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1개월 전 일본 히로시마로 징집된 스물 한 살 조선인 청년 곽귀훈씨 |
곽귀훈씨 히로시마 피폭 체험기 내
“순간 갑자기 온 세상이 붉은 불덩어리로 돌변했다.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웅장한 굉음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러고는 사방이 온통 깜깜한 암흑세계로 변해 버렸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1개월 전 일본 히로시마로 징집된 스물 한 살 조선인 청년 곽귀훈(사진)씨는 평생 잊지 못할 악몽 같은 광경과 마주했다. 미군의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투하한 것이다. 그는 눈 깜짝할 새 숨진 수많은 병사를 뒤로 한 채 토굴에 숨어 가까스로 방사능비를 피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을 지낸 그는 당시 피폭 경험과 이후 대일 보상 운동을 담은 회고록 <나는 한국인 피폭자다-원폭피해자 곽귀훈의 삶과 투쟁>을 최근 펴냈다.
그는 일찍이 1950년대부터 신문에 ‘히로시마 회상기’ 등을 연재해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를 제기했다. 98년 일본 이외 지역에 거주하는 원폭 피해자에게도 피폭자 수당 지급권을 인정해 달라는 ‘피폭자 확인 소송’을 일본 법원에 내 2002년 최종 승소하기도 했다.
책은 곽씨가 소련이나 만주 전선으로 배치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히로시마로 가게된 사연과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군인들과 갈등을 겪은 경험, 패색이 짙어진 일본군 분위기 등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 “피폭 순간 지옥이 있다면 이런 광경이 지옥의 모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바람이 불면 시체가 타는 악취가 사정없이 몰려 왔다”고 회고했다.
강제징집 당시 사범학교 학생이던 그는 해방 뒤 동국대 사범대 부속 중·고교 교장 등을 지냈다. 올해 구순에도 컴퓨터로 원고를 직접 작성하는 곽씨는 “아흔 살이 됐으니 평생 한 일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난해 4월부터 책을 썼다”며 “사선을 넘나들다 홀로 살아남은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