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특파원 칼럼] 그때 그 일본인들 / 길윤형

오완선 2015. 4. 3. 18:38

지난달 21~22일 일본 혼슈의 최서단인 야마구치현에 다녀왔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에게 이 지역에 관해 묻는다면 지체 없이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꼽히는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떠올릴지 모른다.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 지휘한 미우라 고로(1847~1926),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 ‘이익선’이라는 개념으로 조선 침략의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한 ‘일본 육군의 아버지’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 등 조선과 악연이 있는 조슈번(현 야마구치현) 출신자를 꼽자면 아마도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쇼와의 요괴’라 불렸던 기시 노부스케(1896~1987) 전 총리도 이곳 출신이며, 그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 현 총리의 정치적 근거지도 다름 아닌 야마구치다.

한국인으로서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이 지역을 찾은 것은 일본 전국에서 전후보상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1년에 한번씩 결집하는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이하 강제동원넷)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행사를 마친 뒤 조선인 136명이 숨진 현내 우베시의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1942년) 현장을 돌아보는 ‘필드워크’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지역 시민단체인 ‘조세이 탄광의 물비상을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1993년부터 한국 유족들을 초청해 매년 추모식을 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족을 어떻게 찾아냈을까. 사정을 물어보니, 야마구치 다케노부 전 대표(2015년 사망) 등이 1990년 우연히 발견된 조세이 탄광의 <집단도항명부>의 이름과 남겨진 희생자들의 창씨명을 대조해 봤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20명의 이름이 일치했다. 이를 실마리로 한·일 지자체의 도움을 받아 한국인 유족의 주소지로 추정되는 호적상의 주소를 확인해 편지를 보냈다. 이 과정을 거쳐 1992년 한국 유족회가 발족했고, 이후 매년 대한해협을 오가는 교류가 이어지는 중이다.

비슷한 사연을 홋카이도에서도 들은 적이 있다. 홋카이도의 사찰인 이치조사의 주지인 도노히라 요시히코 스님을 중심으로 한 시민단체가 지역의 댐 건설 작업 도중 숨진 조선인들의 유골 반환 작업을 진행할 때였다. 한국 유족들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었던 이들은 지역에 남아 있던 매장·화장인허증에 적혀 있는 한국 내 주소지에 무턱대고 편지를 보낸다. 이번에도 거짓말처럼 한국의 유족들로부터 감사의 뜻을 담은 답장이 쏟아졌다.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보면,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1999년 사무실이 없어 거리에 나앉게 됐을 때 이들에게 사무실 임대비용 60만엔을 지원해준 것도 야노 히데키 ‘한·일 유대회복 캠페인’ 사무국장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들이었다. 한국에서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자 일본의 시민단체가 이를 지원해야 한다며 강제동원넷 출범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이도 후쿠도메 노리아키를 중심으로 한 규슈 지역의 활동가들이었다. 이런 긍정의 역사도 열거하자면 아마도 끝이 없을 것이다.

 
해방 70년이 되는 올해 이토 히로부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겠지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일본의 모습이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그때 그 일본인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겪은 강제동원 피해의 수많은 진실들은 여전히 역사의 어둠 속에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저지른 어두운 역사를 외면하지 않았던 이들의 용기 있는 모습은 박정희 정권 시절 내려진 긴급조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여서 손해배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한국 대법원의 궤변과 겹쳐져 묘한 공명을 남긴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2015.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