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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생각하고, 결심하면 바로 행동에 옮겨라!

오완선 2016. 7. 9. 12:02



1326년 전인 690년 9월9일, 최초의 여성 황제가 당나라에 등장했다. 그녀는 자신을 ‘금륜대성신황제’라 칭하고 국호도 ‘대주 大周’라 명하고 수도는 장안에서 ‘신도 新都’로 이름 지은 낙양으로 천도했다. 역사는 고대의 주나라와 구분해 이때의 주나라를 ‘무주 武周 혹은 후주 後周’라 불렀다. 중국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가 바로 ‘측천무후 測天武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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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측천무후 ©위키미디어커먼스


지난 2016년 5월20일,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취임했다. 이 날은 5000년 중국 역사상 측천무후에 이어 두 번째로 여성이 최고 지도자가 되는 의미 있는 날이었다. 비록 중국 본토를 지배하는 여성 지도자는 아니지만 무려 1326년 만에 중국 땅에서 여성 1인자가 다시 탄생한 것이다. 물론 중국 역사에 측천무후 말고도 여성 권력자는 존재했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의 왕비인 여태후, 19세기 청나라 말엽 함풍제의 후궁이며 동치제의 생모로 섭정 권력을 행사한 서태후 등이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들은 황제가 아닌 황후 혹은 황제의 생모로서 권력을 행사했다. 중국 역사에서 황제는 약 550명이 있었고 모두 남자였다. 무후는 이처럼 남자만의 전유물인 황제의 자리를 오로지 자신만의 노력과 재주로 올랐고 나라까지 세웠다. 비록 무후가 주나라의 황제로서 15년이라는 짧은 기간 재위했지만 그녀가 남긴 역사적 의미와 발자취는 크고 넓다.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가 태자의 연인이 되다

무후는 624년 서천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무조 武照’이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수나라 양제 시절 토목공사를 도맡아 큰 돈을 벌었다. 그는 그 돈으로 관직을 샀고 수나라 패망기에 권력의 줄을 갈아타며 걸출한 영웅과 인연을 맺는다. 바로 수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채원 유수 이연이다. 무사확은 이연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이연 군대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워 이연으로부터 태원군공 이주도독의 작위를 받았다. 마침내 이연이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당나라 고조가 되자 무사확은 14명의 개국 공신 중 한 명이 된다. 하지만 무사확은 권세와 명예를 누리지 못했다. 장사치 출신으로 돈으로 벼슬을 산 신분 때문에 귀족 권문세가들의 따돌림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당 고조 이연은 무사확을 아꼈다. 그가 상처하자 수나라 재상 출신 양달의 딸과 중매를 섰다.

무사확은 양 씨와의 사이에서 무조를 낳았다. 무조는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뛰어난 미모는 말할 것도 없고 춤과 노래는 물론, 시문에도 능하고 승마와 무술 솜씨도 빼어났다. 그야말로 다재다능했던 것. 무조가 8세 때 아버지 무사확이 죽었다. 이복오빠 두 명은 무조의 생모 양 씨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고 재산도 주지 않았다.

무조는 어머니와 장안으로 상경했다. 무조의 빼어난 미모와 재주는 입소문을 타고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당시 황제는 당 태종 이세민. 그는 ‘정관의 치’를 펼쳐 세상은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태종은 끔찍하게 아끼던 황후 장손 씨를 잃고 실의에 빠졌다. 그는 어린 소녀들을 뽑아 성적으로 탐닉했다. 무조의 소문을 들은 궁에서 그녀를 불러들였다. 무조는 황실의 서가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본래 총명한 무조는 이때 수많은 책을 섭렵하며 지적인 소양을 쌓았다. 당 태종은 무조를 귀엽게 여겨 가까이 했다. 무조는 무려 12년간 당 태종을 모셔 정5품 ‘재인 才人’ 품계도 얻었다. 이때의 일화가 있다. 서역에서 당 태종에게 말을 진상품으로 올렸다. 그런데 이 말이 사나워 아무도 고삐를 잡지 못했다. 태종은 주위에 이 말을 길들일 방법을 물었다. 무조가 나섰다.

“제게 세 가지 물건을 주시면 말을 길들이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길들이겠다는 것이냐?”

