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박종인의 "땅의 역사."

오완선 2017. 8. 17. 13:07



입력 : 2017.08.17 03:04 | 수정 : 2017.08.17 09:22

[87] 임진왜란과 해유령전투의 비밀

전쟁 대비 없던 조선, 임진왜란 초기에 갈팡질팡
의지 박약한 지도자 선조 "명나라 귀순이 나의 뜻"
해유령에서 육전 첫 승리… 지휘관 신각은 훈장 대신 참수
민간 약탈… 갑질 일삼던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 반란군이 일본군에 넘겨
"나만 살려주면 남도 땅은 명나라 마음대로 하라"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대, 반란 토벌… 일본군 퇴치
순찰사가 공 가로채… 정문부는 모반 혐의 옥사
명나라 사신 유원외 "고구려 때부터 강국… 준비 없기에 변란 자초"

박종인 기자

1419년 조선 4대 왕 세종이 왜구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했다. 1449년에는 두만강 유역 여진족을 소탕하고 4군 6진을 설치했다.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무리를 단칼에 처단한 이 나라에 143년 뒤 전쟁이 터졌다. 임진왜란이다.

폭풍 전야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사절이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다치바나는 기행(奇行)을 남겼다. 상주에 도착해 목사 송응형이 기생 춤과 음악으로 접대하자 이리 말했다. "전쟁 속에 산 나야 그렇다고 쳐도, 노래와 기생 속에 아무 걱정 없이 지낸 당신 머리털이 희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다치바나가 서울에 도착하니 예조판서가 잔치를 베풀었다. 술잔이 돌고 다치바나가 후추 알들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기생과 악공들이 서로 다투며 줍느라 대혼란이 벌어졌다. 다치바나가 통역관에게 탄식했다. "너희 나라는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다.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류성룡·징비록)." 다치바나는 보았다. 대마도 정벌과 6진 건설 이후 100여 년 사이 망가진 스산한 조선을. 다치바나가 보고 들은 바는 고스란히 일본 정부에 보고됐다. 1586년, 임진왜란 발발 6년 전이다.

의지 없는 지도자, 선조의 도주

1592년 음력 4월 14일 대마도를 떠난 일본군 본진이 부산에 상륙했다. 이튿날 동래부사 송상현은 분전 끝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서 죽음을 맞았다. 평화로운 시절 부산을 자주 찾아 안면이 있던 일본 장수 다이라(平調益)가 옷깃을 끌며 피하라고 눈치를 줬다. 송상현은 거부했다. 그가 죽은 뒤 다이라는 탄식하며 시신을 관(棺)에 넣어 성 밖에 묻고 푯말을 세웠다. 다이라의 상관인 대마도주 소요시토시(宗義智)는 송상현을 죽인 병사들 목을 베 예를 올렸다. 동래가 함락되고 문경이 함락되고 충주에서 신립이 8만 병사와 함께 죽었다.

4월 28일 최고 지도자 선조가 회의를 열었다. 선조가 발의한 안건은 한양 포기 여부였다. 수도를 포기한다고? 영의정 이산해는 그저 울기만 하다가 "옛날에도 피란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선조실록). 이틀 뒤 폭우 속에 울부짖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선조 일행이 임진강을 건넜다. 5월 초하루 선조가 강 건너 동파역에서 야전회의를 주재했다. 역시 안건은 피란 여부였다.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지도자 본심이 드러났다.

'내부(內附)'는 명나라 영토 요동으로 들어가 귀순한다는 뜻이다. 수도를 떠난 게 엊그젠데, 나라를 떠난다고?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승지 이항복은 찬성했다. 좌의정 류성룡은 거칠게 반대했다. 요동 망명은 무산됐다. 도주하는 내내 선조는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 손에 죽을 수는 없다"며 아쉬워했다.

