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소바냉면을 아시나요?

오완선 2012. 5. 7. 17:31

서울 성북구 길음동 '미스터 냉면'

음식의 계보와 정체성을 밝히고 개별 음식간의 연관관계, 발전해온 내력 등을 복원하는 일은 학자와 전문가의 몫이다. 그러나 기존 음식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내고 음식문화를 창조해내는 것은 외식업 종사자의 중요한 직무다. 문화는 서로 이질적인 요소가 대립하기도 하고 결합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발전하게 마련이다. 음식문화도 마찬가지. 웰빙 트렌드에 따라 요즘에는 메밀이 외식업계의 열쇠말로 떠올랐다. 한국을 대표하는 메밀 면인 냉면, 일본을 대표하는 메밀 면인 소바, 양국의 메밀국수 문화를 대표하는 냉면과 소바가 행복하게 만났다. 그 이름은 바로 소바냉면. 

최고 냉면을 향한 어느 마도로스의 꿈

소바냉면(5500원)을 선보인 곳은 서울 길음동의 '미스터 냉면'이다. 이 집 주인장 고석환 사장은 강원도 주문진이 고향으로 원래 배를 타던 항해사였다. 그러나 뱃일보다는 음식조리에 더 마음이 끌렸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결국 배에서 내려 요리를 배워 스물다섯에 처음 일식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을 시작으로 중식과 한식까지 배운 뒤 청운의 뜻을 품고 부산을 거쳐 서울로 진출했다. 서울 길음동에 세 평 남짓한 가게를 얻어 만두를 팔았지만 포부만큼은 대양보다 넓었다.

만두 맛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만두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상승세를 타고 작년에 맞은편인 지금의 자리에 새 터를 잡고 만두 외에 냉면까지 취급했다. 새로 시작한 냉면도 인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여름철 메뉴라는 계절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꾸준히 냉면 품질을 높였는데 고객이 알아주지 않는 건 참 억울했다.

주인장 고씨는 건강에 이롭고 사계절 어느 때 먹어도 좋으면서 기존 냉면과 차별화한 냉면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평생을 주방에서 보낸 그였지만 냉면 개발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식 좀 한다는 대부분의 조리사들도 냉면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데 고씨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막상 진전이 되지 않아 답답해하던 차에 지인으로부터 훌륭한 면식 고수가 있다는 얘길 들었다. 고씨는 그 전문가에게 찾아가 새로운 냉면 개발을 부탁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당당한 메밀 함량 25%, 시중 냉면에 맞짱 제안

이 집 주인장에게 새로운 냉면 개발을 의뢰받은 사람은 면식 전문가 정정옥(77) 씨다. 고씨는 냉면 개발자 수소문을 위해 여러 기항지를 거친 끝에 정정옥 씨를 최종 목적지로 삼고 닻을 내렸다. 그는 일본 유수의 제면업체, 소스업체들과 다년간 교류해오면서 평생 면류의 생산과 유통에 종사해온 정통 면식 전문가였다.

몇 차례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고씨의 끈질긴 노력에 정정옥 씨도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젊은 사람의 진정성이 노대가의 마음을 움직인 것. 고씨가 삼고초려 끝에 배운 것이 바로 소바냉면이다.

확실히 요즘에는 메밀이 대세다. 루틴을 많이 함유한 메밀은 성인병 예방에 효능이 있고 다이어트 먹을거리로도 딱 좋다. 메밀을 찾는 고객이 늘면서 시중 냉면이나 소바 집들이 메밀 함량이 높음을 강조한다. 심지어 메밀 100%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먹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아무래도 업소 측에서 말하는 메밀 함량을 전적으로 믿기 어렵다. 심한 경우, 체감 메밀 함량이 한 자리 숫자인 메밀면도 수두룩하다.

이 집의 소바냉면은 메밀 함량이 25%임을 당당히 밝힌다. 고씨는 메밀 함량 70~80%씩 된다는 시중의 냉면과 맞짱뜨고 싶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비록 25%의 메밀 함량임에도 메밀의 구수한 향과 생면으로 제면한 면발의 촉감은 오히려 다른 시중 면을 압도한다.

소바와 냉면 맛 조화 절묘, 새로운 100년 이어갈 차세대 주자

육수는 다시마, 간장, 가츠오부시, 사바부시 등을 넣고 뽑아 시원하고 깔끔한 뒷맛이 나는데 묘한 중독성이 있다. 조미육수를 사용한 시중의 냉면 육수에 비해 천연 식재료만을 사용, 웰빙 콘셉트에 충실했다는 점도 높이 살만하다. 얼핏 화풍(和風)의 맛이 감지된다. 한국의 냉면과 일본 소바의 맛을 절묘하게 조합한 맛이다. 소바 쯔유의 강한 맛을 싫어하는 사람이나 냉면의 밋밋한 맛이 싫은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매력을 발산한다. 역시 기존의 소바나 냉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특히 여성들이 더 좋아할 맛이다.

메뉴는 소바냉면 단품(5500원)과 소바냉면에 큼지막한 왕새우 만두 두 개가 나오는 소바냉면 정식(7000원)이 있다. 새우살과 두부, 부추, 느타리 등이 들어간 실팍한 왕새우 만두를 먹고 소바냉면을 먹으면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될 뿐 아니라 맛도 서로 잘 어울린다. 

기존 평양냉면은 정말 훌륭한 음식이다. 그러나 평양냉면과 친해지고 싶어도 평양냉면 육수의 담담함, 그 깊은 무심함과 사귀기가 쉽지 않다. 평양냉면 마니아 가운데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의외로 아주 많다. 제대로 된 냉면이 먹고 싶은데 평양냉면이 너무 먼 곳에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소바냉면은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근대 상업 냉면 100년사에 소바냉면의 등장은 새로운 ‘냉면문화 2.0’ 시대를 열어갈 신호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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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제공 : 월간외식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