“채찍, 쇠망치 그리고 검입니다. 우선 채찍으로 가죽이 벗겨질 때까지 치고, 그래도 날뛰면 쇠망치로 머리를 내리치고, 그래도 고삐를 주지 않으면 검으로 목을 치면 됩니다.”

당 태종은 무조의 남자 못지 않은 기개를 칭찬했다. 또한 태종은 무조의 미모와 배포를 아꼈지만 여자로서는 총애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록에는 무조가 천성이 애교가 없고 또한 태종이 나이 차가 나는 무조를 그저 손녀처럼 귀여워했다고 전한다. 이 무렵, 무조는 당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해 왕자나 공주를 낳지 못했지만 평생의 인연을 만나게 된다. 바로 태자 이치이다. 태종이 병에 걸렸을 때 태자 이치는 태종의 침전 옆에 방을 마련하고 밤낮으로 간호를 했다. 이때 이치와 무조가 한마디로 ‘눈이 맞은 것’이다.

649년, 태종 이세민은 5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고구려 원정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을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태자 이치가 황제가 되었다. 이가 바로 고종이다. 당시 법도는 황제의 소생을 낳지 못한 후궁은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 평생 수절을 해야 했다. 무조도 예외일 수 없었다. 무조는 감업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름도 법명인 천조로 바꾼다. 태종의 기일에 고종과 무조는 재회를 하고 무조는 인생을 건 도박에 성공한다. 즉 고종을 유혹한 것이다. 이때가 무조는 27세, 고종은 24세이다. 이 세상에서 숨길 수 없는 것이 졸려서 내려오는 무거운 눈꺼풀과 사랑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 뒤, 고종은 뻔질나게 감업사를 드나들었다. 두 사람의 소문이 장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무 황후, 중국 최초의 황제 자리를 원하다

황제와 전 황제의 후궁이 절에서 밀회를 즐긴다는 소문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이 소문을 사실로 만든 이가 바로 고종의 정비인 왕황후였다. 왕황후에게는 궁 안에서 연적이 있었다. 바로 고종의 후궁 소숙비였다. 왕황후는 당나라의 개국공신 왕인우의 딸이었다. 가문, 지위에서 상태가 안 되는 소숙비가 고종의 총애를 믿고 뻣뻣하게 구는 것이 자존심도 상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황후는 새로운 여자를 불러들여 소숙비의 콧대를 꺾을 생각이었다. 왕황후는 소문의 주인공 무조를 정식 후궁으로 입궁시켰다. 황제의 후궁 121명 중 여섯 번째 서열인 ‘소의 昭儀’ 첩지도 내렸다.

황후에게 입속의 혀처럼 행동한 무조는 소의에서 ‘비 妃’로 승격됐다. 하지만 무조의 야망은 단순히 후궁으로, 황제의 선택적인 사랑을 받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었다. 무조는 황후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무조는 먼저 궁의 모든 정보의 수집과 유통을 담당하는 환관과 궁녀들을 포섭해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다. 얼마 후 궁의 최고 실력자는 황후가 아닌 무조가 되었다. 그리고 야망을 향해 달리는 무조의 배에 순풍이 불었다. 무조가 황제의 아들을 낳은 것이다. 무조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후 무조가 둘째를 낳았다. 공주였다. 무조는 무서운 인간이었다. 아이가 없는 황후는 무조의 어린 딸을 예뻐했다. 그날도 황후는 무조의 딸을 한참이나 보고 갔다. 황후가 자리를 뜨자 무조는 어린 딸에게 두꺼운 이불을 덮어버렸다. 고종이 무조의 처소를 찾았다. 무조는 통곡을 하며 소리쳤다.

“폐하, 공주가 죽었습니다. 멀쩡했던 공주가 황후가 다녀간 뒤에 죽었습니다. 제가 들어가 보니 공주의 얼굴에 두꺼운 이불이 덮여있었고 공주가 질식해 죽었습니다. 어떻게 어린 공주에게 그같이 끔찍한 짓을 할 수 있습니까?”