시스템의 붕괴, 해유령 전투

음력 5월 7일 피란을 거듭하던 조선 정부 지도부가 평양에 도착했다. 그 사이 한강 방어선은 도원수로 임명된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이 맡았다. 한양 수비는 우의정 이양원이 담당했다. 바닷물처럼 밀려든 일본군 앞에서 도원수 김명원은 퇴각을 결정했다. 결사 항전을 외치던 부원수 신각 부대와 이양원의 한양수비대도 결국 흩어졌다. 경기도 양주에서 이들은 함경 남병사 이혼이 이끄는 병력과 극적으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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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와 양주를 잇는 해유령 고개에 탑이 하나 서 있다.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전투를 기념하는 ‘해유령전첩비’다. 어이없게도 승리를 이끈 장수 신각은 조선 정부에 의해 참수됐다. 망가진 국가 시스템 탓이다. /박종인 기자

5월 16일 세 지휘관이 이끄는 조선 육군과 일본군 선발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양주와 파주를 잇는 해유령 고개였다. 일본군 70여 명 전원 사살. 임진왜란 육전(陸戰) 첫 승리였다. 사흘 뒤 승전보를 평양으로 보내고 기다리던 이들 앞에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이 도착했다. 선전관이 어명을 읽었다. "비겁한 장수 신각의 목을 쳐라." 부대원들 앞에서 신각이 목 잘려 죽었다. 달아난 도원수 김명원이 "무단 이탈한 신각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보고한 탓이다. 선전관이 남쪽으로 출발한 직후 신각이 올린 전승 보고서와 일본군 머리 70개가 평양에 도착했다. 또 다른 선전관을 급파했으나, 허공으로 달아난 명예와 흩뿌린 피, 땅에 떨어진 군사들 사기는 회복할 수 없었다.

민심 이반, 함경도의 반란

그즈음 함경도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주모자는 국경인(鞠景仁). 가담자는 함경도 주민들이었다. 전주 사람 국경인은 나라에 죄를 짓고 회령으로 쫓겨난 하급 벼슬아치였다. 7월 1일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회령에 접근하자 이들은 선조의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을 '모두 결박하고 마치 기물(器物)을 쌓아놓듯 한 칸 방에 가둔 뒤' 일본군에 넘기고 항복해버렸다(선조실록). 훗날 의병부대에 의해 타도될 때까지 이들은 회령 일대에서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주민들이 왕자들이 가는 길마다 일본군 보라고 왕자들의 행방을 적어 붙이고 다녔다"는 것이다.

두 왕자가 함경도로 간 목적은 근왕병 모집과 주민 위로였다. 그런데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들의 좋은 말과 보화를 보면 기필코 약탈해갔다. 적을 앞에 두고 백성들을 흩어지게 할 생각밖에 없었다(見人善馬寶貨則必掠之望賊思散之民).'(이호민·오봉집(五峯集)) '민간을 겁박하고 수령을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侵撓民間逼責守令大失人心).'(권용중·용사일록(龍蛇日錄)) 엄혹한 전란 속에 갑질을 해댄 것이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어떤 왕자인가. 임해군은 '사람 죽이기를 초개같이 하다가 벌을 받으니 도성 안 백성들이 춤을 췄다.' 순화군은 '눈먼 여자의 이 열 개를 쇠뭉치로 깨고 집게로 잡아 빼 결국 죽게 하기도 했다(선조실록).' 전쟁 후에도 악행은 끝이 없었다. 아비 선조는 이들을 벌하라는 상소에 대개 귀를 닫거나 처벌을 불허하곤 했다.

각각 스물한 살, 열세 살에 불과한 이 무뢰한들에게 선조는 군사 모병과 주민 위무 책임을 맡긴 것이다. 반란은 자연스러웠다. 인질이 된 두 왕자는 오랜 기간 휴전 협상에 큰 걸림돌이 됐다. 휴전협상에 임했던 명나라 사신 심유경에게 임해군은 이렇게 말했다. "나만 풀어주면 한강 이남 땅은 마음대로 나눠 가지라(징비록)."

