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무안 거지촌’ 품바의 진화

오완선 2015. 4. 20. 19:49

‘한국의 전통 랩’ 무안품바
9일 아침 전남 무안군 무안읍 무안시장에서 품바 이강산(왼쪽 셋째)씨가 꽹과리를 두드리며 장타령을 부르자, 한 어르신이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좀 팔려?”

9일 아침 전남 무안군 무안읍 무안시장 ‘품바’ 이강산(57)씨가 과일 노점상에게 말을 붙였다. “아이고, 시세가 없어”라며 한숨을 쉬는 여주인의 탄식을 듣고, 이씨가 “시세가 없으면, 모이쇼~”라고 허두를 낸 뒤, ‘장(場)타령’을 시작했다. “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 떨어진 도포 차림에 찌그러진 양푼을 맨 이씨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걸인 차림을 한 이씨 등 품바 패거리 6명은 상인들과 인사도 하고 농담도 하며 공연을 시작했다. 40대로 보이는 한 야채상은 이씨의 깡통에 길쭉한 풋고추를 넣어주며 농을 걸었다. 품바의 타령에 맞춰 춤을 덩실덩실 추던 황일두(80·나주시)씨는 “어찌 장이 흐지부지했는데, 품바가 옹게 흥이 난다”고 말했다.

무안군은 11월까지 무안장(4일·9일)과 일로장(1일·6일)을 찾아 품바 공연을 펼친다. 군은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의 ‘2012년 창조지역사업’ 공모에서 ‘한국의 전통 랩 무안품바 문화자원화 사업’이 선정돼 사업비 9억8400만원을 지원받았다. 오일장 품바 공연은 공연장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장터를 돌며 농담을 나누고 타령을 하거나 ‘목포의 눈물’ 등 유행가도 함께 부르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장터 품바 공연은 일로품바보존회(회장 조순형)가 주관하고 있다. 2곳 장터 품바 공연에 5~6명의 품바가 참여하고 있다.

품바의 발상지 일로읍 의산리
일제강점기 걸인마을 ‘천사촌’
타령하며 쪽박 들고 동냥다녀

연극인 고 김시라, 세상에 알려
왕초 김자근 삶 담은 연극 ‘품바’
1981년 초연 “막 했는데…울음바다”
작년말 6000회…올해 새 작품 준비

각설이 품바, 다양하게 진화
이벤트·밤무대 품바로 분화
군 ‘품바예술힐링학교’ 운영

무안장 이씨 공연이 끝난 뒤 ‘품바의 발상지’인 일로읍 의산리 888번지를 찾아나섰다. 일제강점기 ‘천사촌’이라는 걸인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거지대장으로 불리던 김자근(본명 천팔만, ?~1973)이 거지들과 함께 살던 집단촌이다. 일로읍 소재지에서 49번 국도를 타고 승용차로 5분 정도 가자 ‘품바의 발상지’라는 표지석이 보였다. 동행한 일로각설이협회 고문인 서기석(54) 백련기획 대표는 표지석 아래 밭을 보면서, “초가가 3개였다가 철거 마지막엔 7개까지 늘었다. 당시 25명 정도 살았을까요?”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서 대표는 10대 후반 때 천사촌 걸인들과 어울렸던 인연이 있다. 왕초 김자근이 세상을 뜬 뒤 딸과 사위 김광진(?~2008), 마지막 천사촌 생존자 김연산(?~2011) 등을 잘 알고 있었다. 서씨가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자근이가 일제시대에 목포 부두에서 일했드만요. 지금으로 말하면, (공출미 관계로) 노사분규가 났지요. 일본 놈들이 잡으려고 하니까, 일로 쪽으로 도망왔다고 해요. 김자근이가 소지마을 인근 들판의 누런 나락을 보고 ‘아따 저기 가면 굶어죽든 않겄구나’라고 생각해 움막을 치고, 노동자들을 불렀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김자근이 실제 부두 노동자 파업을 주도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서 대표는 천사촌으로 불리게 된 배경도 쉽게 설명했다. “어느 날 혼자 살다가 병에 걸린 노인을 집단촌으로 데리고 와 뱀도 끓여 먹이면서 병간호를 했다드만요.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아따, 진짜 느그들이 천사다’라고 했답니다.” 고아와 노인들을 위해 동냥하고 분배하는 공동생활을 하면서 날개 없는 천사로 불렸다는 맥락과 비슷하다. 주민 나선홍(76)씨는 “자근이패가 타령하면서 쪽박 들고 동냥하러 다녔지만 주변 사람들한테 피해 준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일로의 품바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시인이자 극작가 겸 연출가인 고 김시라(1945~2010) 덕분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던 그는 낙향해 지역문화운동을 펼친다. 일로읍 청년들과 인의예술회를 결성했던 그는 자근이패의 타령을 접하고 큰 관심을 가졌다. “상여가 나가는데, 천사촌 걸인의 각설이 타령이 상두꾼 상엿소리보다 더 슬펐다고 하더라구요.” 서기석 대표의 회고다. 김시라는 막걸리 병을 들고 천사촌으로 가 타령을 채록했다. 김시라는 “각설이 타령은 가장 낮은 자의 가장 높은 신명의 목소리”라고 보았다.

