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2/맛집

저절로 입이 열렸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오완선 2024. 8. 17. 11:42

정동현의 pick] 유린기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입력 2024.08.17. 00:40
 

찜기 속 만두의 기분이 이랬을까? 저녁 나절이었지만 몸을 덮치는 더운 기운은 힘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로를 달리는 차의 배출 가스, 좁은 인도에서 스쳐 지나가는 행인의 체온 모두가 여름의 한 부분 같았다. 서울 신논현역에서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쪽으로 방향을 잡고 길을 걸었다. 왼쪽으로 주유소가 있었고 그 바로 뒤, 외벽에 에어컨 실외기가 다닥다닥 붙은 ‘서초오피스텔’이 있었다. 목적지는 그 건물 지하의 한 중국집이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예스러운 글자체로 ‘중국집’이라고 쓴 간판이 보였다. 중국집 위에는 또 조그맣게 한자로 ‘경파(鯨波)’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고래 같은 파도’라는 뜻이니 이 집 기세가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수식 없이 간단명료한 간판과 시원하게 유리로 마감한 외벽까지 평범한 것들조차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예약한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봤다. 건조하게 음식 이름만 줄줄이 박힌 메뉴판에는 흔한 사진이나 설명도 없었다. 메뉴도 부산스럽게 많지 않아서 고르기가 수월했다. 곧 사람들이 들어찼다.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이도 꽤 있었다.

중국집 '경파'의 유린기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좁은 틈으로 보이는 주방에서는 팔뚝이 굵은 사내들이 커다란 중화 냄비, 웍(wok)을 붙잡고 있었다. 철컹철컹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노를 젓듯 규칙적으로 들렸다. 그 소리를 배경 삼아 자리에 앉았다. 맥주 한 병을 앞에 두고 있으니 일행이 속속 도착했다. 햇볕에 그을린 듯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들이었다. 그 열기를 식히려 맥주를 나눠 마셨다. 그 사이 상에 오른 것은 ‘고기 튀김’이었다. 탕수육에서 소스만 뺐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두툼하게 썬 돼지고기 등심에 반죽을 입혀 폭신하게 튀긴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튀김을 고추와 함께 살짝 볶고 후추와 소금 간을 한 다음 파채를 올렸다. 식초를 푼 간장 없이도 칼로 베어낸 듯 날카롭게 간이 맞아떨어졌다. 과하게 튀기지 않아 고기는 건조하지 않았고 부드러웠다. 군더더기 없는 맛이 묵직하게 이어졌다.

그다음 나온 음식은 유린기였다. 기름을 뿌린 닭고기라는 뜻의 유린기(油淋鷄)는 양상추를 깐 다음 그 위에 두툼하게 튀긴 닭다리 살을 올리고 고추로 맛을 낸 간장 양념을 뿌렸다. 다시 그 위에 두껍게 썬 파채를 차곡차곡 쌓았는데, 향을 끌어올린 간장 소스는 맛이 투박하여 질리는 느낌이 없었다. 대신 서늘하게 깔리는 산미와 그 위에 수증기처럼 그윽하게 흘러나오는 파, 고추, 마늘의 향긋한 기운이 코와 혀를 동시에 자극했다. 유린기에서 튀긴 닭고기는 오히려 조연이었고 그 주변을 포위하듯이 둘러싼 소스의 가볍고 화려한 몸놀림이 주연이었다. 유린기를 처음 보고는 “닭튀김이냐”는 질문이 나왔고, 젓가락질을 마친 뒤에는 “이게 뭐냐” 하는 놀라움에서 비롯된 감탄사가 이어졌다.

 

중국집 '경파'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다음 접시는 얇게 편을 썬 오향장육이었다. 팔각, 정향, 계피, 후추 같은 향신료를 넣어 삶아 낸 오향장육은 우선 고기를 켜켜이 쌓아놓은 성의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고기 위에는 고추기름을 흩뿌렸고 옆에는 산뜻하게 무친 알배추와 고수, 파채가 있었다. 희미하여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인 맛은 없었다. 대신 선이 굵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다. 난자완스는 뜨겁게 달군 주물 냄비에 담겨 나왔다. 죽순, 청경채, 목이버섯 같은 채소가 가득했고 부글거리는 소스 속에는 커다란 고기 완자 몇 덩이가 놓여 있었다. 붉은 기름이 곱게 뜬 짬뽕탕은 맛이 호쾌하여 얽히고설켰으며 애매하고 모호한 세상사를 단숨에 뚫는 힘을 지녔다.

이런 음식을 앞에 두고 모인 사람들은 저절로 입이 열렸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비굴하게 눈치를 보고 음흉하게 계산하는 두서없는 말은 없었다. 대신 승산이 없는 싸움에 인생을 건 동지들처럼 뒤가 없고 앞이 없이, 오직 지금만 남은 것처럼 뜨거운 술을 마시고 잔을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 우리마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강남 한복판에도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제야 주방에 있던 남자들은 땀을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커다란 파도를 온몸으로 맞은 듯 흠뻑 젖어 있었다.

#경파: 고기튀김 2만8000원, 유린기 3만2000원, 짬뽕탕 2만원, 0507-1320-5437

고기튀김(위)과 유린기.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2024.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