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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유기농..

오완선 2015. 4. 8. 16:48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귀농 전부터 이런 꿈을 꿨다. 동창을 밝히는 미명과 함께 잠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햇살이 장독대에서 반짝이고 새들이 지저귈 때쯤 우물가에서 찬물 한그릇 마시고 장독대 너머 문전옥답으로 나가는 것이다. 부부는 지난해 봄 변산면 지동리로 이사 왔다.

100만원으로 살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들의 꿈은 소박하다. 부부라면 50만원으로 되지만, 아이들 때문에 100만원이라고 한다. 이들은 한 농가가 도시 소비자 열가구의 먹거리를 책임지면 사람도 사회도 세상도 바뀌리라고 믿는다.

장은 달래장이다. 무 다시마 멸치로 우려낸 육수를 집 간장에 섞어 한번 다시 끓여 식힌 맛간장에 파랗게 싹이 오른 달래를 종종 썰어 넣었다. 엊그제 빚어 들기름으로 부친 두부에 찍거나 순두부에 얹어 입에 넣으니, 지난가을의 보람과 새봄의 기대로 입안이 미어진다. 더덕 회는 사래 긴 이랑에 심고 남은 종근 가운데 큰 것만 골랐다. 고추장과 매실 효소만 얹어 무쳤다. 더덕 본래의 맛과 향기가 알싸하다.

밭에서 갓 솎은 마늘은 뿌리부터 잎까지 성큼성큼 썰어 냈다. 된장을 찍어 아삭 씹으니 겨울을 이겨낸 강인함이 몸에 퍼진다. 월동 배추로는 겉절이를 했다. 액젓과 생강즙 매실효소 고춧가루로 버무렸다. 액젓은 변산공동체 출신. 샐러드는 양배추 브로콜리 등 생야채에 콩마요네즈를 얹었다. 달걀 대신 콩물에 두부, 유자청을 넣어 만든 채식마요네즈다. 고소함은 그대로이고 담백함은 덤이다. 뽕잎 장아찌는 이웃집 해민네가 야생 뽕잎을 간장에 삭혔다. 콩나물은 집에서 길러 무쳤고, 김장 김치는 젓갈을 쓰지 않아 담백한 맛이 영락없는 사찰 김치다.

아무리 성찬이어도, 밥상의 기품은 밥이 결정하는 법. 쌀 통밀 보리 수수 흑미가 어울린 오곡밥이다. 작고 실한 알갱이들이 입안에서 저마다 다른 맛과 식감을 자랑한다. 흑미는 향기롭고, 보리는 구수하고, 통밀과 수수는 고소하면서도 단맛이 난다. 화이부동이다. 송편 속의 콩이나 깨, 시루떡 속의 팥고물처럼 서로 다르지만 하나로 어울려 새 맛을 낸다. 쌀은 직접 재배했고, 보리 수수 통밀은 변산공동체 것이고, 흑미만 시장에서 사왔다.

상이 문턱을 넘을 때부터 코끝에 삼삼했던 게 있었다. 쑥향이다. 된장과 어울리는 것이 깊은 울림의 첼로와 높은 떨림의 바이올린 같다. 밥을 안치고, 무칠 것 무친 뒤 밭두렁에 나가 따온 것들이다. 차진 오곡밥 한 숟가락에, 염치없이 달래만 거른 장을 얹어 오물조물 씹다가 입안에 단맛이 돌 때쯤, 참쑥된장국 두어 숟가락 입에 넣는다. 새봄이 온전히 내 안으로 들어온다.

불쑥 찾은 객에게 밥상을 내온 이현숙-신보현 부부는 귀농 전부터 이런 꿈을 꿨다. 동창을 밝히는 미명과 함께 잠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햇살이 장독대에서 반짝이고 주변의 매화 대추 앵두나무에 새들이 지저귈 때쯤 우물가에서 찬물 한그릇 마시고 장독대 너머 문전옥답으로 나가는 것이다. 부부는 지난해 봄 변산면 지동리로 이사 왔다. 딸과 아들이 다니는 변산공동체학교 이웃마을이다. 공동체의 도움으로 농가와 밭을 빌려, 동창이 밝으면 일어나고, 문전옥답에서 농사짓고, 남창에 달 뜨면 저절로 잠들었다. 너무 빨리 꿈을 이룬 건가? 걱정되기도 했다.

봄은 이미 부부의 밭에서 몸을 풀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엔 매화가 활짝 폈고, 볕 잘 드는 장독대 주변엔 상사화가 이파리를 다 냈고, 수선화는 꽃대를 올렸으며, 튤립 이파리가 꼿꼿하다. 화초들 사이엔 혼자 핀 큰개불알꽃이 융단을 깔았고, 냉이나 광대나물도 깨알 꽃들을 터트렸다. 방풍나물은 파마머리처럼 둥글게 퍼졌고, 포도나무 줄기나 블루베리 블랙베리 가지는 촉촉했다. 장독대는 둘레에 핀 매화 향기로 장이 익겠다. 뒤란엔 50년 된 살구나무에 꽃망울이 다닥다닥 붙었다. 매향이 스러질 때쯤 싱그러운 살구향이 이어질 것이다. 지난여름, 하루에 한 바구니씩 살구를 내준 나무다. 그것으로 만든 잼과 발효음료는 부부에게 한달 반치 생활비(170만원)를 가져다줬다. 효자다.

