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불운한 혁명가 정여립과 진안 마이산
황산대첩 승리한 이성계… 역성혁명 꿈꾸고 신성시한 마이산
마이산 자락 죽도에서 혁명가 정여립 의문의 죽음
이후 西人 주도 '기축옥사' 블랙리스트 작성해가며 1000여 東人 학살극
나라 멸망 때까지 300년 동안 서인 세력이 권력 독차지
경술국치 5주 뒤 그 권력층이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 받아
역대 충신과 투사 모신 대한이산묘, 김구…신익희…이시영… 당대 권력자 흔적 총집합
29세 젊은 의병장 이석용, 용바위에서 "日王 살 씹어먹겠다" 맹세
서기 1380년 어느 날 몽골제국 다루가치 가문 출신 무사가 꿈을 꾸었다. 고려에 귀화한 지 24년 만에 꾼 길몽이었다. 꿈에서 수염 하얀 도인이 금으로 만든 자, 금척(金尺)을 주면서 세상을 바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무사 이름은 이성계였다.
금척은 왕조의 정통성을 뜻하니, 무장 이성계는 고려를 뒤집어엎는 혁명을 꿈을 꾸게 되었다. 남원 땅 황산에서 왜구를 상대로 대승리를 거둔 다음이었다. 기분 좋게 수도 개경으로 철수하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꿈속에서 금척을 받은 그 산이 하늘에 떠 있지 않은가. 하여 이성계는 산중 사찰 은수사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길을 떠났으니, 이 산이 바로 전북 진안 마이산(馬耳山)이다. 과연 이성계는 왕씨가 지배하는 고려를 파하고 이씨가 왕실을 차지하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성공시켰다.
신기한 마이산
이성계가 금척을 받은 이래 마이산은 조선조 내내 조선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산으로 대접받았다. 산신제도 꼬박꼬박 지냈다. 20세기 들어 이갑룡이라는 사내가 이 산 가운데에 돌탑들을 쌓았다. 수십 년 동안 돌 하나하나 옮겨가며 열심히 쌓았다. 근 90년 가까이 모진 풍수해 속에도 돌탑들이 쓰러지지 않아, 1990년대까지 사람들은 이갑룡이 축지법과 차력을 써서 만들었다고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겨울 탑사와 은수사 마당에 물통을 놔두면 고드름이 하늘로 치솟으며 자라니, 축지법을 통한 해석이 과학적인 해석보다 더 그럴듯했다.
미완의 혁명가 이석용(1878∼1914)
마이산 남쪽 입구로 가는 길목 오른쪽에 바위가 하나 있다. 용바위다. 이정표가 작아 잘 보이지 않는다. 바위에는 龍岩(용암)이라 새겨져 있다. 그 뒤로 커다랗게 흉터가 있는 바위산이 있다. 사람들은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친 자국이라 믿는다.
1907년 9월 12일 이석용이라는 스물아홉 먹은 사내가 그 앞 바위에 올랐다. 길바닥에는 관중 500명이 서 있었다. 일본 경찰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석용이 바위에 쌓은 제단에서 소피를 뿌리며 이렇게 하늘에 고했다. "사사로운 정이 우리를 방해하거든, 하늘이 죽음으로 응징하소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 결성된 현장이다. 일경은 주눅이 들어 제지도 하지 못했다.
이석용은 만장일치로 의병장에 추대됐다. 1년 넘도록 준비해둔 군자금과 무기로 창의동맹단은 진안, 용담, 임실, 순창을 훑으며 전투를 벌였다. "일왕의 살을 씹고 가죽을 벗겨 방석으로 삼겠다"고 나선 이석용이었다. 의분(義憤)한 혁명가가 혁명을 완성시키기에 대한제국은 이미 굴뚝까지 침몰해 있었다. 결국 이석용은 1914년 4월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석 달 뒤 처형됐다. 용바위 앞에는 이를 알리는 작은 안내판이 서 있다.
