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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완벽한 요새? 비겁한 자가 지켜낼 수 있는 성은 없다

오완선 2019. 3. 8. 09:07



결정적 순간마다 쉽게 함락된 철옹성, 톨레도

송동훈 문명탐험가

톨레도는 스페인의 중심이다.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출발은 로마 시대의 요새였다. 가장 인기 있는 감상 포인트는 '계곡 전망대(Mirador del Valle)'다. 전망대는 톨레도를 삼면에서 감싸 안으며 도는 타호(Tajo)강의 남쪽 계곡 위에 있다. 많은 사람이 톨레도의 주변 언덕을 찾는 이유다. 요새는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바라봐야 참모습이 보이니까.

그곳에 서면 톨레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 듯 착각에 빠지게 된다. 톨레도는 완벽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도시는 강에 기대어 솟은 거대한 언덕 위를 건물로 빼곡하게 채우며 형성돼 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아도 좁은 건물 틈새를 비집고 거미줄처럼 연결된 길들이 느껴진다. 그리고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지배하는 두 개의 위풍당당한 건물. 대성당과 알카사르(Alcázar·왕궁). 종교와 정치·군사의 중심지였음을 상징한다. 대포가 출현하기 전에는 이 천험의 요새 도시를 정복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놀랍게도 가능했다.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톨레도는 제값을 하지 못했다.

무슬림 군대 무혈 입성하다

이베리아반도는 로마 제국의 일원으로 번영했다. 로마는 반도 곳곳에 도시를 세우고 길로 연결했다. 톨레도는 그 시절 타호강변의 군사 도시로 기능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베리아반도는 서고트족 손에 들어갔다. 서고트 역사상 가장 탁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레오비길드(Leovigild·재위 568~586년) 왕이 톨레도를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톨레도는 종교의 중심지로도 발전했다. 7세기 중반 새로 즉위하는 왕은 반드시 톨레도에서 톨레도 주교가 집전하는 도유식(塗油式)을 거쳐야만 합법적인 왕이라는 관행이 확립됐다. 왕국에서 톨레도의 위상은 절대적인 것이 됐다.

서고트 왕국은 8세기 초반까지 외세의 방해 없이 이베리아반도를 통치했다. 정치적 격변은 반도 남쪽에 무슬림 군대가 도착하면서 시작됐다(711년). 그들은 왕위를 두고 경쟁하던 한 당파의 요청으로 들어왔다. 장군 타리크(Tariq)가 이끄는 무슬림 군대는 고작 7000명 수준이었다. 서고트 왕국에 불행의 씨앗은 무슬림 군대의 규모가 아니라 이 군대를 이끄는 장군의 탁월함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정찰과 원조였지만 타리크는 왕국의 지배계층이 서로 싸우는 지금이야말로 이베리아에 진출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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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맞은편 언덕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구시가지는 세월의 흐름이 멈춘 듯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구시가지를 3면에서 감싸고 도는 타호강으로 인해 천험의 요새란 명성을 얻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이 험난함은 제 역할을 해 본 적이 없다. /Getty Images Bank

타리크의 예상대로 서고트의 분열된 군대를 물리치는 건 손쉬웠다.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 원군이 들어오면서 전세는 되돌릴 수 없게 됐다. 무슬림 군대는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서고트 입장에서 외적(外敵)이 너무 강해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서고트에는 톨레도가 남아 있었다. 북아프리카 출신 기병대가 주력인 타리크의 군대가 톨레도 앞에서 무엇인가를 느꼈다면 그것은 절망이었을 것이다. 변변한 공성기조차 없는 타리크의 군대가 톨레도를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 건 스스로의 노력과 수고 때문은 아니었다. 서고트의 지배층이 톨레도를 버리고 도망쳤기에 얻은 요행이었다. 목숨을 걸고 톨레도와 백성을 지키기보다는 살아보겠다고 재물을 챙겨 달아날 만큼 서고트의 지배층은 유약하고 비겁했다. 반면에 무슬림 기병대는 바람처럼 빨랐다. 도망쳤던 서고트 왕국의 성직자와 귀족들은 대부분 사로잡혀 죽었다. 톨레도의 함락과 함께 서고트 왕국은 멸망했다.

이제 이슬람 문명이 이베리아반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서고트의 잔존 세력은 반도 북서쪽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숨어 들어갔다. 그 땅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살아남기'였다.