살구나무 밑엔 부추밭. 손바닥만 한데 지난해 봄부터 가을까지 현숙씨네 꾸러미에 담고도 남았다. 둔덕 위 비닐하우스엔 쌈채 모종들이 한창이고, 지난해 심어 한차례 수확한 이탈리아 파슬리, 브로콜리, 양배추가 시퍼렇게 새잎과 꽃을 올렸다. 비닐온실 아래엔, 아득하게 이랑이 이어진다. 이미 감자 네 이랑, 더덕 한 이랑 심었다. 그 아래엔 벌써 난대성 마늘이 열병하듯 서 있고, 한뼘쯤 싹을 올린 육쪽마늘 이랑이 나란히 겨룬다. 옆 이랑에선 지난해 뿌린 시금치와 월동 파, 봄동이 신록을 경쟁한다.

지난해 참깨 들깨 콩을 했던 이랑은 갈아만 놓았다. 창고 옆 밭 한쪽엔 작은 동산을 이룬 것이 있다. 농사와 살림에서 나온 갖가지 부산물에 화장실에서 받은 것들을 섞어 숙성시키는 퇴비다. 화장실은 맨땅에 벽돌을 놓고 올라앉을 수 있도록 한 게 고작이다. 볼일 본 뒤 왕겨를 뿌려 고무통에 넣어두도록 되어 있다. 오줌통은 따로 뒀다. 뒷일만큼은 가급적 집에서 본다는 게 이 가족의 드문 규칙.

창고 뒤는 함께 꾸러미를 하는 신혜경씨가 일구는 밭이다. 아래쪽 두 이랑을 현숙씨네가 짓는데, 달래가 바글거린다. 혜경씨는 지난해 옥수수도 심고 콩도 심고 잎채소도 심었다는 데, 올해는 옥수수 사이에 동부를 심을까 한다. 옥수숫대를 타고 동부가 다닥다닥 피울 보라색 꽃으로 단장한 옥수수라니…, 수줍음 많은 혜경씨가 살짝 웃는다.

밥상은 남편 보연씨가 차렸다. 현숙씨와 변산공동체로 마실 갔다 오는 사이 마련한 봄의 성찬이었다. 그러나 그건 맛보기였다. 현숙·보연 부부, 전명숙·정경식 부부, 양창인·김금란 부부, 신혜경씨 그리고 변산공동체는 4월부터 변산유기농꾸러미(연락처 010-3407-5659)를 시작한다. 꾸러미엔 보연씨 밥상보다 훨씬 더 많은 계절의 성찬이 담긴다. 제각각 색깔과 맛이 다른 다섯 농가의 삶과 그 이력, 변산의 해와 비와 바람이 가꾼 것들이다.

양념류, 쌈채류, 과일류, 장류, 기름류, 콩 가공품, 곡류, 액젓과 젓갈류, 잡곡과 밀가루, 묵나물류, 산야초와 각종 발효음료, 달걀, 케첩 등 어림잡아 200종은 된다고 한다. 계절별로 적으면 20여종 많으면 30여종까지 담긴다. 4월 첫 꾸러미는 쑥, 광대나물, 큰개불알꽃, 꽃다지, 달래, 냉이가 포함될 것이니, 새봄의 화관이 될 것이다.

변산공동체는 유기농 농사를 윤구병 선생이 1995년 충북대 교수(철학)를 그만두고 시작한 것이니 올해로 20년째다. 열댓명의 공동체 식구들이 논과 밭 1만8000여평을 함께 경작하고 함께 나눈다. 곡류, 발효 식품, 효소, 조청, 달걀 등을 생산하고 판매한다. 그것으로 공동체 경비로도 쓰고, 스무명 가까운 중고등생을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는 공동체학교까지 운영한다. ‘꾸러미’에 내는 젓갈과 액젓은 앞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항아리에 담아 3년 꼬박 숙성시킨다. 1~2년 만에 숙성시키는 여느 것과 달리 인공조미료를 쓰지 않아도 단맛이 깊다. ‘꾸러미’에는 젓갈 이외에 달걀, 곡류, 장류 등을 낸다.

풀무원공동체에서 만난 전명숙·정경식 부부는 대한민국 유기농 1세대다. 윤 선생보다 10년 일찍 변산에 터를 잡았다. 경식씨가 농가를 조직하고, 전주의 소비자와 연결해 직거래를 트고, 농민운동에도 앞장서는 동안 명숙씨는 밭 2000평을 일구며 아이들을 길렀다. 변산의 유기농 생산자 모임인 한울공동체를 결성하고, 전주 한울생활협동조합 결성의 촉매가 됐다. 부부는 미나리, 토마토, 단호박, 참중나무순, 콩나물과 뽕, 매실, 백야초 발효음료를 낸다.

변산공동체에서 만나 결혼한 양창인·김금란 가족은 산야초 전문가. 온갖 산야초를 생으로 내거나 장아찌로 가공해 제공한다. 둘은 지리산에 들어가 3년 가까이 산야초 속에서 살다가 다시 돌아왔다. 대학 졸업 후 바로 변산공동체에서 살다가 7~8년 전 독립한 신혜경씨는 쌈채류를 재배하고 제공한다. 같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이현숙·신보연 부부는 노동운동 중 반려가 되었다. 1998년 파주로 귀농했다가 지난해 변산으로 왔다. 이곳에 10개월 가까이 혼자서 꾸러미를 해왔다.

 
100만원으로 살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들의 꿈은 소박하다. 부부라면 50만원으로 되지만, 아이들 때문에 100만원이라고 한다. 이들은 한 농가가 도시 소비자 열가구의 먹거리를 책임지면 사람도 사회도 세상도 바뀌리라고 믿는다. 가난하다. 그러나 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 가난이다. 아니 부럽기만 한 가난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