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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2020년 대한민국 쇠망史조선일보 김태훈 논설위원

오완선 2020. 7. 8. 13:49

입력 2020.07.08 03:16

정신 파탄나 멸망한 로마처럼 북한 동요 흥얼거리고 건국 가치 외면하는 대한민국

김태훈 논설위원·출판전문기자

 

제국이 멸망하던 서기 476년, 로마는 평화로웠다. 게르만족 용병 오도아케르가 그해 소년 황제 아우구스툴루스를 조용히 폐위했을 뿐이다. 로마인은 이민족 지배자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4년 뒤 암살당한 율리우스 네포스가 마지막 황제라는 견해도 있다.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던 대제국이 멸망 연도조차 헷갈릴 정도로 흐지부지 소멸했다. 이유가 있다. 로마는 마지막 20년 동안, 황제가 9번 바뀌는 혼란 속에 천천히 죽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명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로마 멸망의 이유로 파탄 난 로마 정신을 꼽았다. 멸망을 설명한 절(節) 이름이 '로마 정신의 쇠락'이다. 이렇게 썼다. '로마인은 자유와 영광에 대한 자긍심을 상실했고, (…)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도아케르와 그 야만족 후계자들의 왕권을 승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이 땅에서도 대한민국의 자유와 영광에 대한 자긍심을 상실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전쟁 7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그 자유를 빼앗으려 한 이들의 국가를 빼다 박은 듯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장군님'이란 표현이 나오는 북한 동요를 흥얼거렸다. 우리가 돈 들여 지은 건물을 북이 '보복'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폭파했는데, 이 나라 통일외교안보특보는 "북한 영토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도발이 아니다"라는 해괴한 주장을 폈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는 민주주의를 '인민'이 지배하는 통치 행태라고 가르친다. '인민'은 '민중'과 함께 계급적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인민에 대한 교과서의 서술은 '민주주의는 국민 모두가 누리는 가치'임을 천명한 대한민국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다. 전북 선거관리위원회가 공식 블로그에 '북한은 민주주의 국가' '우리와 비슷한 (선거) 원칙을 가졌다'는 글을 무려 2년이나 실었다가 최근 지운 사실도 드러났다. 3대 세습을 위한 허울에 불과한 북한 선거를 민주주의로 포장했다. 이런 주장이 세를 얻으면 국민의 지지를 정통성의 근거로 삼는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설 땅을 잃는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국가적 자부심은 허물어지고 있다. 김정은을 '위인'이라 부르는 정신 나간 청년 무리는 이 모든 행태의 산물이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게 아니다.

"한미 연합군의 훈련이 부족하다"고 대북 대비 태세를 걱정한 한미연합사령관의 최근 발언은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조차 최선을 다한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그 반대다. 북한 동요를 부른 송영길 의원은 "주한미군은 한미 동맹 군사력의 오버캐파(overcapacity·과잉) 아닌가"라고 남 걱정해주는 말을 했다. 대통령은 한술 더 떴다. "북한보다 50배 잘사니 남북 체제 경쟁은 끝났다"고 승리를 선언했고, "함께 잘살고자 한다"는 말로 국민의 경계심을 허물었다. 인구 2000만의 대국 로마가 고작 100만명인 게르만족에 무너진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북한은 패배를 인정한 적이 없다. 우리에게 평화를 구걸한 적도 없다. 오히려 위축되고 두려워하는 쪽은 우리다. 대북 전단을 빌미 삼아 공격하겠다는 말 폭탄에도 두려워 떠는 대한민국을 북한은 비웃는다. 민주주의의 기둥인 표현의 자유조차 내동댕이친 우리는 승자가 아니라 패자다.

이 모든 징후가 명백히 드러내는 사실은 단 하나, 대한민국 정신의 쇠락이다. 기번이 되살아나 한반도 역사를 쓴다면 그것은 '대한민국 쇠망사'가 될 게 분명하다. 자유·민주·공화를 내걸었던 건국 정신을 버리고 한낱 저질 왕조의 협박 따위에 굴종한 정신의 쇠퇴가 그 원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07/202007070439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