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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홀린 ‘진령군’을 최순실에 비길쏘냐

오완선 2016. 11. 2. 19:39



정치BAR_역사 속 비선실세를 찾아서
     
‘역사 속 최순실 사태’에 대해 써달라는 주문을 받고는 흔쾌히 응했다.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망한 나라 위에 멍한 군주가 있고, 멍한 군주 밑에 간신이 설친다.’ 이는 만고의 진리다. 역사에서 호가호위하는 비선실세는 멍청한 군주 밑에서 언제든 나오기 마련이니까. 외척이니 측근이니 공신이니 하는 것들이 그런 부류다. 그런데 막상 쓰자니 난감했다. 내 지식이 짧은 것인지, 5천년 한국사에서 지금과 같은 사건은 발견하기 힘들었다. 왜? 이보다 최악의 완벽한 조합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멍한 리더, 소신 없는 간신·관료, 측근 내시 그룹, 사이비 냄새 완연한 비선실세. 이 네 가지 조건을 다 갖추기는 수천년 역사를 더듬어봐도 쉽게 찾기 어려웠다.

멍한 리더-측근 내시-사이비 비선 ‘최악의 조합’

국민의 손으로 뽑힌 대통령이 권력 서열 3위이고, 한낱 ‘강남 아줌마’가 서열 1위로서, 정부 부처의 과장 인사에서 기관장, 장관급 인사까지 좌우한다니…. ‘비선’이 청와대 수석을 심부름시키고, 재벌 돈을 갈취하거나 혹은 자발작인 상납을 받아 공익재단이란 곳에 예치시키는 동안, 대통령은 가끔 나와 ‘인쇄물’을 읽을 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수준이야 지난 대선 때 텔레비전 토론 한번 본 뒤 애당초 알아봤다. 토론 당시 박근혜 후보의 논리력과 표현력은 평균적인 중학생 수준도 되지 않는 듯했다. 보수 일간지의 어느 편집국 간부가 토론 직후 전화를 걸어와 판세를 묻기에 이번 선거는 끝난 거 아니냐고 답했다. “토론을 보고도 누가 찍을 수 있겠냐”고 했는데 그 역시 공감하는 듯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취임 이후에도, 번역기를 돌려서야 알아먹을 수 있는 대통령의 말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 대통령에게 합리적인 토론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 포기했다. 유시민씨의 표현대로 혼군(昏君·어리석은 군주)이었다. 물론, 왕의 적·장자 중심으로 권력이 승계되는 봉건왕조 시절이 아니라 선거로 권력자를 선출하는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을 왕처럼 표현하는 것이 한심스럽지만 말이다.

봉건시대에 혼군은 사실 흔했다. 피로 세습된 권력자가 다수의 후보군 중에서 선출된 권력자보다 똑똑할 확률이 낮을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21세기 혼군과 비선’은 봉건시대보다 더 무작스럽다.

최순실이 신돈이라고? 공민왕·신돈은 개혁가였다

우선, 고려시대 공민왕과 신돈.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최태민·최순실 부녀가 사이비 교주임을 상기시키며 고려말의 신돈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민왕과 신돈이 울고 갈 일이다. 반원 자주정책을 폈던 공민왕은 친원파와 권문세족의 부패를 개혁하고자 지연·혈연·학연에서 자유로웠던 승려 신돈을 기용했다. 신돈은 정몽주·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를 등용하기도 했다. 자주적 외교정책, 조세와 군사제도 혁신 등은 초기 민중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신돈의 과감한 개혁정치는 세가 약했다. 권문세족, 심지어는 자신이 기용했던 신진사대부의 반발로 좌초하고야 말았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불러냈다거나 최면을 걸었다는 둥 선무당 흉내 내며 염치도 없이 사욕을 부린 최씨 일가와는 격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콤플렉스 덩어리’ 연산군의 비선 장녹수