목적을 위해 자신의 젖먹이 어린 딸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죽일 정도로 무조는 무서운 여자였다. 무조의 음모를 짐작조차 못한 고종은 대노했다. 황후를 폐위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무조는 그토록 원하던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기득권 세력은 무조의 등장과 세력 확장을 단순하게 보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세력을 본능적으로 위험시했다. 더구나 당시 고종의 왕권은 권신 세력의 힘을 제압하지 못했다. 고종은 원래 황위 계승자가 아니었다. 그는 당 태종의 9번째 아들이었다. 태종은 장남 이승건을 태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방탕한 생활로 곧 폐위당하고 후임 태자에 넷째 이태가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당 태종의 혁명 동지이자 공신들이 연합해 강직하고 영리한 성품을 지닌 이태를 막아섰다. 즉 그들에게 필요한 태자는 장차 황제가 되어도 적당히 무능력하고 병약해 자신들이 주무르기 편한 황제였다. 그런 면에서 9황자인 이치가 적합했다. 장손무기를 비롯한 공신들의 강력한 후원으로 이치가 태자가 되어 고종이 된 것이다. 정리하면, 왕황후와 보수기득권 세력이 연합해 무섭게 떠오르는 무조의 부상을 막은 것이다.

고종과 권신들은 타협했다. 비의 품계를 모두 5단계, 즉 귀비, 숙비, 덕비, 현비, 신비로 나누고 무조를 제일 높은 신비에 임명했다. 이때가 무조의 나이 32세이다. 무조는 궁에 들어간 지 5년 만에 황궁의 1인자가 되었다. 황후와 소숙비는 궁에서 쫓겨났다. 왕황후가 소숙비라는 여우를 잡기 위해 불러들인 무조가 고양이가 아닌 바로 호랑이였던 것이다. 왕황후의 후회는 깊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무조는 멈추지 않았다. 황후가 되겠다는 야망에 불타는 그녀는 황제가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는 자리에 발을 치고 들어앉는, 마치 ‘수렴청정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무조를 황후로 임명하겠다는 고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손무기, 저수량 등의 중신들이 나섰다.

“폐하, 어찌 비천한 후궁 출신을 황후에 앉히려 하십니까? 더구나 신비는 선왕의 후궁이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무조는 소리를 질렀다.

“폐하, 어찌 저런 소리를 듣고도 저들을 살려 둘 수 있습니까?”

고종은 병약하고 무능했다. 그는 무조와 대신들 틈에 끼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허수아비 같은 황제이지만 그의 명령은 지엄했다. 결국 무조는 그토록 소원하던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가 655년으로 당태종이 죽은지 6년 만에 무조는 무서운 권력지향의 인간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황후의 자리에 오르자 무조는 피의 복수를 시작했다. 첫 번째 타깃은 소숙비였다. 서민으로 강등되어 유폐된 소숙비는 곤장 100대를 맞고 다리를 잘리는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소숙비는 죽어가면서 무조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만약에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고, 너 무조는 쥐로 태어나라. 내가 너를 찢어죽이겠다.”

소숙비의 이런 저주가 무서웠을까, 무조는 궁 안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것을 금지했다. 뒤이어 장손무기를 비롯한 20여 명의 대신들이 모조리 유배를 당했고 특히 장손무기는 유배지에서 자결을 명받았다. 당 태종의 처남이자 혁명동지이며, 고종의 외삼촌이고 승상을 역임했던 당대 최고 권세가의 비참한 최후였다. 역사는 아이러니이다. 장손무기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손쉬운 황제를 원했는데 그 황제의 여인이 실로 무서운 정적이 된 것이다. 옛날, 당 태종이 원했던 대로 현명한 넷째 아들 이태가 황제가 되었다면 아마도 장손무기의 권력은 지속되었을 것이다.

황제는 고종이었지만 실권은 무황후의 것이 되었다. 고종과 무황후는 슬하에 4남1녀를 두었다. 장남 홍弘, 차남 현賢, 셋째 현顯 그리고 막내아들 단旦, 딸은 태평공주였다. 태자는 장남 이홍이었다. 무황후는 매일 병치레를 하는 고종을 대신해 정사를 주관했다. 이런 무황후가 부담스러웠던 고종은 상관의를 시켜 황후 폐위를 계획했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궁중은 물론이고 조정까지 모두 무황후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무황후는 다른 야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녀의 야망의 끝은 황후가 아닌 황제였다. 무모했고 아무도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지만 무황후는 이를 하나하나 현실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무후, 황제로서 태평성대

