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의 땅끝 해남에 홀로 솟은 달마산. 그 산의 바위 사이에 숨어 있는 도솔암에선 하늘과 바다, 산과 바람 모두를 한 번에 눈에 담을 수 있다.
강호(江湖)의 고수(高手)들을 찾아 가르침을 청했다. 세상을 뒤엎을 무공이 아니라, 내 눈을 뒤집어놓을 절경을 알려달라고 했다. 이 고수들을 속세에선 '로케이션 매니저(location manager)'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영화·드라마·CF 등 카메라에 멋지게 담길 장소만을 전문적으로 찾아다니는 이들이다. 사람들 눈을 피해 꼭꼭 숨은 한국의 비경(秘境)만을 찾아 전국을 떠돈 지 10년이 넘는 고수 3명이 자신의 비급(秘�) 중 일부를 살짝 귀띔해줬다. 비급에 담긴 절세의 무공, 아니 절세의 풍경 세 곳을 다녀왔다. 그저 멋진 장소가 아니라, 나름의 서정(抒情)까지 담고 있는 곳이었다.
◇전남 해남 달마산 도솔암
바람 소리 한 점 들리지 않는 고요한 산속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목탁 소리가 마음속 문을 두드리듯 다가왔다. 무릉도원에 온 것인지 착각마저 든다. 소리를 쫓아 걷는다.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릴 무렵, 바위 사이에 사람 대하는 것이 수줍은 고양이처럼 빼꼼히 고개 내민 암자가 보인다.
도솔암이다. 달마산 도솔봉에 자리 잡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통일신라시대 말 화엄조사 의상대사가 창건한 곳으로 알려졌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신라의 고승이 굳이 반도의 땅끝에 솟은 산 속에서도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암자를 지은 이유는 직접 이곳에 와봐야만 이해할 수 있다. 암자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하늘과 딱 붙어 있는 남쪽 바다가 한눈에 성큼 들어온다. 고개만 살짝 돌리면 제멋대로 생긴 것 같지만 뜯어보면 하나하나 매력 있는 미남자 같은 암릉들이 객(客)의 눈길을 붙잡으려고 경쟁하듯 하늘로 뻗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도솔암 주지 법조 스님도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눈살 찌푸리는 법 없이 웃는 낯으로 맞아준다. 봄철이면 암자 주위에 피는 철쭉꽃은 이 비경의 화룡점정이다. 전설의 중국 선승인 달마의 이름이 이 산에 붙은 것도 이런 풍경 덕분이리라.
드라마 '추노'에서 조선 최고의 무장이었다가 노비 신세가 된 송태하(오지호)가 가장 먼저 도망간 곳으로 나오는 곳이 도솔암이다. 드라마 속 인물이라도, 그가 여기로 도피해 온 절박한 심정이 짐작된다. 삶이 순식간에 추락하는 비극을 겪더라도, 이곳에 앉아 하늘과 바다와 산과 암자를 보고 있으면 모든 고뇌도 잠시 잊힐 것이다. 수다쟁이 작가 알랭 드 보통이 한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깎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부드럽게 우리를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여행의 기술') 이 숭고한 암자와 우리의 삶은 모두 같은 힘들이 낳은 형제인 셈이다.
- 전북 임실의 옥정호(玉井湖)는 옥빛 우물이란 뜻의 이름처럼 고운 빛을 낸다. 호수 가운데 있는 섬은 입벌린 붕어를 닮아 붕어섬이라 불린다. /김태영 로케이션매니저협회장 제공
◇전북 임실 옥정호 양요정
소설가 김승옥은 그의 걸작 ‘무진기행’에서 안개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에 대한 은유로 등장시켰지만, 자연의 안개는 본디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새벽에 들어오는 빛을 머금은 안개는 그 자체로 신비다. 가을부터 늦봄까지 전북 임실의 옥정호는 새벽이면 운무(雲霧)를 토해낸다. 옥정호의 안개는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욕망에 젖은 무진의 안개와 다르다. 보는 이를 부드럽게 감싸고 “괜찮다, 괜찮다”고 다독이는 것만 같다.
이곳에 유독 안개가 잦은 이유는 임실이 전북에서 가장 깊은 내륙에 속한 까닭이다. 땅은 쉽게 식고 쉽게 데워져서 임실의 일교차는 늘 크다. 옥정호의 물은 이 온도 차를 견뎌내지 못한다. 새벽녘 급격히 식은 지상의 공기가 아직 따뜻한 물과 닿을 때, 그 사이 습도 높은 공기가 수증기를 내뱉는다. 그게 안개가 된다.