조선시대 연산군은 폭군의 대명사이지만, 재위 10년까지만 해도 정치도 신중히 하고 명민한 측면도 있었다. 친모인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은 것을 복수하기 위해 갑자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신료를 죽였지만 단순한 복수극은 아니었다. 훈구·사림의 비대해지는 신권을 제어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10년을 기다린 끝에 칼을 든 것이었다. 임사홍 등 당대의 간신이라 불려진 인물들은 박근혜 정권의 실력자들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품위도 있고 격조도 있었다. 성종 때는 직언을 서슴지 않아 유배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모성결핍의 콤플렉스였을까? 절대권력자의 절대불안이었을까? 가난 때문에 결혼을 수차례 했다던 비천한 출신의 기생 장녹수가 이상하게도 연산의 총애를 받으며 실세 노릇을 했다. 장녹수가 왕을 어린애 취급하며 조롱을 일삼고 종처럼 부리고 욕해도 연산군은 기뻐했다고 한다. 연산의 불안 콤플렉스가 이상상태에 달했던 것이다. 벼슬을 원하는 이들이 장녹수의 눈에 들기 위해 뇌물을 바쳐 장녹수 집안의 전답과 노비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요즘 비정상적인 비선실세의 주변에 들러붙는 자들과 비슷하지 않은가. 장녹수는 연산군 몰락의 한 원인이었고, 반정 후에는 목이 잘려 죽었다. 연산군은 어쨌든 말년에는 자신의 명이 다했음을 감지했다. 중종반정 일주일을 앞두고 연산군은 총애하던 장녹수와 전비 앞에서 “인생은 풀잎에 맺힌 이슬과도 같아서 만날 날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읊으며 눈물을 흘렸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중종은 반정 세력이 쳐놓은 권력의 한도를 넘어서기 힘들었다. 이후 인종의 뒤를 이어 열두살에 왕위에 오른 명종을 대신해 친모인 중종비 문정왕후가 섭정을 했다. 당연히 친정 동생인 윤원형 일파가 권세를 잡았다. 역대급 외척의 전횡이 문정왕후가 세상을 뜰 때까지 이어졌다. 무려 20년이었다. 그러나 윤원형은 비선이 아니었다. 물론 대비 누나라는 ‘빽’이 있었지만, 그는 과거를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공식 실세였다.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를 총애하고 불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펴긴 했지만 유교국가 조선에서도 왕실의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불교를 숭상했다. 보우는 도첩제 부활 등 승려의 신분 향상을 제도적으로 도모했다. 음습한 미신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명종은 왕 노릇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외척과 훈구세력의 발호로 민중의 삶은 피폐해져 곳곳에 민란이 발발했다. 의적 임꺽정이 바로 이 시기에 있었다.

광해군의 몸과 마음을 장악한 상궁 김개똥

외교에선 비교적 성공했지만 내치에서 실패했다는 광해군에게도 비선실세가 있었다. 광해군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상궁 김개시(개똥)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천출이었다. 용모도 뛰어난 편이 아니었지만 그는 광해군을 함부로 대하는 듯하면서도 비위를 잘 맞추고 잠자리 비방에 능했다. 광해군의 몰락을 부추겼던 권간 이이첨과도 친한 사이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오늘날 언론 보도와 비슷하게 ‘이이첨과 김상궁 개시 비교평가’ 같은 대목이 있다. 둘 다 벼슬 욕심은 적지만 실익을 최대한 추구한다는 것. 그래서 이이첨은 영의정 자리에 오르지 않았고 김개시는 귀빈 등 내명부의 직첩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이들은 반대파에 대해선 과격한 토벌론도 주장했다. 이들은 광해군의 흔들림없는 비선실세인 듯했지만, 광해군을 끝까지 지켜주지 않았다. 김개시는 인조반정의 주도자였던 이귀에게 매수돼 반란 첩보를 무력화시켰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대한 첩보가 수시로 들어왔음에도 김개시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방비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이첨 역시 절대 다수였던 사대부들의 눈치를 보면서, 광해군이 심혈을 기울였던 명청 교체기의 균형외교노선에 반해 친명사대입장을 고수했다. 광해군은 인조반정군이 궁궐에 들이닥치자 “이이첨이 저지른 짓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만큼 측근의 배신이 불안했던 것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큰 전란을 겪으면서도 이씨 왕조는 버텼고, 혼군의 시대는 여전했다. 병자호란을 막지 못한 인조 역시 이제는 다들 ‘쪼다 임금’으로 기억한다. 영·정조 중흥기를 지나 순조 이후 헌종·철종은 허수아비일뿐이었다. 왕비를 배출하면서 만들어진 외척이 권세를 잡은 세도정치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런 시대라 해도 지금처럼 황당하지는 않았다. 혼군 밑에서 부패한 척신이 있어도, 그들은 공식적 시스템을 통해 권력을 나눠가졌다.