‘무주의 치 武周之治’를 펼치다

무황후는 자신의 친위 세력을 구축, 확장했다. 궁중을 장악하고, 조정을 관장하며, 장군들을 포섭했지만 하나가 부족했다. 그것은 바로 무황후의 두뇌와 수족이었다. 무황후는 ‘북문학사’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이 기관은 세종의 집현전, 정조의 규장각과 같은 성격이었다. 젊은 인재들을 대거 확보했고 이들은 무황후의 통치 이념과 논리적 기반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젊은 혈기, 출세에 대한 욕망과 무황후의 야망이 접점을 이룬 것이다. 또한 이들의 전면 등장으로 기존 기득권 세력은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무황후의 황제가 되려는 야망의 걸림돌은 뜻밖에도 자신의 아들인 태자 이홍이었다. 성품이 어질면서도 강한 심지와 리더십을 겸비한 이홍은 황제감으로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다. 무황후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생각하고, 결심이 서면 곧바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면에서 보통의 사람들과 달랐다. 그것이 천사의 행동이든, 악마적 음모이든.

675년, 고종, 무황후, 태자 이홍이 같이 식사를 했다. 반주를 곁들인 정이 넘치는 자리였다. 하지만 곧 태자 이홍은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무황후가 자신의 아들에게 독이 든 술을 먹인 것이다. 이홍의 나이 불과 24세로 그는 무황후의 아들로 태어난 업보로 인해 그만 요절한 것이다. 무황후는 둘째 아들 이현賢을 태자의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말 잘 듣고 순진할 줄 알았던 이현은 능력과 기개를 겸비한 왕재였다. 무황후는 둘째 아들도 용납지 않았다. 그녀는 태자를 문란한 사생활, 반란 음모죄로 수도 장안에서 무려 1000km 떨어진 험지로 유배 보냈다. 684년, 고종이 사망하자 무황후는 유배 간 둘째 아들을 자살하게 했다. 그녀에게 가장 우선되는 가치는 권력이고 그녀는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부모자식의 인연 등 모든 세속적인 관계와 도덕을 무시했다.

평생 병을 앓던 고종이 사망했다. 후계는 셋째 아들 이현李顯이었다. 그가 바로 중종이다. 하지만 중종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정확하게 55일 만에 쫓겨났다. 이유는 중종의 황후 위 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들이 권력에 욕심에 냈기 때문이다. 무황후는 단호했다. 중종을 여릉왕으로 강등해 유폐시켰다. 그리고 막내 이단李旦이 황제가 되었다. 이가 바로 예종이다. 예종은 어머니이자 태황후인 무황후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르는 ‘마마보이’였다.

그렇게 6년이 지났다. 무황후는 본인이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주술사, 역술사, 측근들을 동원해 무황후의 황제 등극의 필연성을 만들어냈다. 여론전에서 효과를 거두자 무황후는 예종을 황사로 강등했다. 낙양 만상신궁 무성전에서 성모신황이라는 존호를 얻은 무황후는 황제 이단이 바치는 옥새를 받았다. 이때가 690년으로 무황후의 나이 67세였다. 모든 권력과 부귀 등 세속적인 욕망을 내려놓을 나이에 무황후는 새로운 야망을 향해 황제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의 역사는 무황후를 ‘무측천’이라 불렀다. 당나라는 고조의 창업 이후 72년 만에 무후의 역성혁명으로 왕조의 문을 닫았다. 당 황족 이 씨는 몰락하고 그야말로 무 씨의 세상이 되었다.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무승사, 무삼사 등 무측천의 피붙이들이 군왕으로 임명되며 권력을 장악했다.

무측천은 공포정치를 펼쳤다. 밀고를 체계화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밀고자는 우대했고 고발된 자는 무측천이 직접 수사하고 처벌했다. 이 기관의 장은 주홍, 내준신이 맡았다. 이들은 무측천의 신임을 바탕으로 악랄하고 잔인하게 무측천의 반대 세력을 숙청했다. 그야말로 이 씨 황족은 씨가 마를 정도였다. 고조, 태종, 고종의 후손 중에서 무측천 소생인 중종, 예종만 살아남고 모조리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반란이 일어났다. 중종 복위를 내건 당 고조 11황자 이원가의 난, 고종의 신하인 낙빈왕의 봉기 등이 일어났지만 무측천은 불과 한 달 만에 모든 반란을 진압했다. 무측천이 그동안 공을 들인 무신 세력이 철저하게 무측천의 편에 선 결과였다. 무측천은 노련했다. 그녀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구사했다. 기득권 세력에는 가혹한 탄압을, 백성들에게는 ‘속 시원한 정치’를 펼쳐보였다. 무측천은 비밀정보기관의 수장으로 자신의 수족이 되어 움직였던 주흥과 내준신을 제거했다. 내준신에게 주흥을 탄핵시켜 모반죄로 처형하고 곧바로 내준신도 권한 남용으로 가문을 멸족시켰다. 전형적인 토사구팽이지만 백성들은 공포정치의 주범을 처단하는 무측천의 속 시원한 정치에 박수를 보냈다.

