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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산행기-4 (덕유산에서 깡다구 시험을)

오완선 2012. 12. 1. 18:32
(백운산을 넘어 육십령까지)

동서울발 함양행 버스를 타고 서상면에서 하차하여 가게에서 음료수 한 캔을 사 마시며 중기마을까지 가려고 하는데 차비를 드릴 테니 태워주실 분 없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잠깐 기다리라며 주인아저씨를 모시고 온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라 만오천원에 흥정하고 짚을 타고 지난번 산행을 멈췄던 중기마을까지 올라가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반이다.

햇볕은 아직도 한창 뜨겁지만 산 속으로 들어서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런 대로 산행을 할 만하여 야간산행을 마음먹고 곧바로 대간 길을 이었다

이 곳에서 육십령까지의 도상거리는 대략 18km정도였고 앞에 보이는 백운산만 올라가면 육십령까지는 큰 오르막이 없는 평탄한 내리막구간이고, 길 찾기가 힘든 구간이 아니어서 8시간이면 주파가 가능해 보였다

중간에서 두어 번 쉬고 두시간 정도 비지땀을 흘리며 백운산 정상에 도착했다. 바람도 시원시원하게 불어오고 고남산과 지리산의 연봉들이 한 눈에 보이며 저 멀리 구름 속에 제일 높이 솟아오른 까만 봉우리가 천왕봉이라 생각하니 그곳에서 이곳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눈이 게으르고 발은 부지런하다는 산꾼들의 얘기가 하나도 틀림이 없다. 이 곳에서 저 끝에 보이는 지리 천왕봉까지 걸어가라고 하면 보기만 해도 질려서 엄두를 내지 못 하겠지만 욕심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니 여기까지 걸어오지 않았는가. 시작이 반이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란 말이 이 곳에서 바라보니 실감이 난다

정상 봉우리에는 주인 없는 오래된 무덤이 자리 잡고있다.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 백두대간의 맥이 흐르는 심장부에 묘 자리를 잡았으니 맥은 제대로 잡았으나 명당자리는 아닐 것 같다.

기가 너무 강하여 강한 기를 다스리지 못하면 오히려 화가 될 것이며, 후손이 찾지 않고 이렇게 방치된 것을 보면 자손이 잘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 것은 그렇고 이 높은 곳까지 성묘를 다녔을 후손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며 무심코 걷다가 기겁을 하였다. 40cm정도 되어 보이는 뱀이 도망가지 않고 어슬렁거리는데 틀림없는 독사였다. 이 구간은 뱀이 많은 구간으로 미리 알고 있었지만 멍청하게 걷다가 갑자기 뱀과 마주쳤으니 기겁을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봉우리라 이름하기도 곤란한 낮은 봉우리에 올라서니 좌측으로 긴 능선이 이어지고 있어 이상한 생각이 든다. 여기가 어디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지도를 펴고 봉우리들의 각도를 잡아 현 위치를 파악해 보니 영취봉이다.

영취봉은 30분 정도 더 가야 영취봉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독사에게 놀라 정신 없이 도망쳐서 너무 빨리 도착해 현위치를 잠시 착각을 하였다

전남 광양의 백운산에서 시작한 호남정맥은 순천 승주의 조계산을 거쳐 장흥 제암산을 지나 호남의 곳곳을 돌며 무등산을 일궈내고 내장산을 거쳐 장수의 주화산에서 계룡산을 지나온 금남정맥과 합류하여 호남금남정맥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바로 이 곳에서 백두대간과 합류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산야는 그 뿌리를 찾아가면 백두대간에서 분기되었음을 알 수 있고 모두가 백두대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호남정맥의 시작이 바로 이곳 백운산 자락이고 그 끝이 섬진강변 광양의 백운산이다. 시작과 끝에 있는 두 산의 이름이 모두 백운산임은 우연의 일치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며 시작과 끝은 하나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뜻이 아닐까하고 꿈보다 해몽이 좋은 답을 내려보았다

저 멀리 산아래 마을들은 땅거미가 길게 드리워 지고 있다.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공사중인 대진고속도로가 길게 뻗어 가는 모습이 한 눈에 보이고 지금 내가 서있는 발 아래는 터널공사가 한창일 것이다.

랜턴 불을 밝히며 조릿대(산죽) 숲을 헤치고 지나고 있다. 좁은 등산로 옆으로 유난히 긴 조릿대가 터널을 만들고 있어 이 모습도 장관이다. 여타 다른 산에도 산죽이 많이 자라고있지만 특히 이 곳은 산죽으로는 으뜸가는 산으로 정평이 나 있고 실제 눈으로 확인하니 그 명성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 나침반을 보며 진행 방향을 확인하고 등산로의 흔적을 찾아 걷다보니 샘터가 하나 보인다. 아. 이제 다 왔구나 생각하며 시계를 보니 11시 반이다. 8시간 정도 예상했는데 생각보다는 30분 정도 빨리 걸었던 모양이다.

