 많은 구구한 사연들이 잠들어 있을까. 각설하고 압축하면, 고향으로 다시 온 2010년부터 지금까지 5년 동안 억척스럽게 일해, 그는 지금 어엿한 마을기업 대표가 되었다. 그 덕에 마을 어르신들 6~7명이 일자리를 찾았고, 백련마을도 전에 없던 활기를 찾았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부안군에 더 이상 지원하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지원금을 받아보면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는 시기가 온다는 걸 아실 거예요. 본인의 힘으로 개척하겠다는 초심은 언제부턴가 희미해지기 쉽거든요.”

그의 성정을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말이 바로 이 대목이다. 그는 개척가다. 이 동네는 원래 연꽃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근현대화를 겪는 동안 개발바람이 불면서 연꽃군락지는 척박한 노지로 바뀌었다. 그는 거기에 착안해 사업에 착수했다.

“오자마자 포크레인을 사서 열아흐레 동안 땅만 팠어요. 자갈을 퍼서 나르고 날라 연꽃 습지를 만들고, 당시 폐공장이었던 김공장을 사들여 연꽃과 장류공장으로 개조했지요.”

그렇게 먼지구덩이 속에서 터를 닦았다. 이곳은 곰소 천일염이 나는 지역에다, 연꽃서식지이며, 메주를 말리는데 좋은 조건인 해풍건조가 용이한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김 대표는 장류 담그는 재주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그 자신감은 병환으로 오랫동안 간병을 해야 했던 시어머니의 기술로부터 전수된 것이었고, 지금은 연꽃서식지로 변모한 저 척박한 땅은 친정어머니의 유산이었다.


종균은 친정어머니, 기술은 시어머니로부터 전수

그렇게 해서 김 대표는 연과 장류를 접목한 청정 전통장류 사업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더 늘어났겠지만, 처음에는 부안에서 단 네 곳만이 마을기업에 선정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김 대표의 백련농장이다. 올해 추가적으로 마을기업 고도화사업에 선정되어 산업적 측면의 성장가능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앞으로 신제품 개발, 브랜드 및 디자인 개발, 기계·장비 구축, 판로 및 정보화 지원 등 사업개발에 더 많은 힘을 받게 된 것이다. 그가 생산하는 품목은 연잎을 끓여 만든 된장과 고추장, 청국장, 간장 등의 장류가 하나의 기둥이고, 또 다른 기둥이 연잎차, 연근차, 생연잎 등 연 생산이다. 장류 체험 프로그램에도 연간 1천여 명이 다녀갔을 정도로 맛은 물론, 장을 담그는 과정도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변산반도 자락에 위치한 곳인 만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온오프라인 판매부터 체험 프로그램 개발, 축제나 박람회 참가, 직거래 장터 참가 등 몸을 아끼지 않은 그의 억척스러움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장 담그는 기술은 시어머니로부터, 종균을 만드는 기술은 친정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행운도 작용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몸을 돌보지 않은 그의 저돌적인 추진력이 있었다. 웬만한 남자들도 혀를 내두를 만한 고된 일을 도맡아 하는 동안 부러지고 찢어져 병원을 제집 드나들듯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규모로 장을 담그다 보니, 무거운 짐을 달라야 하는 일들이 태반이다. 전 과정 하나하나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장을 담그는 일이 여성의 일이라는 편견이 강하지만, 따지고 보면 고강도의 중노동인 셈이다.


전업주부에서 열혈 기업가로 180도 변신

그런 그는 의외로 서울생활을 해 온 38년 동안 그저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았다. 5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그는 180도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병석에 있던 시어머니는 그에게 멍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 내려와 사는 5년 동안 평생 해야 할 일을 한꺼번에 다 한 것 같아요. 어느 날은 오가피가 발바닥을 찔러 병원에 실려가고, 짐 나르다 팔뼈가 골절되기도 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도 많았고요. 밤에 공장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민원이 들어왔던 적도 있었고. 헤아리자면 별의별일이 다 있었죠. 시어머니 모시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시어머니한테 많이 배우고 전수도 받았으니, 제게는 이 일을 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감사한 분이 바로 시어머니세요. 지금은 건강도 많이 좋아져 거동도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예요.”

갑상선으로 고생해 온 도시생활도 이곳에 와서 비로소 약을 끊을 만큼 좋아졌다. 연잎 덕분이었다. 절망스러워 보이는 환경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껍게 몸을 던졌다. 끝을 보겠다는 집념과 끈기도 그에게 중요한 동력이었다. 자본금도 끝없이 들어갔다. 거둬들이는 일보다 투자하는 일이 많았다. 그 갈등의 시간들을 묵묵히 견뎌온 것이다.

“변산반도 자락이다 보니, 식품허가가 나오기까지 정말 많이 힘들었거든요. 투자도 끝이 없이 이어지더라구요. 그래도 이왕 시작한 일이니까….”

이제는 저 수많은 항아리가 다 돈이라고 웃는다. 장의 특성상 3년 이상은 묵혀야 시판되기 때문에 이제는 추스를 수 있는 시기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불모지 개척부터 후계자 양성까지

후계자를 양성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부안제일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달에 두 어번 강의를 나가고 있는데, 3년은 배워야 이 일을 이해할 만하니, 후계자도 조만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장 담그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판로를 개척하는 일이나 마케팅은 아무래도 젊은 감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던진 질문에 뜻밖의 답이 돌아온다.

“온라인 판매부터 택배 붙이는 일까지, 그리고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운영, 모바일 밴드 운영 등등 제가 혼자 다 하는 걸요 뭐. 물론 젊은 사람들이 도와주면 더 잘 할 수 있겠지만, 우선은 이 장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다행히 지금 강의하고 있는 남학생 중에 관심 있어 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조만간 같이 일 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59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습득이나 활용 능력이 젊은 사람 못지않다. 사진 찍는 실력도 수준급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전방위적으로 노력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애초의 목적은 시어머니 병수발 때문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개척자가 되어 억척스럽게 며느리로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지극한 마음과 노력을 다 했다.

그에게 귀농·귀촌의 성공 비결을 묻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그의 삶과 온 몸 곳곳의 상처들이 이미 많은 것들을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포크레인 굉음과 흙먼지 날리는 자갈밭을 뛰어다니다, 시어머니 부름에 득달같이 달려가 수발을 들어야 했던 그 숱한 시간들을 가늠해보자니, 그 속에 답이 있다. 그의 고향을 ‘굴레에서 날개’로 탈바꿈시킨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지극하고도 고집스런 헌신과 희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자료제공·전라북도 귀농귀촌 지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