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上〉 聖 야고보의 무덤 향한 순례자 행렬 삶에 지친 이들에 사색의 공간 순례길 모인 갈리시아의 이색 풍경
《지난 2년간 ‘코로나19’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맞은 새봄. 해외여행의 빗장이 조금씩 풀리면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도 다시 배낭에 조개껍데기를 매단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생겨나고 있다. 하루에 8유로(약 1만 원)면 잘 수 있는 공공 순례객 숙소(알베르게)도 본격적으로 문을 열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한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스페인 관광청 통계에 따르면 2018년 순례길 완주 공식 인증을 받은 사람 중 한국인은 전 세계 9위, 아시아 1위다. 종교적인 이유로 순례하는 사람도 있지만,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로운 삶의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로 삼는 여행자가 많다.》
○ 들꽃이 피어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땡∼땡∼땡∼.’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주 해발 1300m 산속 고갯길. 3월인데도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인 ‘산타마리아 레알 오세브레이로’ 성당의 종소리가 고즈넉하게 울렸다. 담벼락 근처에 심어진 호랑가시나무의 뾰족뾰족한 이파리와 빨간 ‘사랑의 열매’ 위에도 흰눈이 쌓여 크리스마스 엽서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이 성당은 중세시대 사제가 미사를 드리던 도중 성배에 담긴 포도주가 실제 피로 변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 기적의 성배 앞에 한국어로도 비치돼 있는 ‘순례자를 위한 축복 기도’를 읽어본다. 마지막 구절이 특히 마음에 다가온다.
‘행복하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하세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의 포르토마린으로 넘어가는 다리 앞에서 순례객들이 ‘자유의 종’을 치고 있다. 다리 너머로 미뇨 강가 기슭에 있는 포르토마린의 성채 위에 산니콜라스 성당이 보인다.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순례길(카미노)은 전 유럽에서 출발한다. 프랑스, 포르투갈, 영국 등 다양한 지점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이베리아반도 서쪽 끝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를 향해 부채꼴 모양으로 걸어오는 지도는 조개 무늬를 닮았다.
총연장 800km나 되는 프랑스길은 가장 인기가 높은 순례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연간 30만여 명의 순례객 중 60%가량이 프랑스길을 걷는다. 프랑스 생장드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오는 길이다. 그러나 순례길은 100km 이상만 도보로 걷거나, 200km 이상을 자전거로 완주하면 순례 인정증을 주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1주일∼열흘 정도 코스를 걷기도 한다.
순례길 여행자들을 보호하는 돌십자가 ‘크루세이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산과 들, 바다 등 워낙 다양한 지역을 지나가기 때문에 흰눈부터 소나기까지 사계절 날씨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 요즘 길가에는 봄꽃이 한창이다. 카미노 주변에는 개나리꽃처럼 노란 ‘또쇼(Toxo·톡소)’와 솜털처럼 동글동글한 ‘미모사’가 숲을 이루고 있다. 수선화는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자목련, 백합, 철쭉까지 순서 없이 피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동백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모여드는 갈리시아 지방은 요즘 그야말로 ‘동백꽃 필 무렵’이다. 동백나무가 아예 가로수처럼 심어져 있을 정도다. 동백꽃은 18세기 말 일본과 중국에서 포르투갈 선원이 이베리아반도로 들여왔다고 한다. 폰테베드라에 있는 중세시대 귀족의 대저택인 ‘파소 데 루비아네스(Paso de Rubianes)’의 정원에는 유칼립투스 나무와 8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곳에서 만난 아일랜드 여행객은 “갈리시아 북부 코루냐에서 남부 폰테베드라까지 관통하는 12개의 동백꽃 정원을 찾아가는 ‘카멜리아 루트(Camelia Route)’ 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문 여는 알베르게
몬테 도 고소(Monte do Gozo)’에 세워진 순례자 동상.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의 첨탑과 종탑의 실루엣을 볼 수 있어 ‘기쁨의 언덕’이라고 불린다.