북관대첩

반란군을 제압하고 함경도를 수복한 전투가 북관대첩이다. 총사령관은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였다. 정6품이니 그리 높은 직급은 아니었다. 주력부대는 의병이었다. 일본군과 국경인의 행패를 쓰라리게 겪은 주민들도 반란군에서 대거 이탈했다. 음력 9월에 거병한 정문부 부대는 10월 총공세에 들어가 반란군 지도부를 죽이고 적지를 속속 회복했다. 두 왕자를 적에게 넘긴 반란군 토벌이 첫 번째 목적이었으니, 참으로 대의명분에 충실한 전투였다. 실지 회복 또한 목적이었으니 이 또한 달성됐다. 그런데―.

                  
정문부 묘소 아래에 있는 북관대첩비 복제비. 함경도 길주에 있던 비석은 1905년 일본군이 야스쿠니 신사로 가져갔다가 2006년 한국을 거쳐 북한으로 반환됐다.

'의병장 정문부의 전공(戰功)을 순찰사 윤탁연이 사실과 반대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정문부의 부하가 왜군 목을 가지고 함경남도를 지나면 모두 빼앗아 자기 수하 군사들에게 주었다. 윤탁연이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에게 옷과 월동 장비를 주었으므로 그들이 조정에 돌아와서는 모두가 윤탁연을 옹호하고 정문부의 공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결국 종성 부사 정현룡이 함북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정문부는 급이 낮은 길주 부사에 임명됐다.

참고로 사관 박동량이 남긴 사초(史草) '기재사초'는 정현룡을 이렇게 기록했다. "종성부사 정현룡은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고 학대하면 원수다.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至有撫我則后虐我則讎 何使非臣何事非君)'라는 글을 쓰고 왜군에 항복하려다 글을 집어던지고 도주하였다."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했거늘"

6월 5일 평안도 안주에 도착한 선조가 명나라 장수 유원외를 접견했다. 유원외가 말했다.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었는데 근래에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이다(선조실록)." 해유령전투에서 신각과 함께 싸우다 참살을 목격한 함경 남병사 이혼은 임지로 복귀해 반란군과 전투 도중 전사했다. 역시 해유령 전투에 참전했던 우의정 이양원은 의주에 도착한 선조가 요동으로 넘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8일 동안 단식하다 경기도 이천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함경도를 장악했던 반란군을 토벌하고 일본군을 내쫓은 ‘북관대첩’의 주역, 의병장 정문부의 무덤. 경기도 의정부에 있다.

정문부는 전쟁 후 1624년 역모 혐의로 체포돼 고문 끝에 옥사했다. "벼슬할 생각은 하지 말고, 경상도 진주에 내려가서 숨어 살아라"라고 유언을 남겼다. 1665년 누명이 풀리고 1709년 북관대첩을 기념하는 북관대첩비가 길주에 건립됐다. 비석은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세워뒀다. 2005년 10월 20일 한국으로 반환된 비석은 이듬해 3월 23일 원건립지인 북한 김책시로 돌아갔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과 독립기념관,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정문부 묘소에 복제비가 서 있다. 해유령에는 1977년 전첩기념비와 사당이 섰다. 비석에는 참수된 신각을 추도하고 거짓 보고를 한 김명원을 비난 하는 글이 적혀 있다.

김명원을 탓할 것인가. 자기 몸 보전에 급급했던 최고지도자와 붕괴된 국가 시스템, 전쟁을 대비하지 않은 정부를 탓해야 한다. 스스로 활과 창을 들고 나라를 지키려 한 백성을 무시한 지도부 책임이다. 해유령 전투 승리 열흘 전인 5월 6일 조선 해군이 거제도 옥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의지와 능력과 책임을 갖춘 장수 이순신이 지휘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7/201708170035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