명성황후, 임오군란 뒤 무당이 잡아준 날에 환궁 성공!

‘박근혜·최순실 사태’와 가장 흡사한 사례를 찾자면 조선시대 막바지 ‘민비’(명성황후라 칭해야 한다는데 나는 다 망한 조선왕실을 껍데기뿐인 황제국 체제로 만든 것이 그리도 중요한 것인지 의심을 품고 있다)를 꼽을 수 있다. 명성황후는 구국의 여걸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친정의 영화와 왕실의 안녕만 도모하다 망국의 길을 재촉한 왕비라는 혹평이 엇갈린다. 평가는 뒤로 하더라도 그의 미신숭배와 사치행각은 엄연한 사실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을 보면, 명성황후는 자신이 낳은 두살배기 왕자의 세자 책봉을 청나라에 승인받기 위해 100만금을 청나라의 서태후와 리훙장에게 바쳤다. 병약한 세자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금강산 1만2천 봉우리마다 쌀 한가마니, 돈 100냥, 베 한필씩을 공양하기도 했다. 전국의 유명한 절과 서울의 치성터는 명성황후가 독점하다시피 했다. 거의 매일 밤 새워 연회를 베풀고, 왕실의 물품을 각 국의 진귀한 것으로 채우는 등 끝없는 사치를 부렸다.

이런 미신행각과 사치 끝에 국고는 바닥났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당시 문무백관은 5년 이상 봉급을 받지 못했고, 군인들은 13개월 간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13개월 만에 나온 한달치 봉급이란 것이 반은 썩은 쌀이요 반은 돌과 모래가 섞인 것이었다. 이에 격분해 병사와 민중의 봉기가 촉발됐던 것이다. 이때 들고 일어났던 병사들과 민중은 절과 무당집도 습격했다. 민중의 분노는 명성황후와 그 일족을 겨눴다. 척족 민겸호를 죽이고 명성황후까지 살해하려고 했다.

박근혜의 ‘순수한 마음’과 명성황후의 ‘진실한 영혼’

명성황후는 이때 궁녀로 변장하고 가까스로 충주로 피신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때 한 무당이 찾아와 그의 환궁 날짜를 점쳐주었다. 무당이 예언한 날짜에 딱 맞게 환궁하게 되자 명성황후는 한양으로 무당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무당을 진령군(眞靈君)에 봉하고 수시로 만났다. 진령군은 ‘진실한 영혼’이란 뜻. 박근혜 대통령이 ‘순실’씨를 감싸면서 말했던 ‘순수한 마음’이나 지난 총선 때 언급한 ‘진실한 사람’이란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여하튼 명성황후는 아픈 곳이 생길 때마다 진령군을 불렀고, 그가 만져주면 고통이 가셨다 한다. 명성황후는 진령군을 총애했고, 그는 만나고 싶을 때면 언제든 명성황후와 고종을 만날 수 있었다. 수령방백과 대신들이 앞을 다퉈 그에게 아부했다 하니 진령군은 말 그대로 비선실세였던 셈이다. 어떤 이는 진령군을 자매로 여기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의 수양아들이 되기를 원하기도 했다. 가장 심각한 사례는 무뢰배 출신인 이유인이란 자였다. 그는 귀신을 불러오는 쇼를 벌여 진령군의 신임을 얻었는데, 고종과 명성황후는 진령군으로부터 이유인을 소개받은 지 1년 만에 양주목사에 임명했고, 이유인은 비선실세로 행세했다. 진령군과 이유인은 모자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을 둘러싼 추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본래 영민한 인물이었다. 어릴적부터 <춘추> 등 역사서를 많이 읽어 대원군과의 정치적 투쟁에서 밀리지 않았다. 대원군의 쇄국 대신 개항을 주도하기도 했다. 한때 개화파였던 그가 샤먼에 취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실한 영혼’에 눈이 어두워진 명성황후와, ‘순수한 마음’에 사리분별을 잊은 박 대통령의 차이점은 크다. 적어도 명성황후는 자기 생각은 있었다.

최용범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지은이·페이퍼로드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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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bar/768390.html?_fr=mt2#csidxb6cd31213ff7d34be72043503170a8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