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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산행기-10 (문경새재에 대하여)

오완선 2012. 12. 1. 18:22
이번 대간 길은 이화령에서 소백산 죽령까지 약 80km정도이며 4일을 계획하고 있다. 첫날은 이화령에서 조령산을 넘어 반대편 조령3관문으로 내려와서 다시 마패봉을 오른 후에 하늘재까지 이어가며 산행거리는 대략 20km이다.

첫 구간은 옛 영남대로인 문경새재의 조령관을 지나므로 아주 친숙한 느낌이 들고, 어느덧 가을이 되어 산행하기에도 최적의 계절이라 대간을 걷는다는 의미보다는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가을 산을 마음껏 만끽하는 그런 대간 길이다.

새재는 옛길이고 새롭게 만든 신작로가 이화령으로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으나 신작로를 만들기 이전부터 이화령을 넘는 고갯길이 있었고 새재는 주로 양반들이 이용하는 관로로 사용되었고 이화령고갯길은 민초들이 넘나드는 길이었다.

새재의 3곳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힘없는 백성들은 관문에서 시달림을 받음으로 비록 3배나 먼 길을 돌아가더라도 아예 속 편하게 험준한 이화령을 넘었다 하니 관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새재는 영남대로의 기능 외에도 낙동강과 남한강의 水運을 연결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영남지방의 세곡을 한양으로 운송하는 방법은 도로사정 때문에 상주까지는 낙동강을 이용하고 상주에서 충주까지는 새재를 지나는 육로를 이용한 후에 충주에서 다시 남한강의 뱃길을 통해 한양까지 운반하였다.

오래되어 정확한 년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어떻게 운반하였는지 그 경로를 해인사 스님들이 추적하여 당시의 운송방법대로 재현한 적이 있었으며 당시 밝혀낸 경로가 바로 남한강과 낙동강을 새재로 연결하는 경로였다.

이명박 전시장의 경부운하발상은 새로운 발상이 아니고 옛부터 우리 선조들이 이용한 방식이며 한강수계와 낙동강수계를 연결하려면 백두대간의 새재를 넘어야 한다. 그러나 물길은 산을 넘을 수 없으므로 백두대간이 지나는 30km의 정도는 지하터널을 뚫어 연결한다는 발상이나 부산과 인천은 해상으로 얼마든지 연결이 가능한 데 굳이 경부운하를 건설한다는 것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화령과 새재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늘 목적지인 하늘재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듯하다. 고갯마루를 지나는 옛길은 오늘날 등산로처럼 모두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으나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고갯마루에 길을 만들었던 최초의 길은 신라에서 길을 내었던 계립령이며, 계립령이 바로 하늘재로 추정하고 있어 우리나라 옛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렇듯 오늘 이어갈 백두대간은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길이라 시작부터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이화령에서 조령산을 올라가서 새재로 내려오는 구간은 대략 4-5시간 소요되므로 일반등산코스로 많이들 이용하여 잘 알려져 있으며 특이한 점은 새재로 내려오는 구간은 위험지대가 많아 30여 곳 정도는 밧줄을 잡고 내려오므로 마치 유격훈련을 받는 기분이다.

3관문은 복원이 잘 되어있고 주변경관도 수려하여 공원에 와 있는 느낌이고 문경새재는 도립공원이므로 공원에 와 있는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공원에 와 있는 것이며 건너편 산비탈에는 주막집도 있어 대간 길에 곡기삼아 막걸리한잔 마실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는 없다.

신립장군이 왜, 이런 천혜의 요새를 이용하지 않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며 왜군과 맞서 싸워야 했는지, 이 곳 도면과 지형을 살펴보며 답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수수께끼로 남을 뿐이다.

이 곳은 단지 지대만 높은 그런 일반 고갯마루가 아니라 조령산과 주흘산이 만들어낸 6km의 협곡의 가장 높은 곳으로 협곡인 이 길만 봉쇄하면 왜군의 북상을 막을 수 있었던 그런 전략 요충지였고 반대로 왜군들은 이 곳만 무사히 통과하면 한양은 바람 앞에 촛불이었다.

이런 전략적 가치 때문에 이 곳은 삼국시대로부터 이 땅의 최대 격전장이었다. 신라는 이 곳을 뺏기면 문경과 상주가 무너지고 낙동강의 수로를 넘겨주는 꼴이 되며, 신라가 이 곳을 넘어가면 충주 땅을 점령하여 남한강의 수로를 확보하여 백제와 고구려 땅을 넘볼 수 있었으니 3국이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피 터지는 격전장이 아니 수 없었다.

이 곳에서 다시 마패봉을 오르다보면 흔적만 남은 옛 성터를 곧 만날 수 있고 막영지로 사용하였음직한 그런 장소들도 남아있어 그런 사실들을 반증하고 있고, 마패봉의 이름을 추적해보면 이 곳이 격전장임을 더 확실히 말해주고 있다.

마패봉은 대동여지도등 고지도에는 마골첩(馬骨帖)으로 표시되어 있다. 마골은 우리말로 풀이하면 말뼈이므로 마빼가 되고 다시 마패로 변했으리라 생각하며 마골이 의미하는 것은 이 곳에서 무수한 격전을 치루며 많은 말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

대간 길은 마패봉에서 부봉은 거치지 않고 주흘산 방향으로 이어가며, 잘 다듬어진 등로를 따라가다가 등로를 이탈하여 2-3m의 절벽으로 착각하기 쉬운 좌측 내리막 능선을 찾아서 진행해야하므로 이 지점은 길 찾기가 그리 쉬운 곳이 아니었으나 그 후에 다시 찾아가 보니 안내표지가 잘 설치되어 있어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탄항산을 거쳐서 목적지인 하늘재에 도착하니 짧은 해는 벌써 서산에 걸려있다. 지금까지는 더위와 싸우느라 목적지에 도착하면 체력이 거의 소진되었으나 이제는 본격적인 가을 산행을 시작하므로 산행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어서 체력은 아직도 남아도는데 대신에 짧은 해가 발길을 붙잡고 있다.


우리 역사상 고갯마루에 최초로 길을 낸 계립령으로 추정하는 하늘재, 이 곳은 묘한 지명의 두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한쪽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고 다른 한쪽은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다.

관음리와 미륵리의 두 지역은 하늘재에서 경계를 이루므로 이는 현세인 관음세계에서 미래에 도래할 미륵세상을 꿈꾸며 이곳을 넘나들면서 하늘재라 이름지었을 것이며, 아니면 이 고갯마루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 수많은 원혼들의 한이 스며있는 “恨의 재”를 하늘재로 승화시켜 불렸을 만하다.

하늘재에서 옛 길을 따라 30여분 내려오면 유명한 미륵사지가 자리 잡고 있고 폐사터를 둘러보면 그 규모가 엄청난 곳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웅장한 미륵대불은 오늘도 찾아오는 길손들을 모두 반갑게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싸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그 날밤 하늘재에서 바라본 수많은 별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