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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향? 우산동천 띠집 앞에서 묻다

오완선 2015. 4. 22. 21:47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권력의 억압도 없고, 전쟁도 없으며, 욕망의 혼란도 없고, 가난의 남루도 없는 그런 곳. 조선시대 영남학파 예론의 총수 우복 정경세가 상주 우산리 서쪽 계곡을 동천으로 삼은 이유도 그와 같을 것이다

우복은 우산동천을 경영하던 초기 유지들과 이런 뜻을 모았다. “유마힐은 벼슬하지도 않았지만 이웃의 병을 제 병처럼 보았다. 사람에게 은택을 베풀고자 하는 우리가 어찌 동포의 구제를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때 세운 것이 무료진료소인 존애원이었다

경상북도 산간엔 여전히 목련 꽃 하얗고, 산수유 노랄 때였다. 산엔 진달래 들엔 개나리, 화사할 때였다. 마침 산 뻐꾸기 목청을 가다듬고, 보리밭엔 종달새 하늘로 치솟기도 했다. 그러나 대처에선 여전히 권력의 음모가 만개하고,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피눈물이 꽃잎처럼 떨어질 때였다. 마침 음모에 걸려 추락한 이의 저주가 권력의 썩은 속살을 뒤집고, 시민의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러한 때 벗들과 대처를 벗어나 경상도 멀리 동천을 찾아 나섰다.

동천의 존재조차 모를 때, 오히려 그보다 더 선하고 진실한 세상을 꿈꾸며 거리에 나섰던 이들이었지만,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벗들이여. 그러나 동천행은 가슴속에 접어두었던 꿈의 조각들을 하나씩 되살리는 행로였으니, 자책 속에서도 위로가 적지 않았다. 마침 성리학과 종교, 예학과 예술론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김봉렬 교수(한예종 총장)가 길잡이를 했으니, 비록 눈 어둡고 귀 멀지만 옛사람의 이상이 성큼 곁으로 다가왔다.

상주 우산리 우산동천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살짝 기운 청자매병에서 향기로운 술이 흘러나오는 형국이었다. 속리산에서 발원해 내서를 거쳐 들어온 이안천은 산과 산 사이에 항아리처럼 들어앉은 들판에 옥빛 계류로 늙은 매화 한 그루 치고 있었다. 산과 산이 다시 마주칠 듯 다가서 병목을 이루었고, 그곳의 낮은 보를 넘는 물줄기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떨어지고 있었다.

옛사람의 동천은 아홉 혹은 일곱 굽이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이르는 석문 너머에 있다고 했다. 입구는 당연히 숨겨져 있어야 하나, 우산동천은 무문관처럼 누구나 찾아들 수 있었다. 위로는 성주봉과 남산 자락, 아래로는 노악산 채룡산 자락이 감싼 들은 한 마을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했다.

<택리지>의 이중환은 정자를 세울 만한 곳으로 ‘계거’(溪居)를 꼽았다.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함없는 바위가 우뚝하고, 늘 푸른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시내 건너편으로 너른 들이 보이는 곳이었다. 권력의 억압도 없고, 전쟁도 없으며, 욕망의 혼란도 없고, 가난의 남루도 없는 그런 곳. 조선시대 영남학파 예론의 총수 우복 정경세(1563~1633년)가 우산리 서쪽 계곡을 동천으로 삼은 이유도 그와 같을 것이다. “바위와 골짜기가 기이하며, 시내와 소가 깨끗하고 맑은 것이 매우 좋았다.”(신도비문)

그러나 품은 이상이 없는 이에게 동천은 좀체 저를 드러내지 않는 법. 서울 시내에 백석동천이 있고, 강화도에 함허동천이 있고, 무수한 이들이 지리산의 화개동천과 청학동, 보길도의 동천석실 등을 찾지만, 그 포부와 이상을 알려는 이 드물다. 그런 구곡동천이 150여개나 되고, 2012년 퇴계연구소가 고증을 통해 43개소를 확인했다지만, 동천은 그저 승지이거나 은처로만 간주됐다.

동천의 뿌리는 도교. 장생불사를 꿈꾸던 이들은 온갖 비방으로 살아서 신선의 경지에 오르려 했다. 수행 수준에 따라 상자 중자 하자가 있는데, 그들이 추구하던 것은 육신을 가진 신선을 뜻하는 중자 혹은 지선. 그들의 거처가 바로 36동천과 76복지다. 유가는 그런 동천 복지에 저들의 이상을 심었다. 공자는 지자요수, 현자요산이라 군자가 추구해야 할 덕을 산수에서 찾았다. 윤리와 처세에 치우친 유학에 존재의 실상과 생사의 원리를 보강해 철학 체계로 정비한 성리학은 아름다운 산수를 천인합일의 모범이자 이상향으로 삼았다. 자연은 욕망이 사라진 청정한 도덕, 시비의 소란에서 벗어난 적정 고요, 조화와 합일 그리고 우주적 순리 그 자체였다. 성리학의 종조 주자의 무이구곡 이외에 도연명의 무릉도원, 왕유의 망천, 소동파의 적벽 등이 그런 곳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현실에서 거부당한 이상세계를 그 동천에서 구현하려 했다.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가 불온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유토피아는 언제나 혁명의 태반.

