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카푸카라는 쿠스코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초소였다. 푸카는 ‘붉다’는 뜻이며 푸카라는 ‘검문소’라는 의미다. 주위의 흙빛이 검붉어서 붙은 이름인 것 같다고 한다. 이곳에서 잉카의 초병은 낮에는 소라로 만든 푸투투(pututu)와 거울로, 밤에는 봉화를 이용해 인근의 탐보마차이와 교신했다고 한다. 푸카푸카라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니 저 아래로 쿠스코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주변에는 잉카의 옛길 흔적이 남아 있다. 저 길을 따라 잉카의 전령 차스키(chasqui)가 소식을 전하고자 발걸음을 부지런히 재촉했으리라. 오늘날에도 페루에선 우체국을 차스키라고 부른다.
총코는 화강암 속을 지그재그로 파내어 만든 통로다. 좁은 통로를 따라가다 보니 퓨마의 머리 모양처럼 생긴 곳이 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의도적으로 그렇게 팠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낮이 가장 짧은 동지는 퓨마를 숭배하는 날이다. 신기하게도 총코의 돌산에 드리워지는 돌기둥의 그림자가 이날엔 퓨마 모습을 띤다고 한다. 이날 잉카인은 야마를 퓨마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야마는 잉카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하고 유용한 동물이었다. 야마는 영양가 높은 고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옷감을 짜는 털도 제공했다. 야마의 뼈는 베를 짜는 바늘로 사용됐다. 배설물은 비료로 이용됐다고 하니 버릴 것이 없는 동물이었던 셈이다.
“한나절 내내 돌만 본 것 같다”
총코를 둘러본 뒤 거대한 돌을 다듬어 만든 신전 삭사이우아만(Sacsayhua man)으로 향했다. 일행 중 한 명이 “돌을 또 보러 가야 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새마을운동 노래를 개사해 ‘돌보러 가세, 돌보러 가세’라고 불렀다. 불평이 나올 만도 한 것이 오얀타이탐보를 시작으로 한나절 내내 돌만 본 것 같다. 삭사이우아만은 신전인데, 돌을 다듬어 만든 성벽을 연상케 했다. 입구 오른쪽 언덕에 하얀 대리석의 예수상이 보였다. 이는 1945년 이곳에 거주하던 아랍계 기독교인이 자신들을 받아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뜻으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삭사이우아만의 수많은 돌은 먼 곳에 있는 채석장(cantera)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케추아어로 사카(saca)는 ‘배가 가득 찬’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우아만(huaman)은 송골매라는 뜻이다. 그러니 삭사이우아만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배부른 송골매라는 뜻이 된다. 쿠스코는 퓨마의 모양을 따서 건설됐는데 삭사이우아만은 머리 부분이다. 퓨마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에는 현재 중앙광장과 웅장한 성당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스페인군에 의해 파괴돼 기초만 남았지만 메스티소 출신의 기록가 가르실라소 라 베가(Garcilazo la Vega)는 어린 시절 자신이 직접 본 삭사이우아만은 현재의 것보다 성벽처럼 보이는 부분이 더 높았다고 한다. 삭사이우아만은 태양의 신전이었으나 스페인군은 그 웅장함에 압도된 나머지 이를 잉카의 성벽으로 오해하고 파괴했다. 잉카제국은 수많은 지진을 경험했다. 그래서 잉카의 건축가들은 지진에 의해 무너지지 않도록 돌기둥을 이등변 삼각형의 두 개의 빗변처럼 비스듬히 세워서 돌문을 만들었다.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은 삭사이우아만이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채 넘어가는 해를 받아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이 장관이다.
삭사이우아만을 보고 산을 내려오면서 우리 나름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쿠스코 성당과 태양의 궁전이 있는 코리칸차(Qorikancha) 중 하나를 행선지로 선택해야 했다. 아쉽지만 쿠스코 성당은 외부만 보기로 하고 코리칸차를 방문키로 했다. 가이드에 따르면 ‘코리’는 황금이라는 뜻이고 ‘칸차’는 공간 또는 장소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코리칸차는 황금의 궁전이라는 뜻이 되겠다. 코리칸차의 중앙에는 스페인풍으로 지은 산 크리스토발 성당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중세 스페인 예술의 걸작으로 불리는 이 성당은 잉카의 성전이던 태양의 궁전 위에 건축한 것이다. 1950년 대지진으로 인해 스페인이 지은 성당이 일부 무너지면서 잉카의 성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페인 점령군이 잉카의 돌 벽 위에 스페인식 돌 벽을 쌓아 잉카의 신전을 감춰버렸으나 지진이 스페인식 돌 벽을 무너뜨리고 잉카의 성벽을 끄집어낸 것이다. 잉카가 세운 벽은 이음새가 정교하게 맞물려 있어 지진에도 해를 입지 않았으나 스페인 성벽은 돌과 돌 사이를 회반죽으로 마무리해 지진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를 보면 500년간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찬란한 잉카의 유산을 심각하게 훼손한 스페인이 원망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잉카의 현명한 지도자 파차쿠텍의 아들 투팍 유팡기의 궁전은 벽 한 면이 ‘황금의 태양’으로 장식돼 있었다고 한다. 궁전 회랑에는 잉카 귀족의 미라가 도열해 있었고 당시 크게 유행하던 변형된 머리를 한 동자들의 금상도 진설돼 있었다고 한다. 정원은 금으로 만든 각종 동식물로 장식했다고 한다. 또한 잉카 세계의 창조신인 우아이라콜차(Huayracolcha)의 황금상이 600년 동안 우뚝 서 있었다고 한다. 황금은 포로로 잡힌 잉카 왕을 구출하고자 스페인 군인들에게 바쳐져서 금괴로 바뀐 뒤 스페인으로 보내졌을 것이라고 한다. 쿠스코는 현재의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그리고 칠레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거느렸던 잉카제국 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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