혁명가들의 흔적, 이산묘
용바위에서 1㎞ 정도 마이산 쪽으로 가면 주차장 입구 오른편에 커다란 비석이 나온다. 비석에는 '호남의병창의동맹단 결성지'라 새겨져 있다. 안내판에는 비석 옆 깎아지른 바위산에서 이석용이 제사를 올렸다고 적혀 있다. 왜곡이며 오류다. 무시한다. 대신 그 뒤편 이산묘( 山廟)를 본다. 마이산 경치에 홀려 대개 무시하고 지나가는 공간이다. 정식 명칭은 대한이산묘(大韓 山廟)다.
1906년 학자 면암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최익현이 체포되면서 의병은 무위로 돌아갔다. 나라가 망하고 1924년 최익현의 제자들과 또 다른 학자 송병선의 제자들이 마이산자락에 이산정사를 세웠다. 금척을 받은 곳에, 사라진 조선의 정기를 부활시킨다고 했다.
해방 이듬해 유림에서는 조선 충신과 독립투사들 위패를 함께 모시고 이산묘라 개칭했다. 백범 김구가 거액을 내놓았다. 투사들 위패가 있는 사당에는 김구 친필 현판 '永光祠(영광사)'가, 충신들을 모신 사당에는 해공 신익희의 친필 현판 '永慕祠(영모사)'가 걸려 있다. 외삼문에 붙은 현판 ' 山廟(이산묘)'는 상해 임시정부 초대 부통령 이시영 글씨다. 사당 오른편에는 1956년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쓴 대한광복기념비 비각이 서 있다. 왼편 절벽에는 김구가 쓴 '靑丘日月 大韓乾坤(청구일월 대한건곤)'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도로 건너에는 김영삼 정부 때 세운 독립유공자추모탑이 서 있다. 뒤편 절벽에는 고종 친필 '非禮勿動(비례물동·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가 새겨져 있다. 다시 말해서,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당대 최고 권력자 혹은 혁명가 리스트, 그 흔적을 바로 이 사당에서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진안 죽도와 혁명가 정여립(1546~1589)
마이산 남부주차장에서 20㎞ 동쪽으로 가면 죽도가 나온다. 무주에서 오는 물길과 진안에서 나오는 물길이 이곳에서 만나 금강이 된다. 조선 선조 때 혁명가 정여립이 이곳에서 죽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428년째 수수께끼다.
역성혁명론은 맹자 이래 혁명가들이 주창하던 이론이다. 조선 왕실이 금척 신화를 들고나온 이유도 혁명이었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랴'라고 대놓고 혁명을 주장했다.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을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라 규정했다.
정여립은 서인(西人)의 태두인 율곡 이이 문하에서 벼슬살이를 했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탈당해 집권여당인 동인(東人) 당으로 전향해버렸다. 선조가 이를 못마땅하게 보자 은거한 곳이 진안 죽도다. 사방이 산이요, 물길로 사방이 갇힌 이곳에서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들어 관료부터 천민까지 다 만나며 세력을 모았다. 황해도까지 조직원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활쏘기 대회도 열었다.
1589년 한강에 얼음이 얼 때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정여립 세력이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첩보를 서인(西人) 당이 입수했다. 정도령을 참칭하고 정씨 왕조를 꿈꿨다는 보고도 올라왔다. 이하 역사는 불문가지다. 난공불락의 요새인 죽도가 순식간에 무덤으로 변했다.
전투를 벌이던 정여립은 결국 죽도 강변에서 관군에 포위돼 죽었다. "땅에 세운 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고 관군이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죽은 곳이 죽도가 아니라는 기록도 있다. 삼족이 멸하고 정여립에 관한 일체의 기록이 역사 속에서 삭제됐다. 그래서 2017년 겨울 죽도의 아름다움은 의미심장하다.