그런 이상세계를 꿈꿨으니 정경세의 정치 역정이 평온할 리 없다. 24살에 벼슬에 올랐지만 2년 만에 서인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연출하고 그를 연루시켜 쫓아냈다. 임진란 중 다시 부름을 받아 이조 정랑, 동부승지에 올랐지만, 1600년 스승인 서애 유성룡이 서인의 모함으로 쫓겨나자 낙향해 버렸다. 1607년 다시 올라왔지만, 2년 뒤 정인홍 일당의 공격으로 체포되고 1612년 김직재 옥사 때 다시 체포됐다. 1615년엔 심경 등의 모함으로 2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다.

두번째로 낙향했던 38살 때 우복은 우산리에 띠집을 짓고 우산동천을 경영하며 저의 이상향을 세우려 했다. 서애의 수제자요, 약관에 급제하여 입신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모친과 동생을 여의었으니, 향리에선 이미 존모의 대상이었다.

우산교를 건너면 동천이다. 낮은 언덕 위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손바닥만 한 띠집이 시내 건너 들, 들 너머 산을 마주보고 있다. 방 1칸과 마루 1칸이 고작이다. 남쪽 벽에 쌍영창을 단 걸 보면 단지 가난 때문에 그리한 것은 아니었다. 기둥은 기와지붕도 너끈히 일 만큼 튼실했다. 건축은 곧 주인의 인품이자 철학이라던가, 띠집엔 그의 꿈이 응축돼 있다.

우복은 이미 회재 이언적의 독락당 계정을 방문한 뒤 이런 시를 남겼다. “계곡물은 맑아 거울과 같고/ 띠집은 좁아 배와 같다네/ 큰 벼슬의 꿈을 비껴 돌아서니/ 소승의 선(깨달음)을 이루었네/ …사립문은 하루종일 닫혀 있고/ 외롭게 앉으니 마음은 평온하네.” 처음 물소리 듣는 곳(청간정)이라 했던 당호를 ‘계정’으로 바꾼 까닭을 알 만하다.

계정은 우복의 사적 공간이었다. 제자들을 가르치던 공적 공간은 7대손 입재 정종로가 지었다는 대산루 터에 있었다. 사람들은 우산동천 하면, 대산루를 떠올린다. 한옥으로선 이례적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ㅡ형 1층 건물과 정면 2칸 측면 5칸의 ㅣ형 2층 누각이 결합해 T자형을 이루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우복의 구상 속에서 그런 특별한 양식의 건축물은 어울리지 않는다. 계정이 그러한 것처럼, 우복에게 중요한 것은 인위적 요소가 자연 속에 고스란히 녹아드는 것이었다. 종교화된 예론의 독선에서 한 발 물러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홍문관 부제학 시절 우복은 충청도 연산으로 사계 김장생을 찾아갔다. 사계는 기호학파 주기론적 예론의 총수였으며, 당파로는 송시열, 송준길 등의 스승으로서 서인의 큰 어른이었다. 그가 평생 존모하던 서애를 모함하여 삭출한 당파의 뿌리와 같은 인물이었으니 그 의지가 담대했다.

“대감, 제자 중에서 사위를 고르려 합니다.” “학당에 가서 직접 고르시구려.”

우복은 대뜸 학당의 문을 열어젖혔다. 송시열은 그 자세 그대로 책을 읽고 있었고, 이유태는 벌떡 일어나 큰절을 했고, 송준길은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다시 책을 잡았다. “송시열은 너무 과하고, 이유태는 너무 급하다.” 그의 안목대로 송준길은 훗날 기호학파 예학의 종장으로 추앙받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중용의 자세를 취하려 했다. 동서의 예학이 소통하도록 노력했고, 당쟁에서도 극단의 대립과 처형을 반대했다.

계정에서 100보쯤 올라가면 솔밭이요, 오른쪽 계곡 끝엔 우산서원이, 왼편 둔덕에는 종택이 있다. 종택 역시 과하지도 급하지도 않았다. 튼 ㅁ자의 사랑채와 안채는 여느 사대부가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빠른 경사지에 단을 쌓고 집을 올려 위엄과 기개를 엄하게 했다. 사랑채 당호는 산수헌. 계정, 대산루, 산수헌 모두 동쪽의 물과 산을 대하고 있다.

우복은 우산동천을 경영하던 초기 유지들과 이런 뜻을 모았다. “유마힐은 벼슬하지도 않았지만 이웃의 병을 제 병처럼 보았다. 사람에게 은택을 베풀고자 하는 우리가 어찌 동포의 구제를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때 세운 것이 무료진료소인 존애원이었다. 그에게 산수는 도덕 자체였다.

곽병찬 대기자
제자 증석은 공자에게 이런 꿈을 말했다. “벗들과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고 싶다.” 벗들과 동천의 이상을 담아 돌아오는 길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