일교차가 커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철이면 호수 옆 국사봉(해발 475m)에는 사진 좀 찍는다는 이들이 몰려든다. 푸른 빛과 흰 물안개가 어우러져 호수를 배경으로 춤을 추는 광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하지만 안개는 반드시 멀찍이 위에서 내려다볼 것만은 아니다. 옥정호 중간 비죽이 튀어나온 입석리 마을에 있는 양요정(兩樂亭)이야말로 옥정호의 안개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성균진사 최응숙이 낙향해 지은 정자다. 양요는 최응숙의 호이기도 한데, ‘논어’의 ‘옹야’ 편에 있는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에서 따온 것이다. 산과 물이 만나는 곳에 안개가 생기기 마련이니, 결국 인자하고 지혜로운 이는 안개마저 사랑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 새벽이면 안개로 가득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임실 옥정호(위 사진)와 사막 한가운데에 온 것 같은 모래 언덕을 걸을 수 있는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
양요정 옆에는 망향의 탑이 서 있다. 옥정호는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저수지다. 1965년 섬진강댐이 완공되며 수위를 높였고 가옥 300여 호와 경지 면적 70%가 수몰됐다. 수몰 후 43년이 지난 뒤에야 지어진 망향의 탑에는 수몰 세대주 명단이 적혀 있다. 안개는 그 모든 사라진 마을과 사람들의 삶을 품고 오늘도 새벽이면 호수와 정자를 감싸며 피어오른다. 그 속을 걷다 보면 안개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괜찮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충남 태안 신두리해안 들풀길
모래언덕과 들풀만이 있는 바닷가를 상상해봤다. 분명 쓸쓸할 것이다. 굳이 그런 곳에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고수는 기자에게 “반드시 저녁에 가보라”고 권했다. 저녁놀이 물들 무렵 썰물 때의 바닷가라면 그 쓸쓸함이 두 배가 될 터인데. 고수의 말을 반신반의하며 바닷가로 차를 몰았다.
태안 신두리해수욕장을 조금 지나면 곧바로 해안사구가 나온다. 느닷없이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모래언덕이 솟아있다. 맨발로 걸으면 부드럽게 발을 감싸는 고운 모래들이 층층이 쌓여 야트막한 언덕을 만들었다. 이 모래언덕은 길이 약 3.4㎞, 너비 500m~1.3㎞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 해안사구이다. 겨울철의 강한 북서풍과 직각으로 만나는 지형 덕분에 사막 같은 모래언덕이 생길 수 있는 최적의 입지를 갖췄다.
모래언덕 너머로 들풀이 제멋대로 자라 있는 길이 펼쳐진다.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끝까지 뿌리만은 땅에 붙박인 강한 생명들이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남이(박해일)와 쥬신타(류승룡)가 자인(문채원)을 가운데 두고 최후의 대결을 펼치던 곳이기도 하다. 지킬 것이 딱 하나 남은 사내와, 그것을 반드시 부숴버려서 한풀이를 하려는 사내의 처절하고 처연했던 싸움과 사뭇 어울리는 풍경이다. 그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일몰이 다가온다. 바다와 모래언덕과 들풀이 쓸쓸한 붉은빛으로 물든다. 소설가 김훈은 해가 저물 즈음의 바닷가에 서서 이렇게 썼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이라고 그 갯벌은 가르쳐 주었다. 내 영세한 사랑에도 풍경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 썰물일 것이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바다의 기별) 속수무책, 이 쓸쓸한 바닷가와 사랑에 빠졌다.
"어머, 여기도 꼭 가봐야 해"
내공 10년 이상의 ‘고수’ 로케이션 매니저들이 추천한 장소 중 기자가 직접 찾아간 곳 외에 비교적 찾아가기 쉬운 장소 3곳을 함께 소개한다. 되도록 고수들이 소개한 말 그대로 옮겼다.
김태영(로케이션플러스 대표·로케이션매니저협회장)·이창민(로케이션 돋보기 대표)·김해중(존시스템 대표)
제주 우도 검멀레해안 동안경굴
“제주시 우도 해안에 인접해 있는 거대한 동굴입니다. 한국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이국적인 풍경이 압도적인 곳이죠. 매년 이곳에서 음악회가 열리는데 그때 맞춰서 오는 것도 색다른 경험입니다. 거대한 생선의 앞머리 같은 모습을 지닌 검멀레해안의 경치를 보면서 해물짬뽕과 땅콩아이스크림을 즐기는 것도 추천합니다. 물이 빠져야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단점입니다. 동안경굴의 다른 이름은 고래콧구멍인데, 먼 옛날 이곳 앞바다에 고래가 자주 와서 쉬어 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강원 태백 검룡소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유명한 곳이지만, 워낙 외진 곳에 있다보니 의외로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둘레가 20m 정도 되는 검룡소는 석회 암반을 뚫고 매일 2000~3000t가량의 지하수가 올라오는 연못입니다. 해발 1000m가 넘는 곳에 이런 엄청난 연못이 있다는 건 지금도 미스터리라고 합니다. 옛날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상류를 찾아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다 검룡소 연못에 들어가 수련을 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신비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장소입니다.”
전남 영암 활성산
“전남 영암에는 월출산이 유명하지만, 그 맞은편에 있는 활성산도 좋습니다. 여기는 한국에서 둘째로 컸다는 서광목장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영암 풍력발전단지가 들어서 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능선 사이로 바람을 타고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들의 모습이 색다른 정취를 자아내는 곳입니다. 예전에 발전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드라마 ‘로드넘버원’에서 6·25전쟁의 다부동 전투 장면을 이곳에서 찍기도 했습니다. 산꼭대기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고 특히 일출 때 풍력발전기와 산의 풍경이 어우러진 장관 때문에 사진가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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