무측천은 파격적인 관리인사 제도를 도입했다. 스스로를 추천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많은 인재들이 학벌과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관직에 올랐고 이들은 곧 새로운 신진 세력을 형성했다. 또한 근무에 충실치 못한 관리들을 좌천시키거나 심지어 죽이기도 했다. 그녀는 적인걸, 이소덕, 요숭, 소량사, 장간지 등 청렴하고 능력 있는 재상들을 발탁해 정치의 중심으로 삼았다. 후대 역사가들은 무측천의 통치를 당 태종의 ‘정관의 치’를 잇고 당 현종의 ‘개원의 치’를 낳은 무측천의 ‘무주의 치 武周之治’라 평할 정도로 무측천 치세에 정치와 민생은 안정되었다.




▶치적의 그림자인 스캔들과 미소년 군단

물론 무측천의 통치에 분명 그림자도 있었다. 공포정치도 그 중 하나이지만 가장 큰 비판의 대상은 개인적인 스캔들 등 주로 남자 문제였다. 무측천은 공학부란 기구를 만들어 측근에 두었다. 이곳에 20세 전후의 미소년을 모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잠자리 수발을 들게 했다. 이제 무측천의 최대 적은 나이 들어 늙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필사적으로 늙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항상 젊은 남자들을 곁에 두고 ‘양기 陽氣를 보충’했다.

또 풍소보라는 한량 출신 백마사 주지와 정분이 나 풍소보를 양국공으로 임명했다. 양국공은 무측천의 총애를 믿고 온갖 못된 짓을 일삼고 다녔다. 이 풍소보는 무측천의 딸인 태평공주가 자객을 시켜 암살했다. 태평공주는 어머니인 무측천을 닮아 배포도 크고 성품도 잔인했다.

무측천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있다. 이들은 공학부를 자신의 세력 거점으로 삼고 파당을 형성해 정치에 관여했다. 장역지 형제는 그야말로 정사를 주물렀다. 무측천 역시 8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자 판단력이 떨어지고 정치적 감각도 예전 같지 않았다. 황실과 조정의 관심은 과연 누가 무측천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로 모아졌다.

무측천에게는 여릉왕으로 강등되어 유폐된 셋째 아들 중종 이현과 막내 예종 이단이 있었지만 무측천의 조카인 무승사가 다음 황권을 이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때 중신 적인걸, 이소덕이 무측천을 찾았다.

“폐하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폐하는 과연 아들과 조카 중에서 누구와 더 정이 깊고 또 누구를 더 신뢰하십니까?”

무측천은 적인걸의 질문 의도를 알았다. 적인걸은 무측천에게 ‘중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면서 당나라의 황후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조카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당나라와 결별하겠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선택은 당나라 왕조의 지속이었다. 무측천은 유배지에 있는 중종 이현을 불러 태자로 복귀시켰다. 그러자 황제의 자리를 꿈꿔왔던 무승사는 실망한 나머지 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무측천의 총애를 점차 잃어가던 장역지, 장창종 형제도 불안했다. 이 씨가 다시 권력을 잡으면 자신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장창종은 황제가 될 생각을 품었다. 이를 눈치 챈 중신들이 장창종을 벌할 것을 간언했지만 무측천은 듣지 않았다. 이 같은 국정의 혼란에 군대가 일어났다. 재상 장간지가 병력을 이끌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장 씨 형제를 살해하고 무측천에게 황권을 중종에게 물려줄 것을 요구했다. 병들고 쇠약해진 무측천은 중종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황제로 즉위한지 55일 만에 쫓겨나 유배지를 전전하던 무측천의 셋째 아들 이현이 다시 중종으로 복위한 것이다. 이로써 무측천의 주나라는 15년 만에 막을 내렸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무측천은 중종, 예종, 무삼사, 태평공주, 대신들을 불렀다. 그녀는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존호를 ‘측천무후여황제’에서 황제를 빼고 ‘측천대성황후’로 고치고, 고종의 능에 합장을 해줄 것과 자신의 묘비에 아무 것도 써넣지 말 것, 왕황후, 소숙비 일족, 고종의 신하 저수량, 한원, 유상 등을 모두 사면하라는 내용이었다. 일대의 영웅 무측천은 82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705년이다.


