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북한 피폭자들 지원대상서 빠져 안타깝다”

오완선 2014. 4. 9. 19:57

등록 : 2014.04.06 19:13 수정 : 2014.04.07 11:29

 

곽귀훈(90)씨

원폭 피해 승소 끌어낸 곽귀훈씨

“피폭자는 어디 있어도 피폭자”
12년 전 일본 정부 상대로 이겨
일본 바깥 거주 5000명 지원받아
‘나는 한국인 피폭자다’ 책도 내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다.”

곽귀훈(90·사진)씨의 이 한마디에 일본 재판소는 할 말을 잃었고, 일본정부도 상고를 포기하고 무릎을 꿇었다.

지난 4일 성남시 야탑동 자택을 출발해 홀로 서울 공덕동의 <한겨레신문사>를 찾아 온 구순의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곽씨는 너무나 정정했다. “그때 내가 그랬지. 오사카 공항에 들어가면 피폭자가 되고 공항을 나가면 피폭자가 아니냐. 아침엔 피폭자고 저녁엔 피폭자가 아니라는 법이 무슨 법이냐?”

그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단독으로 ‘피폭자 자격 확인소송’을 제기한 게 1998년이었고, 판결이 최종 확정된 건 2002년 12월18일이었다. 일본에 살지 않는 외국인 피폭자도 일본 원호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그런 류의 소송에서 거의 유일하게 승소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피폭 관련 소송의 흐름과 피폭에 대한 관념까지도 바꿨다. 그 다음해 3월부터 일본 바깥에 사는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에게도 건강수첩이 발급되고 일본후생성으로부터 연간 의료보험료 개인부담분과 월별 건강관리수당도 지급받을 수 있게 됐다. 한국 거주 피폭자 2700명과 미국 거주자 1000명, 브라질 거주자 2000명 등 약 5000명이 혜택을 받았다. 그 전까지 일본 정부는 일본 국외 거주 피폭자들을 원호법 적용대상에서 제외했다가, 한국인 피폭자 손진두씨 등의 소송을 거치면서 일본 입국 치료자에 한정해서 적용하는 쪽으로 개선했으나, 대다수 국외거주 피폭자들은 여전히 거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북에 생존해 있는 수백명의 남쪽 출신 피폭자들이 아직까지 지원대상에서 빠져 있어서 안타깝다”고 곽씨는 말했다.

얼마전 곽씨는 그 재판사건을 포함해 출생 이후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정리한 회고록 <나는 한국인 피폭자다>(민족문제연구소 펴냄)를 출간했다. “오래 전부터 후세에 진실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다. 일본이나 우리나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엇이 사실이고 진실인지 잘 모른다.”

전주사범학교를 다니던 곽씨는 1944년 9월 일제의 징병 1기생으로 히로시마 서부 제2부대에 강제징집당했다. “1945년 8월6일 원폭이 떨어졌는데, 원래 폭심지에서 750미터 정도 떨어진 부대에 있던 나는 바로 그 전날 폭심지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겨갔다. 그 덕에 살았다. 죽지 말라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죽다가 살았다. “그날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는데, 왼편 약간 앞쪽 방향에서 눈부신 섬광이 번쩍였고 왼쪽 턱과 왼팔, 등쪽이 완전히 타버렸다. 세상이 캄캄해졌고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희미한 시야 속에 방공호를 더듬어 찾아들어갔는데, 그때야 내 등에 불이 붙어 있는 걸 알았다.” 치사량 수준의 방사선에 피폭당했으나 그는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무지의 피폭자”였다. 그 무지가 오히려 그를 살렸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매일 5~6명씩 죽어나가는 임시 일본육군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으며, 미군 함포사격 소리에 사흘만에 의식을 회복한 그는 “살이 허물어지고 구더기가 끓는 지옥”의 위기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해 말 귀국해 그 다음해 고향 초등학교 교사가 된 그는 동국대 사대부속고등학교장으로 정년퇴임하기까지 교직에 종사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징병과 원폭 피해의 상흔들을 숨기지 않고 공론화하는 작업을 계속했고 그것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곽씨는 책 자료를 자신이 직접 챙겼고 3개월 가량 걸린 집필작업도 컴퓨터 자판기를 손수 두드리며 직접 했다. 지금도 안경을 쓰지 않고 아침 신문을 본다. 청력은 5년쯤 전부터 많이 떨어졌지만, 매일 탄천에 나가 4~10㎞씩 걷는다. 대한산악연맹 결성 멤버일 정도로 등산도 열심히 다녔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명예회장으로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서울 미아리에 있는 협회 사무실에 나가면서 강연도 한다. “지금도 일본어든 우리말이든 4시간 정도는 계속 얘기할 수 있다.”

일본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피스보트도 지금까지 5번이나 탔다. “인도와 파키스탄, 아프리카, 밴쿠버, 유엔본부, 남태평양 타히티까지 초청받아 갔다. 주로 핵 문제 얘기하러 간다. 내가 피폭자인데다 핵에 대해서는 남보다 좀더 공부를 했다. 나는 철저히 반핵이다. 해마다 히로시마 반핵평화집회에도 초청받아 가는데, 올 8월에도 간다.” 한국에선 오히려 별로 대우를 못받지만 “바깥에 나가면 제법 무게가 있다”고도 했다.

곽씨는 지금은 아픈 데도, 피폭 후유증도 없다고 했다. “피폭자들 평균수명이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길다고 하더라.” 그는 “원폭의 섬광 때문에 몸에서 나쁜 게 나 타버려서 그렇다고 얘기한다”며 껄껄 웃었다.

곽씨는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사고 뒤에 한동안 주춤하다가 다시 원전 재가동 쪽으로 가는 걸 크게 걱정했다. “원전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야. 반감기가 수십만년이나 되는 방사능 폐기물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중국도 400기나 원전을 지을 것이라는데, 황사나 미세먼지 날아오는 것 보고 있지만, 중국에서 원전사고가 나면 다 이쪽으로 날아올 텐데…. 아직도 수만 기가 있다는 핵무기도 어떤 정신나간 자가 의도적으로 그러든 실수로 그러든 단추 잘못 누르면 끝장인데…”

글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