장타령은 각설이들이 음식과 돈을 얻기 위해 불렀다. 각설이나 남사당패, 광대는 기예를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는 점이 비슷하지만, “광대나 남사당은 예술 전문집단이고, 각설이는 엄격한 수련은 받지 않은 채 빌어먹으려고 축원하는 뜻을 담은 타령을 부르고 놀았다”는 점이 다르다. 품바는 타령의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우는 ‘입장고’로 불렸다가 “품, 품” 하며 입으로 뀌는 방귀라는 의미로 ‘입방귀’로 확장됐으며, 지금은 각설이나 걸인의 대명사가 됐다. 품바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은 김시라가 창작한 한 편의 연극 때문이었다.

김시라는 1980년 5월 광주 학살 소식을 듣고 고심하다가 죄 없이 죽은 원혼들을 위해 연극 한 편을 만들었다. 그 연극이 바로 <품바>다. 1981년 12월30일 일로읍 월암리에 있던 일로회관(공회당)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의 원제는 <친애하는 각설이 동지 여러분!>이었다. 작중 주인공 천장근은 의산리 천사촌에 살던 걸인촌 우두머리 김자근의 삶을 각색해 탄생됐다. <품바>엔 5·18 광주 등 세상의 불의와 불평등을 풍자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조명도 없이 불 하나 켜고 막 했는데, 울음바다였다고 그러더라구요. 거기서 강한 충격을 받고, ‘야 이건 생명력이 있는 작품이다’ 해서 광주로 그 작품을 올리고 다시 서울로….”(김시라의 부인 박정재의 회고)

김시라가 개척한 새로운 장르의 <품바>는 지난해 말로 6000회 공연을 넘었다. 하지만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의 품바 전용관 상상아트홀은 지난 1월 건물 재건축으로 문을 닫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 유족들은 무안군의 지원으로 국내외에서 <품바>의 맥을 이은 새로운 작품을 올릴 수 있게 됐다. 김시라의 부인 박정재(53) 극단 가가의회 대표는 “31년 전 연습을 하던 중 공연 정지를 당한 <2015 품바-양심재판>(원제 남바)을 준비해 6월에 서울 무대에 올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가 남편의 작품을 연출하고, 딸 추리(25)씨가 여성 품바로 등장한다. 극단 가가의회는 7월과 8월 광주와 무안, 몽골에서도 이 작품을 선보인다.

전국의 축제장이면 어김없이 등장해온 각설이 품바도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전국의 품바는 600여명으로 추산되지만, 관객을 휘어잡을 수 있는 품바는 100~150여명에 불과하다. 과거엔 물건을 팔던 생계형 ‘난장 품바’가 대부분이었으나, 요즘은 각종 축제장만 출연하는 ‘이벤트 품바’, ‘밤무대 품바’ 등으로 분화하고 있다. 일각에선 “품바 정신의 가장 큰 핵심은 민중성인데 일부 상업성을 띠면서 외설만 남고 해학과 풍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무안군은 목포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품바 예술힐링학교’(연구책임자 나승만 목포대 교수)를 운영하고 있다. 품바예술힐링학교는 3월에 개강해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밤 10시까지 목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김미숙(심리학 박사 및 예술치유사), 정헌진(철학치료 전문가), 정권숙(극단 새결 대표)씨 등이 강사로 나선다. 주부, 학생, 연구자, 품바 각설이 등 30여명이 수강 중이다. 다음 학기엔 고급반도 개강한다. 품바예술힐링학교 교장인 이윤선(52) 목포대 국문과 초빙교수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이 각설이 정신이다. 각설이 누더기 옷만 입어도 마음이 달라지고, 낮은 곳으로 마음을 내려놓는다. 품바를 예술적 치유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지역의 인재를 양성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무안/글·사진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