▷ # 리더십 | 공포와 너그러움은 동전의 양면

무후는 무려 50년을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다. 당 고종의 황후로 28년, 중종과 예종의 생모인 황태후로서 7년, 그리고 황제로 15년 간 중국을 통치했다. 살벌한 권력투쟁의 강도와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인 반발 게다가 무후가 여자이기에 부딪치는 저항은 더욱 컸다. 그럼에도 무후는 한 번의 흔들림 없이 50년 동안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끝까지 전진하는 강인한 의지이다. 무후는 무섭고 강한 군주였다. 그녀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젖먹이 공주부터 금쪽같은 아들인 장남을 죽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또한 장성한 아들 두 명을 폐위시켰고, 무엇보다 태종의 후궁에서 그의 아들인 고종의 여인이 되는데 세속적인 눈총과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점은 당나라를 폐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대담함이다. 감히 보통의 사람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권력에의 강한 의지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무후가 역성혁명 이후 중종, 예종의 복위와 현종의 치세에서도 당나라 태묘에 배향되어 제사 음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현명함 덕분이다. 무후는 최후의 순간에 주나라 황제 무측천이 아닌 당나라 고종의 황비 무후가 되기를 원했고, 수많은 정적들을 사면함으로써 ‘용서’라는 인간의 본능을 이용했다. 이것은 최고 권력자로서 수많은 사람을 부려보고, 죽이고, 용서하고, 총애했던 경험치의 발로인 것이다.



무후의 잔인함은 공적인 업무에서도 두드러졌다. 그는 장손무기 등 원로들을 모조리 숙청했고, 자신의 주구가 되어 온 세상을 호령하고 다닌 두 명의 혹리를 처형했다. 게다가 근무 태만, 부정부패, 명령위반 등의 실수도 죽음으로 다스렸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공포정치였다. 권력이 바뀌면 세상은 숨죽이고 권력의 강도와 의지를 실험한다. 그녀는 그 순간 공포심이 들 정도의 카리스마로 관료 조직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1000여 명의 새로운 신진 관리를 등용해 인재 발굴, 세력과 세대교체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은 것이다. 기율과 기강이 확립 된 후 무후는 당근책을 썼다. 너그럽고, 배려의 1인자 모습을 보인 것이다. 무후는 고종의 후궁 시절, 궁 안의 환관과 궁녀를 포섭하기 위해 자신의 재물을 아낌없이 모두 썼다. 자신이 쓸 것을 남기고 돈을 뿌리 것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썼다고 한다. 그만큼 무후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과감성에서 여타의 라이벌들과 차별된 것이다.

무후는 불교를 숭상했다. 수많은 절을 짓고 불사에 막대한 돈을 썼다. 불교는 실생활도 지배했다. 무후는 육식보다 채식을 즐겨했다. 한 대신이 생일날 잔치를 열었다. 채소만 가득한 잔치상을 접대하기가 민망했던지 그는 몰래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손님을 대접했다. 다음 날 그 대신을 무후가 찾았다.

“내가 짐승이라도 살생을 금지했거늘, 어제 당신 생일에 몰래 돼지를 잡았다는데 사실인가?”

“폐하, 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황명은 지엄하거늘, 엄히 다스려야 하나 당신의 그동안의 공적을 봐 이번에는 용서하겠다. 그리고 다시는 나에게 고자질하는 그런 자는 손님으로 부르지 말라.”

이처럼 무후는 이른바 엄격함과 인자함을 번갈아 쓰면서 관료조직에 탄력을 불어넣는데 능숙했다. 또한 간신과 충신을 명확히 구분하는 혜안과 자신감도 갖고 있었다. 허종경 등의 무리들은 원래 무후의 반대파였다가 무후의 신하가 되었다. 그들은 간사한 마음으로 무후의 비위를 맞추는데 열중했다. 당연히 무후의 중신들이 이들의 탄핵을 간언했다. 무후는 반대했다.