16세기 블랙리스트, 기축옥사
절호의 찬스를 맞은 서인은 역모 세력 검거 작업에 착수했다. 수사반장이던 송강 정철은 정여립의 정자(字)만 들먹여도 붙잡아 죽였다. 조대중이라는 지방 관료는 기생과 헤어져 울다가 정여립을 슬퍼한다는 오해를 뒤집어쓰고 곤장 맞고 죽었다. 서인이었던 형조좌랑 김빙은 이듬해 정여립의 시체를 다시 고문하면서 추위 탓에 눈물을 닦다가 사형당했다. 3년 동안 학살된 동인 당 세력이 1000명을 넘겼다. 서인은 리스트를 작성해가며 동인 세력을 차곡차곡 제거해갔으니, 이 16세기 판 블랙리스트 사건을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한다. 권력 재편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선조가 훗날 한마디 했다.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毒澈殺我良臣)." 역사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 몇몇 역사적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서인당, 그중에서 노론당은 권력을 빼앗기지 않았다.
300년째 작동한 블랙리스트
1900년 양력 4월 17일 대한제국은 새 훈장 조례를 발표하며 금척(金尺)을 상징하는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을 최고훈장으로 규정했다. 훈장을 받은 사람은 고종과 순종을 포함해 27명이다. 일본인이 11명, 대한제국인이 14명,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이 각각 1명이다. 일본인 가운데는 당시 일본 추밀원 의장인 이토 히로부미 후작(1904년), 훗날 2대 조선 총독이 된 일본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1907년)가 포함돼 있다. 대한제국인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궁내부대신 민병석이 포함돼 있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은 일본국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고 1주일 뒤인 29일 월요일 일본국 황제에게 통치권을 양여했다. 일본은 훗날 통치권 이양에 기여한 조선인 76명에게 귀족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을 하사했다. 사학자 이덕일에 따르면 당파를 파악할 수 있는 귀족 64명 가운데 56명이 노론이었다. 이완용과 윤택영, 민병석, 이재각은 대한제국 금척대훈장과 조선 귀족 작위를 함께 받았다. 나라가 사라진 지 5주가 지난 1910년 10월 7일 금요일이었고, 정여립이 죽은 지 321년이 지난 후였다. 300년 전 작성된 블랙리스트는 여전히 작동 중이었다. 이제, 여행도 두 눈 똑바로 뜨고 해야 한다.
[진안 여행수첩]
〈볼거리〉
1.마이산: 남쪽 입구 입장료 2000원. 은수사까지 갔다 올 때도 필수. 북쪽 입구에서는 입장료를 징수하지 않지만, 남쪽으로 나올 때는 중간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해야 함. 남쪽 입구 금당사에 있는 문화재 관람료 명목. 2.죽도: 내비게이션에 '천반산자연휴양림'을 검색한 후 마이산 쪽에서 전진하다가 길섶에 '장전마을'이라는 작은 이정표가 나오면 비탈길로 우회전. 사륜구동차가 아니면 돌집 '스톤스토리' 앞에 주차 후 이후는 걸어갈 것. 스톤스토리 주인 박봉기씨에게 '애원'하면 죽도 폭포 입구까지 안내받을 수도 있으나 장담은 못함. (010) 7562-5784 3.수선루: 연안 송씨 4형제가 만든 암굴 속 정자. 특이한 구조와 조망. 암굴 속 정화수 종지와 암벽에 있는 글씨도 볼 것. 마령면 강정리 산 57.
〈홍삼 스파〉
진안군이 운영하는 홍삼 마사지욕. 3만9000원. 숙박 시설도 있음. www.redginsengspa.kr
〈맛집〉
1.수목원가든: 진안 특산 인삼을 넣은 요리. 메타세쿼이아 길 근처. 홍삼닭백숙 4만9000원부터. 부귀면 세동리
1112-2, (063)433-7000 2.마이담: 진안 특산 인삼을 이용한 홍삼돌솥밥과 떡갈비. 홍삼마늘밥 정식 1만4000원 등. 부귀면 거석리 843-8, (063)433-5535 3.풍경식당: 마이산 남쪽 입구 상가촌 식당. 손맛이 좋다. 버섯전골 1만3000원(1인분), 더덕돼지구이 2만원 등. 마령면 동촌리 55-4, (063)432-6611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25/20170125001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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