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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의 아웃룩] 권력이 선거 압승에 취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몰락한다.

오완선 2020. 7. 8. 13:59

입력 2020.07.08 03:12

헝가리·필리핀·터키 등 20세기 末 민주 권력이 민주주의 파괴

전성철 글로벌 스탠다드 연구원 회장

 

'보수'와 '진보'는 '역사라는 수레'의 두 바퀴다. 이 수레가 계속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즉 한 나라 역사가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두 바퀴가 비슷한 크기를 유지해야 한다. 한쪽 바퀴가 너무 쪼그라들면 이 수레는 제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국민으로 하여금 쓰레기통을 뒤져 연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베네수엘라의 저 비참한 운명은 그 나라에서 '보수'라는 바퀴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버린 데서 시작됐다. 반대로 히틀러 독일 역시 '진보'라는 바퀴가 심하게 쪼그라들면서 비극이 싹텄다.

대한민국이 계속 발전하여 이렇게 선진국에 도달하게 된 건 다행히도 이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그런대로 비슷한 크기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총선을 통해 진보가 입법·사법·행정권은 물론 지방 권력까지 다 장악한 '수퍼 권력'이 됐다. 상대적으로 보수는 처참하게 쪼그라들면서 대한민국 역사라는 수레가 과연 어느 쪽으로 갈지 알 수 없는 걱정스러운 상황이 닥쳤다.

베네수엘라 비극, 총선 압승에서 시작

순식간에 이 나라에 닥쳐온 보수와 진보 간의 이 거대한 불균형을 보면 2000년 6월 30일 있었던 베네수엘라 총선이 떠오른다. 이 선거에서 차베스의 좌파 정당은 국회 의석 3분의 2를 장악하는 압승을 거뒀다. 불행히도 이 승리가 이 나라의 파멸적 붕괴를 가져온 도정(道程)의 출발이었다. 한마디로 차베스는 이 승리에서 나온 힘을 민주주의를 파괴해 나가는 데 썼다. 대통령에게 국회의원을 임의로 파면하는 권한을 주는 등 민주주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온갖 희한한 제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이 나라 역사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파멸의 길을 걸었다. 하버드대 레브츠키 교수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에서 이런 식으로 민주주의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쓰인 나라가 20세기 후반에만 해도 10곳이 넘는다고 했다. 헝가리, 니카라과, 페루, 필리핀, 폴란드, 러시아, 스리랑카, 터키,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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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민주국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건 거의 예외 없이 선거에서 압승한 집권자의 오만 때문이다. 승리에 취해 힘을 과신하고 그 과신이 과욕을 낳고, 그 과욕이 만용을 낳는다. 반면 선거에서 압승한 지도자가 오만을 부리지 않고 그 힘을 정의를 수호해 나가는 데 쓸 때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 32대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1932년 대공황에 신음하는 나라를 넘겨받은 진보 진영 루스벨트 대통령은 재임 중 대공황을 사실상 극복했을 뿐 아니라 2차 대전에서도 승기를 잡는 거대한 업적을 이뤘다. 덕분에 미국 역사상 최초로, 유일하게 네 번 연속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런 거대한 승리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민주적 정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권력을 과시하지 않았고 정파를 위해 위법·탈법을 시도하거나 저지르지 않고 비상 권한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항상 민주적 정의 궤도 안에서 절제하며 나라의 먼 미래를 생각하며 일했다. 그런 절제와 겸손이 위대한 민주국가 미국을 탄생시키는 초석이 됐다.

독재 정권, 제일 먼저 검찰권 사유화

거대한 승리를 거둔 지금 대한민국 진보 정권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나라의 미래에 관련된 참으로 중차대한 질문이다. 불행히도 조짐이 심상치 않다. 지금 추미애 법무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대소동은 수많은 국민으로 하여금 정권의 저의를 의심케 하고 있다.

우리 검찰에 오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검찰권이 너무 거대한데 절제되지 않은 채 행사됐다는 점이다. 둘째, 독립성 문제다. 한마디로 정치권에 너무 휘둘린다는 것이다.

추 장관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은 단순하다. 첫째 문제를 해결하고자 둘째 사안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볼 때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일일까? 첫째 문제는 시간을 두고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순차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성질이다. 둘째는 다르다. 국가의 운명이 달린 일이다. 위에서 열거한, 권력으로 자신에게 권력을 준 민주주의를 파괴한 정권 대부분이 제일 먼저 한 짓이 바로 이런 식으로 검찰권을 정치화하는 것이었다.

만일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을 이런 작은 일까지 지휘할 수 있게 된다면, 대한민국 모든 검찰은 한마디로 권력의 주구가 되고 말 것이다. 추 장관 '지휘'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서울시립병원장에게 병원 수술 프로세스를 이런 식으로 고치라고 지시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정권이 범한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그에 대해 사과하고 당사자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면 그는 이 나라에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법치가 영원히 지속될 기반을 쌓은 위대한 지도자로 남게 될 공산이 크다. 실수 없는 인간은 없고 실수 없는 정치인은 더욱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크게 존경받는 건 바로 그가 생명을 바쳐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제 노무현에 이어 문재인 대통 령이 정말 이 나라에 위대한 유산을 남길 차례다. 그 유산이란 이 나라에 정파적 이익을 위해 정의를 희생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위대한 규칙, 모델을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대한민국 역사라는 수레의 두 바퀴에 항구적 균형을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될 것이다. 그동안 지켜본 문재인 대통령이란 사람은 원한다면 그런 용감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08/20200708000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