콤포스텔라는 ‘별빛(Stella)이 비추는 들판(Campos)’이라는 뜻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참수당했던 순교자 야고보의 주검은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의 해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잊혀져 있던 무덤은 서기 813년경 별빛이 비춰 사람들에게 다시 발견됐다고 한다. 요즘에도 밤하늘에 선명하게 빛나는 은하수는 순례자들의 여정과 함께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를 비롯해 수많은 현대의 산티아고 순례길 답사기는 종교와 관계없이 사색과 명상의 길로 유명하게 했다. 스페인 관광청 통계에 따르면 순례객 중 1위는 회사원(25.85%), 2위는 학생(17.92%), 3위는 퇴직자(13.06%)였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 3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모든 공립 순례객 숙소(알베르게)가 폐쇄됐었다. 10일 찾아간 레돈델라의 알베르게는 코로나 이전에는 4∼9월 모든 침대가 꽉 찼던 유명한 숙소. 올해 1월부터 스페인의 모든 ‘거리제한’ 규제가 풀렸지만 42명 정원 중 하루 손님은 5∼10명에 불과하다. 이 숙소의 호스피탈레라(관리인)인 소니아 씨는 “각국에서 여행 규제가 풀리면서 다음 달 부활절 휴가 이후부터는 예년처럼 정상화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갈리시아의 독특한 풍경
산티아고 대성당 앞 ‘로스 레예스 카톨리코스 호스텔’. 중세시대 순례자 병원을 개조한 5성급 국영 파라도르 호텔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산과 들판, 강과 바다를 끝없이 지나간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독특한 상징물은 갈리시아 지방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먼저 성당이나 교차로, 다리 앞에 서 있는 돌로 만든 십자가 ‘크루세이로(Cruseiro)’다. 갈리시아 전역에만 1만2000여 개나 세워져 있는 크루세이로는 여행자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시골 마을 집 앞마다 세워져 있는 십자가가 달린 자그마한 창고도 이 지역의 명물이다. 옥수수나 감자 등을 저장하는 창고인 ‘오레오(Horreo)’다.
순례길에서는 푸른색 바탕에 노란색 가리비 조개껍데기와 화살표가 길을 알려준다. 야고보의 유해가 스페인 해안에 도착했을 때 조개껍데기에 싸여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순례길 가이드 세르히오 씨는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에서 비너스가 조개 위에서 태어난 것처럼, 조개는 새로운 탄생과 부활을 뜻한다”며 “조개껍데기는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순례자를 상징하는 알레고리”라고 설명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도착해 기쁨을 나누고 있는 순례자들.
프랑스길 사모스의 베네딕트 수도원 인근에는 순례자의 발을 치유해 주는 사이프러스 나무(높이 27m)가 자라고 있다. 수령 500년가량 된 이 나무는 두 사람이 마주 안아야 할 정도로 굵직했다. 안내문에는 “순례자가 이 나무를 안고 가면,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발이 아프지 않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곳에서 만난 파트리크 씨(32·독일)는 2월 11일에 출발해서 3월 8일까지 약 620km를 걸어 왔다고 한다. 하루 25∼30km씩 걸은 셈이다. 레스토랑 셰프로 일하고 있는 그는 “지난 2년간 코로나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는데, 길을 걸으며 내가 진정 원하는 삶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었다”고 말했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에는 도착한 순례자들로 북적인다. 자전거를 타고 온 순례자, 조개껍데기 목걸이를 건 반려견과 함께 걸어온 사람도 보였다. 대성당 지하에 있는 사도 야고보의 무덤과 제대 앞에 매달려 있는 무게 60kg, 높이 1.6m에 이르는 대향로는 산티아고 대성당의 상징이다.
산티아고길 순례자는 여권인 ‘크레덴시알 데 페레그리노(Credencial de Peregrino)’를 발급받아야 한다. 숙소는 저렴한 알베르게가 있지만, 곳곳에 호텔도 많다. 특히 성당, 수도원, 왕궁, 성채 등 역사적 유적지를 활용한 국영 ‘파라도르 호텔’은 멋진 뷰와 럭셔리한 시설, 미식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