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2/낙서

성경시대 41.

오완선 2013. 12. 24. 20:41

과거를 만나 오늘을 위로받는 동창회. 요즘 들어 동창 모임이 더 성황이다. 풋풋한 얼굴은 삭아가고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가슴과 허리가 구분되지 않는 나이, 선생님을 모시면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중년들이 꾸역꾸역 모여드는 이유는 뭘까?

각자 다른 명함으로 살아가지만 유일하게 잔머리 안 굴리고, 체면 차리고 고상 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터다. 소싯적 친구들은 어린 시절의 특징만으로 기억하고, 유치했던 기억조차 아름답게 포장돼 낄낄거리는 소년 소녀가 된다. 사는 게 밍밍하고 짓누르는 삶의 고뇌가 깃털처럼 가벼웠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 좋고, 서로의 얼굴에서 주름살이 옹기종기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안쓰러워하면서도 같이 늙어갈 친구가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한다. 최근 일은 깜빡깜빡하지만, 30~40년 전 추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들은 서로 퍼즐을 맞춰주며 타임머신을 같이 타준다. 이젠 공소시효가 지나 더 과장되게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하고 샌님 같던 남자애는 알딸딸하게 오른 술기운을 빌려서 ‘예전에 너 좋아했었다’며 과거형으로 고해성사를 해버린다.

동창회는 남녀 모두에게 합법적으로 이성을 당당하게 만날 수 있는 자리다. 늙어가면서 외간 남녀에게 허물없이 서로 이름 부르고 툭툭 치면서 반말 찍찍 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물론 모든 친구들이 다 아름답지만은 않다. 세파에 찌들어 궁티가 줄줄 흐르는 애, 이혼하거나 사별하고 막막한 애, 은밀히 다가와서 죽상을 하면서 보험 들어 달라거나 다단계 같이해서 떼돈 벌자고 하는 애는 기본이다. 돈 꿔달라는 친구도 있고, 돈 많은 티 줄줄 내는 놈도 있다.

시끌벅적하게 먹고 마시고 떠들고 노래하고 흔들어 대는 사이에 우정을 빙자해서 컴컴한 구석에서 도란도란 호박씨 까는 미꾸라지들도 있다. 예전에는 ‘찌질이’였던 것 같은데 돈 좀 벌더니 생긴 것도 더 잘생겨 보이고 매너까지 그럴듯해 보이면 남편과 오버랩되면서 한 사람은 더 위로, 한 사람은 더 밑으로 추락한다. 어렸을 적에는 고백할 군번이 못 돼서 짝사랑만 하다가 돈 좀 벌고 어깨에 힘 좀 들어가니 빈틈을 보이는 그녀에게 용기 내어 강하게 밀어붙인다. 여자도 싫지 않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과거를 추억하며 만감이 교차하면서 혼란스럽기 쉽다.

이때 가장 중요한 변수는 현재 남편과의 관계다. 부부 사이가 끈끈이로 찰싹 달라붙어 있다거나 잘나가는 남편이라면 흔들리지 않겠지만, 초라한 백수 남편이거나 가두리 양식장에 갇혀 사는 고기처럼 멀뚱멀뚱 쳐다보는 사이라면 본능에 충실하고 싶어진다. 만족하지는 않지만 미적지근하게 조용히 살던 가정에도 회오리가 칠 수 있다. 동창회 다녀온 후로 눈치 보며 전화를 나가서 받거나 시도 때도 없이 문자메시지가 쑝쑝 날아온다. 누구냐고 따지면 화를 내기도 하고, 구구절절 변명도 하지만 남편의 오해나 잔소리쯤은 한 귀로 실실 흘리고 웃는다.

이젠 동창회는 핑계고 은밀히 둘이 만나다 보면 갈 데까지 갈 수도 있다. 남편에게서 평생 구경 못 한 친절을 받으면 정신 못 차리고 폭 빠져버린다. 거추장스러운 윤리 때문에 맥없이 그냥 헤어지기도 하지만 지퍼를 내리기도 한다. 첫사랑은 꼭 찍어 먹어 보지 않고, 추억으로 간직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다.

카톡 문자는 계속 온다. 아내가 동창회 다녀온 후도 안녕하신가?

 

성경원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2.12.21기사입력 201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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