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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의 쓸쓸함도 잊게 만든 냉면 한 그릇

오완선 2024. 9. 5. 15:18

 

[한시를 영화로 읊다]〈89〉나를 위로하는 맛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년)에서 일본인처럼 행세하는 악독한 조선인 코우즈키는 식사 때만큼은 평양냉면을 즐긴다. 조선시대 장유(張維·1587∼1638)가 냉면을 먹고 쓴 시는 다음과 같다.


냉면을 읊은 한시로는 두보의 ‘괴엽냉도(槐葉冷淘)’가 유명하다. 홰나무 잎의 녹색 즙을 면 반죽할 때 넣어 냉면을 만드는 내용이 나온다. 두보가 먹으면 시름도 사라진다고 읊은 ‘냉도면(冷淘麵)’은 당나라 궁중음식에서 기원한 것인데 우리 냉면과 달리 비취색 면을 썼다. 고려시대 이색(李穡)의 시에도 이 중국식 냉면에 대한 언급이 있다(‘夏日卽事’). 위 시에선 이와 달리 우리 냉면을 읊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그런데 시인이 먹은 음식은 오늘날 즐겨 먹는 평양냉면의 맑은 육수에 담긴 메밀면과는 다른 모습이다. 묘사대로라면 오미잣물에 꿀을 타고 녹두 녹말가루로 만든 하얀 면을 넣은 ‘세면(細麪)’의 모습과 가깝다.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접대한 음식 기록에도 시에서 읊은 것과 같은 냉면이 나온다(1643년 迎接都監儀軌). 시인은 입에 감도는 향기와 몸서리칠 정도의 차가움이 객지에서 느끼는 쓸쓸함마저 잊게 만든다고 말했다.
 
냉면은 아니지만 오키타 슈이치 감독의 ‘남극의 쉐프’(2009년)에서도 이역에서 먹는 국수가 향수를 달래 준다. 남극기지 월동대장인 카네다는 월동 기간에 먹어야 할 라멘이 떨어지자 조리 담당인 주인공 니시무라에게 자신은 라멘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남극기지엔 면을 반죽할 때 넣을 간수가 없었지만, 니시무라는 결국 간수를 만들어 어렵사리 라멘을 완성한다. 카네다는 니시무라가 정성껏 준비한 라멘에 감격한 나머지 먹는 데 집중하느라 오로라 관측 임무마저 무시해 버린다.
 
송나라 소식(蘇軾)은 중국식 냉면을 먹으며 비록 진수성찬이 아니더라도 좋은 친구와 먹으면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고 읊은 바 있다(‘二月十九日, 携白酒·鱸魚過詹使君, 食槐葉冷淘’). 일제강점기 백석은 평양냉면을 두고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이 회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썼다(‘국수’). 시인은 냉면의 색다른 맛이 돌아가고픈 조바심마저 안정시킨다고 했다. 그들이 예찬한 냉면은 각기 다르지만 근심을 위로하고 달래 주는 맛이란 점에서는 상통한다.

 

 

                                                               2024.09.05.  동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