10여분만 내려가면 육십령휴게소가 나오지만 거기까지 내려갈 필요가 없어 오늘은 이 곳에다 텐트를 치고 아무도 없는 샘터에서 몸을 좀 씻어보기로 했다

평상시에 이런 짓을 했다가는 지나가는 등산객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지만 못된 짓 하기에는 밤이 좋긴 좋다. 내일 스케줄은 덕유산을 걸으므로 눈감고도 갈 수 있으니 다른 걱정은 없고 탱자 탱자하며 발 품만 열심히 팔면 끝이다

산행도중 간식으로 칼로리는 충분히 보충하였지만 허기를 느껴서 라면으로 요기를 채우고 커피한잔 마시니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

1차 목표로 삼았던 지리산과 덕유산을 이렇게 연결하였으니 뿌듯한 마음이고 내일은 덕유산을 걷는다 생각하니 마음도 한결 가벼워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자리를 준비하였다

(지긋지긋한 덕유산의 폭염)

잠에서 깨어나니 주위는 벌써 훤하게 밝아 오고 있다. 육십령휴게소로 내려와 서둘러 아침식사를 끝내고 고갯마루를 지나는 국도를 건너서 좁은 오솔길을 찾아 대간 길로 접어들었다

백두대간에는 이 곳 육십령처럼 국도나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 40여 곳이 되어 연속 종주하는 분들은 이런 곳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구간별로 나눠 종주하는 경우에는 들머리, 날머리로 삼아가며 구간을 이어간다

고갯마루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터에서는 가장 높은 지점에 해당되는 곳이지만 산 능선 길에서는 가장 낮은 지점이다. 이런 가장 낮은 산마루에 마을과 마을을, 고을과 고을을 연결하는 길을 만들어 두 지역 사람들이 서로 왕래하는 통로역할을 하고 있고 이런 고갯마루에는 많은 애환들을 간직하고 있어 그 애환들을 살펴보면 그 지역의 숨은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차도를 개설하며 이렇게 산줄기를 끊어버린 결과로 야생동물의 이동통로가 사라져 버렸고 이로 인해 우리와 함께 이 땅에서 같이 살아가야 할 이곳의 진정한 주인들이 갈 길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으며 그 활동공간이 제한을 받은 결과로 개체수가 점점 사라져서 생태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부작용을 야기하고 있다

고개들을 재, 치, 령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용빈도가 많고 교통량이 많은 곳은 령이라 불렀고 그렇지 못한 곳은 재라 불렀다. 도로가 포장되면서 재에서 령으로 개명된 것이 많으나 그 앞에 우리말 이름이 있으면 종전처럼 재로 불려지고 있다.

치는 차량통행이 없는 고갯마루가 대부분이어서 비교적 험준하고 협소한 고개를 말하고 있는 듯하나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재, 치, 령은 구분 없이 혼재되어 사용한 경우가 많아 통일된 용어의 정의는 없는 듯하다

이 곳 육십령고개는 고개 이름 앞에 육십(六十)이란 숫자가 있어 다른 고개와는 특이하여 그 유래를 알아본 적이 있고 현재 3가지 설이 전해 내려온 것으로 기억된다

경상도의 안의현과 전라도의 장수현에서 각각 육십리 떨어진 고개라 하여 육십령이라는 설과 또 하나는 60개 고개를 넘어야 올라 올 수 있다는 높고 험준한 고갯마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고 나머지 하나는 이 곳에 화적이 많아서 이 곳을 넘기 위해서는 주막에서 6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넘어 왔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고개를 지나며 나는 나의 입장에서 다른 의미를 부여하였다. 육십이란 숫자는 갑자(甲子)가 한번 순환하여 다시 돌아오는 회갑을 뜻하고 있다. 이렇듯 육십은 끝과 시작을 의미하고 있어 지금까지 지리산 권역을 걸어왔던 지리산과는 작별하고 이 곳에서 덕유산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이런 생각을 가져본 것도 대간 길을 걷는 입장에서는 그에 맞는 새로운 의미였다

어찌되었던 이곳 육십령은 경상남도의 함양군과 전라북도의 장수군을 연결하는 영호남의 통로로 오랜 세월동안 애환을 함께 한 고갯마루였으나 지금은 이 아래에 터널을 뚫어 대진고속도로가 지나면서 이 곳 고갯마루를 지나는 차량들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이제는 이런 고개들도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에서 예외가 아닌 시대에 살고있다

덕유산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 답은 바로 덕유(德裕)이다. 그 이름이 지닌 뜻 그대로 포용성을 지닌 넉넉함보다 더 이상 간결하게 설명할 길은 없다. 지리산에서는 장엄함을 느꼈다면 덕유산에서는 넉넉함을 느낀 점이 두 산에서 느끼는 큰 차이점이고 덕유산만큼 산의 특성을 잘 표현하여 이름지은 산은 없다는 생각이다

오늘 걸어야 하는 덕유능선은 여름과 동계에 각각 몇 번씩 걸었던 곳이라 길을 찾는데는 어려움은 없고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곳곳에 등산객을 위한 안내표지가 잘 되어있어 큰 걱정은 없으나 한여름의 뙤약볕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30km정도의 긴 구간을 하루에 다 걸을 수 있을지 아니면 이틀에 걸어야 할 것인지는 길을 걸으며 결정하기로 했다

덕유산종주는 무주구천동으로 널리 알려진 삼공리의 백련사에서 주봉인 향적봉을 올라 덕유산 주능선을 타고 오다가 남덕유봉에서 함양군 서상면의 영각사로 하산하는 코스를 말하고, 백두대간 길은 이 곳 육십령에서 장수 서봉을 오른 후에 남덕유봉을 경유하여 종주능선을 따라가다가 백암봉에서 주능선과 작별하고 동으로 방향을 틀어 도 경계선을 따라간다.