코르도바서 이슬람 문명 꽃피워

이슬람 문명은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꽃폈다. 이슬람 세계의 첫 세습왕조였던 우마이야 왕조의 후손인 아브드 알-라흐만 1세(Abd al-RahmanⅠ·재위 756~788년)는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아 공존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전성기는 10세기에 찾아왔다. 이때 코르도바는 중세 유럽 대륙에 짙게 깔린 어둠에 대비되는 찬란한 문명의 빛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그러하듯 인간이 세우고 이끌어 가는 국가도 마찬가지다. 빛의 몰락은 갑작스러웠다. 10세기 후반부터 30년간 이어진 '알만수르(Almanzor)' 가문의 독재와 그 후유증이 원인이 됐다. 탁월한 알만수르에 의해 왕조의 정통 지배자인 칼리프는 허수아비가 되어갔다. 자질이 한참 떨어지는 알만수르의 어린 아들 알-라흐만이 아버지와 형에 이어 권력을 쥐면서 사달이 났다. 현명하지도 신중하지도 못했던 알-라흐만은 칼리프에게 자신을 차기 칼리프로 지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무력한 칼리프는 화답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분노한 반대파들이 들고일어났다. 알-라흐만은 진중에서 살해됐고 무력해진 칼리프를 대신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야심가들의 경쟁이 시작됐다. 투쟁은 내전으로, 내전은 멸망으로 이어졌다(1031년). 이슬람 세력은 10여 개의 작은 나라, 타이파(Taifa)로 쪼개졌다. 이슬람 세계의 변화는 반도 북쪽에서 숨죽이며 살던 기독교 국가들에 뜻밖의 기회를 제공했다. 300년 만에 역사의 물줄기가 크게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알폰소 6세, 톨레도를 탈환하다

톨레도 대성당 위치 지도

긴 세월 동안 반도 북쪽 기독교 세계의 패권국가는 아스투리아스(Asturias), 레온(Leon), 나바르(Navarre)를 거쳐 카스티야 왕국으로 바뀌었다.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을 함께 통치하게 된 알폰소 6세(Alfonso Ⅵ·재위 1065~1109)는 이슬람 세계의 분열 덕분에 당대 최강의 군주가 됐다. 그는 톨레도를 원했다. 전략적 가치뿐 아니라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다는 상징적 가치도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톨레도는 예나 지금이나 난공불락의 험지다. 힘이 좀 세졌다고 함부로 넘볼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당시 톨레도가 알-마문(Al-Mamun·재위 1043~1075)이라는 유능한 통치자 밑에서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도 걸림돌이었다. 알폰소는 기다려야 했다.

알-마문이 죽고 뒤를 이은 손자 알-카디르(Al-Qadir)는 무능하고 변덕스러웠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지 않고 카스티야에 조공을 바치고 평화를 구걸하는 쉽지만 어리석은 길을 택했다. 알-카디르의 권위는 갈수록 추락했고 결국에는 반란으로 쫓겨났다. 알-카디르는 알폰소에게 도움을 청했다. 카스티야의 왕은 기꺼이 폐주(廢主)를 도와 톨레도 정복에 나섰다. 고립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지도자조차 없이 안으로 분열된 톨레도가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성문이 열렸다. 알-카디르는 발렌시아를 약속받고 톨레도를 알폰소 왕에게 넘겼다. 1085년 5월 6일 톨레도는 다시 기독교의 품으로 돌아왔다.

톨레도 탈환은 역사의 결정적인 분기점이다. 이제 기독교 세력은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게 된다. 비록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최종 승리를 거둘 때까지는 400년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변화는 시작됐다.

톨레도 입지의 탁월함은 안에서도 확인된다. '요새 안의 요새'인 알카사르에서 밖을 바라보면 또 다른 절경이다. 삼면은 완벽하게 강으로 보호되고 유일하게 육지와 연결된 북면의 문과 벽은 강인하고 삼엄하다. 이토록 완벽해 보이는 톨레도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허망하게 함락됐다는 사실이 알려주는 진실은 간단하다. 요새를 지키는 건 요새가 아니라 사람의 용기라는 것이다. 비겁한 사람이 지켜낼 수 있는 성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톨레도 대성당의 대주교, 순혈령 내려 반대파 공격
혼혈은 고위직 못한다는 원칙, 스페인의 자유·활력 앗아가

톨레도 대성당은 스페인의 제1 성당으로 오늘날 스페인 문명을 형성하는 데 역사적으로 기여한 바가 크다. 동시에 순혈령이라는 부정적인 제도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톨레도 대성당 주제단과 제단화의 화려함은 이 성당이 스페인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위상과 권력, 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톨레도 대성당 주제단과 제단화의 화려함은 이 성당이 스페인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위상과 권력, 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Getty Images Bank

순혈령은 출신이 낮은 톨레도 대주교 실리세오(Silecio)가 자신과 대립했던 명문가들을 공격하기 위해 '조상이 순수한 사람만이 톨레도 성당의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는 규칙을 정하면서 시작된 일종의 정치·사회 투쟁이었다(1547년). 무슬림, 기독교, 유대교가 800 년 가까이 공존했던 탓에 스페인에는 혼혈이 상대적으로 흔했다. 지체 높은 귀족과 부유한 유대인 가문 사이의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실리세오는 명문가들의 이런 역사를 정치적 족쇄로 이용한 것이다.

1556년 펠리페 2세에 의해 법제화된 순혈령은 종교재판소와 더불어 스페인 제국 몰락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스페인 사회에서 자유와 활력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7/20190307003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