“허종경 등이 재능은 있으나 간사하고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재능이 있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법이다. 또한 그들은 명예와 부귀에 집착한다. 나는 능히 명예와 부귀를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있으니 이들을 부릴 수 있다. 걱정하지 마라.”

허경종은 무후의 손과 발로 일하다 얼마 후 숙청되었다. 무후는 신하들 사이에도 긴장감을 유지했다. 무후가 존경할 정도로 신임하는 적인걸을 불렀다.

“요즘, 공의 험담을 늘어놓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대신이 원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궁금한가?”

적인걸은 사양했다. ‘충심으로 군주를 모시는데 누가 험담하고, 또 누가 칭송한다고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그의 답변이었다. 이 같은 무후의 리더십 방향은 오로지 세력가, 부자 등 기득권층으로 향해 있었다. 무후는 이들을 조이고, 풀어주면서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했다. 또한 무후는 백성을 위한 정치에 힘을 쏟았다. 모든 세제 개혁, 행정 개혁의 불편은 기득권층에, 혜택은 백성들이 누리게 했다. 더구나 그녀가 행한 피도 눈물도 없는 숙청은 모두 권력층 내부의 문제였다. 백성들은 만족했다. 무후의 잔혹성이 그들에게 ‘남의 일’이었다. 무후의 통치 50여 년 동안 당나라에서는 단 한 차례의 농민이나 백성들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다. 역사에서 무후는 음탕하고 잔인한 여황제, 정보정치, 철권통치, 공포정치의 대명사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의 스캔들은 수 백 명의 후궁을 거느리는 남자 황제의 그것과 비교하면 굳이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또한 피의 숙청은 권력의 이동과 순환을 위해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시대와 체제의 산물이었다.

무후의 50년 통치는 한마디로 철권과 자비가 공존하는 정치였다. 그는 반대파에는 무자비한 숙청을, 머리를 숙이고 심복하는 자에게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즉 적을 죽여서 두려움과 존경심을 유발한 것이다. 덕분에 무후는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었고 사후에도 그를 추종하는 학자, 관리, 무장들의 존재를 가능케 했다.

▶냉탕으로 시작했다면 냉탕으로 끝내라

사우나에는 온탕과 냉탕이 공존한다. 몸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직장에서도 온탕과 냉탕의 적절한 쓰임새가 필요하다. 온순하고 배려심 있는 리더는 자칫 만만한 리더와 동일시 된다. 조직원들에게 가장 긴장되는 시기는 인사철이다. 본인의 인사이동이나 승진도 관심이지만 ‘누가 내 상사로 오는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직장인은 상사로 오는 부장들의 리스트를 갖고 있다. 그 리스트 등급을 매기는데 가장 선호하는 상사는 일 잘하고, 리더십 갖춘, 이런 상사가 아니다. 의외로 온순하고 게다가 약간의 무능력도 겸비한다면 그야말로 ‘물개 박수’로 환영이다. 왜? 같은 월급 받고 빡 세게 일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직장인도 대부분이다.

상사 입장에서 생각하면 부임하고 첫 일주일이 승패를 좌우한다. 그 안에 자신의 이미지를 조직원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장비처럼 인상 쓰고, 소리만 고래고래 지르라는 것은 아니다. 예각을 파고드는 날카로움, 간결한 업무 지시, 업무와 부원 파악, 부서의 방향성 제시 등이 그 승부이다. 상대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인간은 복종하게 된다. 그것에 그가 본래부터 갖고 있는 부서장으로서의 권한, 즉 무기를 슬쩍 보여주면 조직 장악과 관리는 일단 성공한 것이다.

다음이 더 중요하다. 황량한 들녘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의 가치는 화원에 만발한 백만 송이 꽃보다 더 값지다. 권한과 실력으로 누르면 곧바로 따뜻한 체온을 품은 손으로 조직원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너그러움이 필요한 것이다. 조직은 오케스트라이다. 강한 드럼 연주로만, 부드러운 현악기로만 완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함과 부드러움은 정반합의 과정으로 조직의 목표를 이끄는 도구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사우나에서 냉탕에서 시작하면 냉탕으로, 온탕에서 시작하면 온탕으로 끝내야 한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강함에서 시작했다면 과정에서 부드러움을 슈크림처럼 넣었어도 강한 카리스마로 끝내야 한다. 시작과 끝의 강함을 몸은 기억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