덕유산의 백두대간길은 왼 발은 전라북도 무주군을, 오른 발은 경상남도 거창 땅을 밟고 가며 거창 땅과 이별하면 경남의 백두대간도 이제 끝이 나고 경북의 김천 땅으로 들어선다

육십령에서 대간 길로 접어드는 길은 동네 뒷산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잠시 좁은 소로로 이어지나 이내 "그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 하리라"는 성경의 어느 구절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구간이다

서너 번 쉬어가며 3시간 반정도 걸려가며 힘들게 장수 서봉에 올라서자 시원한 산바람이 그동안 흘린 구슬땀을 시원스레 식혀주고 시야가 좋아서 일망무제의 조망을 맘껏 감상해 본다

서쪽 장수군에 높이 솟아오른 봉우리라 하여 장수 서봉으로 불리는 이 곳은 덕유산 주능선의 끝자락에서 약간 비켜나 자리잡고 있어 이 곳에서 덕유산의 전체모습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힘차게 뻗어나가는 힘찬 맥은 강한 힘을 느끼게 하면서도 그 포근하고 온화함은 넉넉함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어 이땅에 덕유산이 있음은 큰 축복였다. 모든 사물은 이곳에서처럼 한 발짝 비켜나서 바라봐야 모든 것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간단한 이치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남덕유산을 거쳐 삿갓재 대피소에 오후 1시경에 도착해 긴 휴식을 가졌다.

여름철 산행은 폭염과 싸우며 체력을 유지하는 것이 첫째 관건이다. 예상보다 시간이 더 소요되고 있지만 날이 너무 더워서 더 이상의 진행은 무리라고 생각되어 푹 쉬었다가 폭염이 한 풀 꺾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그 때에 산행을 계속키로 하고 잠이나 미리 실컷 자두기로 하였다

4시경에 배낭을 다시 걸쳐 메고 길을 떠나지만 찌는 듯한 폭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여름 덕유산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만개한 원추리 꽃의 군락지인 동엽령을 걸어가고 있지만 원추리 꽃의 그 화사함은 뒷전이고 그늘 한 점 없는 폭염 속에 살갗은 검게 익어가고 땀방울에 젖은 얼굴과 목덜미는 쓰리고 따갑기만 해 고행의 연속였다.

백암봉에서 주능선과 이별하고 동으로 방향을 틀어서 못봉을 지나 빼재로 이어지는 대간 길로 접어들자 골짝마다 땅거미가 드리워지며 이내 어둠이 찾아 들기 시작한다. 백암봉에서 빼재로 이어지는 대간 길은 초행길이라 야간산행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폭염 속에 고생하는 것보다는 야간산행이 그래도 더 낫다고 생각하여 야간산행을 계속키로 했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수시로 확인하고 걸어 온 시간과 오르내린 고도 등을 도면과 비교하며 한발한발 나아가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할 수 없으니 불안하기도 하고 솔직히 무섭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공비가 되기로 작정한 몸이라 남은 것은 깡다구뿐이었고 또 그것이 멋 인줄 알았으니 착각도 그 정도면 가히 수준 급이었다.

덕유산의 밤하늘에 별들이 어떻고 반딧불이가 어떻고 그런 호사는 당시에는 안중에도 없었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런 호사는 처음부터 생각치도 말고 오직 깡 하나로 걸어야 했던 길이었다

목적지인 빼재에 거의 도착할 즈음, 숲이 우거진 평탄한 지점을 발견하고 오늘밤은 이 곳에서 야영하기로 하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자정이 조금 지나고 있다.

오늘은 오전에 7시간과 오후에 8시간을 힘들게 걸어서 덕유산 구간을 모두 마무리하여 뿌듯하기도 하지만 강행군에 따른 피로가 누적되고 있음을 느껴 한편으로는 오버페이스로 남은 일정이 걱정되기도 하다

그 동안 걸어왔던 산길을 회상해 보니 먼 길을 걸어 왔다. 경남의 산청 땅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올라 함양 땅과 하동 땅을 거쳐서 전남의 구례 땅을 지났고 전북의 남원 땅과 장수, 무주 땅을 걸으며 덕유산을 넘어왔고 내일이면 경남의 거창 땅과 이별하고 드디어 경북 땅을 밟게 된다

오늘까지 걸어온 길이 대략 120km정도 되지만 아직도 시작해 불과하고 이제는 속리산을 다음 목표로 정하고 추풍령을 향해 길을 찾아가야 하나 추풍령까지는 앞으로 60km정도를 더 걸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할 길을 머릿속에 그려보다가 이내 곤한 잠에 골아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